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답답한 시대, 기본소득으로 시야확보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발행 중인 연속 칼럼 <시대정신 기본소득>에 실린 글입니다. 이후의 칼럼들을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소득의 이야기가 있다. 한 번 들어보자 :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매 달 충분한 생활비가 지급된다면, 우선 가난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해고가 곧 사형선고라는 공식은 무효해질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으니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일자리의 합당한 개선을 이끌어올 것입니다. 소득증가는 소비를 촉진시키므로 시장 경기도 활성화될 것입니다. 또한 보편적 복지로서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불러오며 조세 정의의 실현과 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성과들을 내어놓고, 생태적인 삶의 실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불황, 생태문제까지 해결한다니, 아무래도 사기 아닐까? 솔직히 그렇다, 반쯤은. 위의 예를 돌아보자면, 시장을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기본소득은,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상충한다. 더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충돌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반만 사기인 까닭은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 각각에 결합하여 강력한 힘을 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없이’라는 기본소득의 성격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주체인 모든 ‘개인’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행위자들에게 자원을 지급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주체들에게 자원이 지급된다면, 문제는 ‘어떤 욕망을 따라 그 자원들이 흘러가고, 또 어떤 문제를 구심점 삼아 재편될 것인가’이다. 일단 모르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각자 어떤 욕망과 임무들을 발견하게 될까? 지금 기본소득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사고, 질병, 분쟁, 불황 등 만성적인 위기감과 반복되는 절망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문제 해결력이 요구되는 시대상황 앞에 우리 대부분이 문제를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무력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80년대 생 이후 청년들은 그렇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통계 지표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무력감의 덫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준다.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허튼 꿈이나마 꿔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로소 당면한 리스크들을 바라 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이 지면은 앞으로 다양한 주체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대표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소득 이야기를 수집함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이 ‘기본소득 뷰’를 통해 검토해 볼 예정이다. 이 시도는 기본소득의 문제 해결력을 입증해 당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본소득을 통해 미션들을 발굴해내고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지도를 그리기 위한 사전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소규모의 이야기들이 모여 다양성의 미학을 성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합적인 사회적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 실마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우선은 가볍게 이야기들을 늘어놓아 보기로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 전방위이종문화리뷰지 <나불나불 9호: 골병>에 게재되었습니다.



0. 골병

  “속으로 깊이 든 병”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가보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1. 이야기라는 세계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지 못한다. 대신 그 작고 유연한 몸을 숙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덕분에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혹은 시청각체험)은 다시 못 겪을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슬픔이 솟아나기 이전에 고통 그 자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울 겨를도 없었다. 고통의 장면들은 책을 덮거나, 화면을 끄고 나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꼭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무렵 학교에서 본 유니세프의 엽서 캠페인 영상은 나의 유년기를 지배한 이미지였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오갈 데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 가느다랗고 늘어진 검은 팔다리, 불뚝 튀어나온 배. 그 주위를 웅웅 맴도는 검은 파리들. 캠페인에 참여하고 따뜻한 버터밀크 같은 일러스트 엽서도 받았지만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종종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건너편 빈 벽을 마음의 스크린 삼아 몇 시간이고 어린이들을 떠올려 보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그러면 눈에 선했다.


2. 학급문고 경향

  문제는 내가 내성적인 어린이었고, 매 학기 초의 단짝은 교실 맨 뒤에 놓여있는 학급 문고였으며, 낡은 신발장 같았던 그 빈약한 책장은 각종 한국창작동화, 학습만화, 위인전 전집들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습만화는 비교적 인기가 좋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인전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에 죽기 때문에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리하여 읽게 되는 한국창작동화들은 대개 ‘운수 좋은 날’과 ‘소나기’의 변형으로 분류될 법한 우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단 한 편이라도 행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를 바라며 그 동화집들을 도리 없이 읽어 나가곤 했다.

  그건 정말 조금도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경험은 ‘상계동 아이들’(노경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바로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던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속의 상계동은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주공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비탈진 달동네로,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이들의 진열장이었다. 알콜 중독자 아빠를 둔 아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 맞아 죽는 병든 어머니를 둔 아이 등등. 작가는 곤계란 같은 음식을 무척 열심히 다루었는데, 거의 민속지 같았다. 2004년 재출간 되면서 나온 출판사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힘겹고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편안한 문장에 꼼꼼히 담아 놓았고, 슬픈 현실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 같다“

  다 큰 머리로 보니 가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이라는 명실상부한 죄책감 해소용 자위행위를 왜 어린이들을 향해 한단 말인가? 어린이들은 거기 동참할 줄도 모르는데 뭘 어떡하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이 책을 비롯해 ‘불우한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한국 어린이책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당시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랐던 것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디어 산업이 감추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계몽?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 고난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건 설마 아니겠지.


3. 죄책감

  그들이 뭘 의도했건 간에 여기에 진입한 어린이 독자가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통스러운 삶’ 뿐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경우, 이야기를 통과한 상처투성이 마음에는 한 가지 전리품만이 남아있었다. 죄책감. 우습게도 나는 자신이 가난하지도 않고 고아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점에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곤계란 같은 걸 먹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나는 켄터키 후라이드 오리지널 치킨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 옆에서 위축되는 현상과 사소한 욕망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죄책감의 기원을 불우한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통해 찾아보자. 책장을 열면 무력한 인물과, 제한된 공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시간에 따라 닥쳐오는 단선적인 세계가 있다. 수동적인 인물에게서는 능동적 욕망이나 영향력이 읽히지 않고, 이 단선적인 삶은 대안으로서의 다른 지평도 미래도 보여주지 않는다. 타개해야 할 악은 건드릴 수 없이 멀거나 막강하다. 지도를 그려볼 수 없는 세계는 개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는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공간의 제한(다른 길의 부재)이 비전을 차단함으로써, 독자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볼 때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도 차단당하게 된다. 이때, 가로막힌 시선이 돌아와 결국 향하는 곳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어린이는 백기를 든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미완의 내면을 손쉽게 장악해버린 죄책감이 죄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제인식 -> 문제해결”의 프로세스가 아닌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를 설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선함과 정의로움이 공통의 속성으로 취급되는 세계관을 그린다. 고통을 택하는 만큼 책임이 해소되는 것이 이 세계의 계산법이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병들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는 것으로 발전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다. 만사를 눈물의 알리바이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냥 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으로 기꺼이 벌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선한 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 이러한 욕망을 놀려대는 마음도 함께 자라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불행과 연민의 치킨게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의심과 추측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 한 심약한 어린이가 방어기제 없이 불행한 이야기를 거듭 통과했을 때 내면이 어떻게 병드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거듭 통과해야 했던 걸까. 이것을 어떤 의도의 결과로서 현상의 위치에 두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계동 아이들’은 독후감용 권장도서 목록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몽실 언니’, ‘아홉 살 인생’같은, 불우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주말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바 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에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학습시키고자 했던 어떤 선량함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불우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장애인이나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다.’ 장담컨대 수많은 방학숙제용 독후감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과 순응이란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선이라는, 신분 위계를 내포한 너그러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죄책감은 책을 덮은 뒤 문제의 원인, 즉 책임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가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스스로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경우의 수를 추가해 “문제인식 -> 책임묻기 -> 응징 혹은 반성을 통한 속죄”정도로 수정해보자. 이것이 유효한 사회라면, 공적인 문제도 사적인 차원의 속죄와 응징의 문제로 변환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즉, 개인들은 책임을 공통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강한 권위(보통은 국가일 것이다)가 누군가를 처절히 응징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책임을 느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서 출발해 자책이나 냉소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제 몫의 분노나 슬픔을 비개방적인 사적 네트워크나 지나치게 광대한 군증 속에서 군불 떼듯 연소시키는 사회에는 공공성을 구성하기 위한 언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담론의 자리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효과를 결합해보니 아주 불행한 처지는 피했다는 안도감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장착한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 그려진다. 문제없는 사람들이 세계의 복판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제 자리에서 바라만 보는 심상도. 최근에 현실에서 무게중심이 비어있었던 배, 씽크홀과 같은 진짜 구멍들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처참할 정도로 무능한 사회라는 구멍도.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요즘에는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안도감 보다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더 우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불우한 이야기는 효용을 잃었을텐데,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권장되고 있을까. 일단 오늘의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는 ‘마법 천자문’이다.


5. 모험의 세계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시대를 불문하고 어린이가 피해야 할 이야기, 어린이책의 탈을 쓰고 출판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독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들.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내면형성에 해롭다. 통상 죄책감이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은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면, 불우한 이야기들은 가타부타 욕망을 터부시 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조절기능을 발달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온오프 버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욕망 오프 상태에 맞춰 착한 아이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연민이나 위선, 피해의식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문제가 된다.
어린이 책이 그 대상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건 단속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세계라는 놀이터다. 아시다시피 열길 사람 속에 대한 성찰과 탐구는 이미 수많은 고전들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건 슬기로운 주인공과 그가 극복하고 고쳐나가야 할 엉망진창인 세계, 그리고 열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책 표지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어린이들은 비로소 세계 속에서 욕망과 임무를 일치시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다행히 나에게도 학급문고 외의 탈출구들이 있었다. 시공사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출판 된 양장본의 ‘로테와 루이제’(에리히 캐스트너)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라 잊지 못할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쌍둥이 소녀의 운명 같은 만남과 깜찍한 사랑공작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생애 최초로 ‘최애 작가님’의 자리에 등극했다. 독일인이었던 캐스트너는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부모를 잃거나 소외당해야 했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바로잡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경로를 선사했다. 그것은 90년대의 한국 어린이였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유머와 통쾌함, 그리고 용기였다.


6. 차라리 우스운 세계를

  이 무렵의 나에게는 아프리카 어린이와 곤계란 외에도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상이나 책이 아니라 실제사건인데, 어느 날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아저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가 그 혼자만의 사정(射精)을 구경한 일이다. 그 장면은 진짜 우스꽝스러웠고, 나는 집에 뛰어 들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엄마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었다. “엄마! 모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오줌 쌌어. 그거 부끄러운 거지?” 물론 엄마는 신속히 연락을 취해 사건을 처리했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추행은 내 마음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않았다. 생뚱맞게 글을 마치게 되었는데, 성범죄자들을 덜 경계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요는 이렇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우리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방법이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기본소득이 그리는 미래


*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의 토론문으로 발표된 글 입니다.

0. 소개

  이 발제문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어떠한 사회를 꿈꾸며 활동을 해나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 미래까지 책임져야 할 청년(youth)으로서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결책을 바랍니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동등하게 배치될 수 있는 큰 사회상은 아닙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금액을 매 달 현금으로 지급하자”는 명료한 한 가지 아이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문제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 스위치와도 같고 따라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래사회와 관련된 몇 가지 결정적인 이슈들과 기본소득을 연결 지을 때 그려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미래: 기후변화, 인구고령화, 기술의 발전

  21세기를 변화시킬 국가적 단위의 정책제안이라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기후변화 및 에너지자원 고갈이라는 생태문제와 인구고령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피크오일’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의 고갈은 대량생산의 비전을 꺼버렸고,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되어 이미 특정 지역에서는 높아진 해수면 높이에 주거를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인구고령화는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기대수명의 연장과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출산률 저하로 인해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노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확실하지 않은 채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고,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며 낮은 고용률까지 계속되면서 청년세대의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미래를 구원할 수는 없을까요? 전문가들은 기술발전이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대체할만한 생산력과 정밀함을 제공하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 및 정보화의 추세가 ‘공유’를 활성화 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자원의 절약이며 인류의 발전이지만, 우리의 생계가 임금노동에 저당 잡혀 있는 이상, 이는 일자리와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양날의 칼로 다가옵니다. 최근 적법성을 갖고 이슈가 되고 있는 우버나, 기존 시장을 위협할 만큼 커진 에어비앤비 같은 서비스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에 기술한 경향들은 확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 역량의 증진

  너무 큰 문제의식은 무기력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개개인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의 역량을 키워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은 다양하고, 그만큼 불확실하지만,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개인은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에 대해 기본적인 협상력을 갖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방종’이 우려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유의 권리와 책임이라는 양면을 지닌 ‘자율성’의 강화와 그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2.1 노동의 자유

  기본소득은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지급함으로서 노동과 소득 간의 고리를 끊습니다. 즉, 생계를 위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에 매달릴 필요가 사라집니다. 이 말은 평생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쉴 때는 쉬면서 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긴 동시에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이제는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휴식의 생산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영학자 린다 그래튼은 일의 미래가 유연한 전문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교육이고, 유연성을 위한 전제조건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1년 이상의 장기 휴식입니다. 기본소득은 이처럼 배움과 휴식이 평생 보장되는 삶의 꼴에 잘 부합하는 정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 인증 받지 않고도 예술작업과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 있으며, 돈이 되지 않는 연구사업을 진행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꺼려하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3D 업종에는 지금보다 높은 임금이 책정되는 공정함이 구현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십대 때부터 무의미한 스펙경쟁에 뛰어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다른 부문에서 더 생산적인 경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많은 도전과 실패가 가능한 산업 생태계에서 더 자주 진정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2 소비로부터의 자유와 생태사회로의 전환

  생태문제의 해결은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는 엘리트 집단의 연구를 통해서만은 불가능합니다. 에너지의 소비자이자, 수요중심 에너지 정책의 알리바이인 개인들의 패러다임 변화와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 것은 곧, 노동과 소비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외주화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로 완성시키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대량생산(완전고용)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이 만들어낸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을 돈을 벌고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초국적 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더 값 싼 노동력 착취로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며 막대한 양의 탄소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현금지급형 복지가 이러한 소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생깁니다. 이제 시간을 들여 소비와는 다른, 생산적인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시간, 새로운 제작문화를 익히고 즐길 시간, 직접 먹거리를 길러 볼 시간이 생깁니다. 소비의 즐거움은 반복되면 될 수록 결핍이 커지고 쾌락의 역치가 높아지지만 생산적인 즐거움은 하면 할 수록 더 깊은 몰입과 새로운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또한 기본적인 자립 기술을 익힘으로서 외부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높여줍니다.


3. 전제조건

  ‘돈’은 매개체 입니다. 돈의 가치는 그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서비스와 재화 간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기본소득은 ‘존재 그 자체를 위한 돈’을 모두에게 지급합니다. 이때 이 ‘돈’이 모두의 존재를 긍정하며 어떤 관계의 흐름으로 흘러들어갈 것인지가 이 정책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극단적 상황을 가정하여,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이 모두 초국적 기업의 값싼 제품들과 대형마트로, 투기와 임대료로 흘러들어간다면 사회에 더 큰 격차와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유통될 필드를 교정하고 새롭게 제시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서 사회 전반의 역량이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국가와 지역사회라는 두 주체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1 공공서비스가 보장된 사회

  몇 가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았지만 의료에 드는 돈이 천정부지로 높다면? 지금처럼 주거 임대비가 1인 가구 소득의 수채구멍인 상황에서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인해 월세가 함께 큰 폭으로 오른다면? 가족 및 지인과 교류할 시간을 얻었지만 통신비와 교통비가 오른다면?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데 고등교육기관의 질이 형편없다면?
기본소득이 강조하는 자유는 ‘모두에게’, ‘조건없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는 점에서 ‘평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소득만으로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충분히 빈곤을 해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서비스 정책 패키지가 함께 논의되고 도입되어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공공서비스는 현실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3.2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부상

  또한 미래에는 지역사회의 존재감이 더 커져야 합니다.
우선 기본소득의 가장 바람직한 사용처는 지역입니다. 지역상권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대기업 유보금이 아닌 이웃의 소득으로 유입되며 실물경제를 활성화 시킵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생산적 활동의 무대 역시 지역에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머리를 맞댄다면, 에너지 자립 마을과 같은 전망도 세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존 복지담론의 주체는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통제하는 큰 정부, 타협의 대상인 민간 기업들과, 납세자이자 수혜자로서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납세자의 역할을 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수혜자인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중앙정부 대신 지방정부 및 시민사회라는 주체를 좀 더 수월히 불러옵니다. 공공서비스의 집행자로서 중앙정부는 너무 멀고 큰 존재입니다. 시민과 소통하며 지역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당합니다. 또한 그 비용부담을 모두 국가재정이 부담하는 것도 갈 수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고통받는 한국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현실이 부족한 재정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다행히 보육, 교육, 노인 돌봄 등 복지서비스 산업은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 산업들입니다. 다만 급여가 높지 않고, 이윤 중심의 수입사업이 될 경우 서비스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동반 제안된다면 이러한 단점을 상쇄될 것입니다. 동시에 일자리의 매개 및 공급처로서의 지역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여성과 노인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청년세대의 부담을 덜며 고령화가 불러일으키는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같은 제 3섹터의 주체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사업체인 동시에 결사체적 사명을 띠고 있는 이 같은 조직들의 이중의 부담을 한 결 덜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9세기는 노예해방, 20세기는 보통선거권, 21세기는 기본소득”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합니다.(한국의 근대사에는 맥락이 맞지 않지만) 매 번의 자유가 획득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학습과정입니다. 지역정치의 활성화와 함께할 때, 기본소득은 분명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 될 것입니다.


4.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입니다. 기본소득은 분명 급진적인 발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도입과정까지 급진적이리란 것은 아닙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이란 질문을 통해 자신이 현 사회의 이해관계망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 할 때 다양한 문제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통해 재의미화 되며 사회를 앞으로 추동할 것입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다양한 문제들이 집중될 수 있는 효율적인 아젠다입니다. 우리가 기본소득에 동의할 때, 당위에 머무르던 몇몇 아젠다들이 필요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효율적으로,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우리는 공통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참고]
<일의 미래>(2012) / 린다 그래튼 / 생각연구소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2010) / 조지 매그너스 / 부키
<조건없이 기본소득>(2014) / 바티스트 밀롱도 / 바다출판사
<사회혁신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추진하는가>(2011) / 제프 멀건 / 시대의 창
"사회복지 공무원 39% ‘고위험 스트레스군’" 2013.10.17, 시사in 317호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20세기 팝업북, 21세기 서사의 배치(mis-en-scène)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 웨스 앤더슨) 리뷰

* 영화잡지 [아노]. 3호 미장센에 실린 글 입니다.


1. 웨스 앤더슨 콜렉션

웨스 앤더슨의 출세작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1998)의 주인공 맥스 피셔(제이슨 슈왈츠먼)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다. 그는 체스 클럽, 천문학 클럽, 펜싱 클럽, 프랑스 클럽, 양봉 클럽 등 다수의 클럽 회장이자 연극 연출가이며 교지 편집장 등등을 역임하고 있다. 사업가 블럼(빌 머레이)은 이런 맥스를 야망 있는 소년이라며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실 맥스는 비전과 야망을 갖고 맹렬하게 스펙을 쌓는 청년이라기보다는 학교에 틀어박혀 각종 교내 활동을 수집하는 데 몰입하는 유아적인 인물일 뿐이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닮아있기도 하다. 무표정한 인물들, 강박적인 대칭 화면과 연극적 구성 등, 직선적이고 각 잡힌 형식의 화면들은 앤더슨이 수집해온 컬러풀한 사물들을 정연하게 전시하기에 딱 알 맞는 진열장이다. 그 뒤로는 역시 취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선곡이 흐른다. 인물들의 옷 스타일을 비롯한 각각의 소품들은 영화 전체를 대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완성도 높은 아트워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그리고 많은 경우 영화 밖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르누아르, 오퓔스, 고다르, 트뤼포, 루비치, 스콜세지 등 웨스 앤더슨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리스트는 길고 화려하다. 그러나 앤더슨이 이들 중 누군가를 계승한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원색, 트래킹 샷, 롱테이크, 화려함, 소동극. 60년대 음악 등 그의 영화에 들어있는 기호들이 순간순간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 역시 취향에 맞게 수집된 기호들일 뿐, 감독의 방법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오직 앤더슨이다. 처음 보는 스틸 샷 한 장 만으로도 우리는 그 장면이 그의 영화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개성의 증명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다 엇비슷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장센 뿐 아니라, 제 나름의 결핍을 지닌 미숙한 인물들이 소동극을 벌이다 결국 저마다의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성장의 스토리 역시 반복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앤더슨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반복은 비판받아야 할 매너리즘이라기보다 일련의 시리즈가 제공하는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다. 앤더슨이 자신이 수집해온 기호들로 미장센과 O.S.T를 채우면, 그의 팬들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차곡차곡 수집한다. 학교와, 저택과, 기차와, 바다를 마치 레고 시리즈처럼 차곡차곡. 데뷔 이후 줄곧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웨스 앤더슨이 특유의 높은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지지보다는 선호를 받는, 취향의 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2012) 이후에는 지난 작품들을 망라한 콜렉션 북이 출간된 바 있다. 과장을 약간 섞어 ‘취존’이라는 표현은 그와 그의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키덜트 무비’, ‘힙스터 무비’라는 수식은 앤더슨의 영화들이 그간 어떤 맥락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훈장을 달고 올해 초 국내 개봉한 근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은 그의 지위를 취향의 층위 너머로 끌어올릴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팬시한 외양의 호텔은 그 나름 대작의 아우라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일까? 먼저 웨스 앤더슨 월드의 윤곽을 그려본 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 세계의 경계선을 어떻게 변경시켰는지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2. 사각형의 세계

웨스 앤더슨은 곧잘 연극(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혹은 책(로얄 테넌바움)을 모방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막이 오르고, 장이 나눠지고, 삽화가 등장하고, 타이포그래피가 삽입된다. 눈이 즐거운 동시에 의문이 든다. 이 사람은 왜 연극 연출가나 작가가 되지 않고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스크린도 사각형이기 때문이 아닐까? 앤더슨의 창작동기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현실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하려는 종류의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가능하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과 명료하게 구분되는 사각형 안의 통제 가능한 세계이다. 책과 무대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선호는 앤더슨의 치밀하게 짜여 진 완벽주의적 미장센에서부터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트래킹 샷은 정연하게 수평을 그리고 인물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연극적으로 움직인다. 실제로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전에 결정한 뒤 촬영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완벽한 틀에 대한 집착은 이야기의 완결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코미디, 멜로, 서스펜스 중 어떤 장르로 불러줘야 할지 애매한 앤더슨의 영화들은 성장물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한 데 묶일 수 있다. 이야기들은 교훈을 남기며 인생의 한 시기가 마무리 되는 것으로, 때로 누군가의 죽음을 매듭삼아 완결된다. 이는 무대에서 막이 내리는 것 같은, 책의 뒤표지를 덮는 것 같은 완벽한 종결의 인상을 준다. 그것이 소위 열린 결말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 현실적인 시각적 완결성이 이러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로얄 테넌바움> 같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테넌바움 가와 그 주변의 기이한 인물들이 관객과 같은 현실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리란 상상을 실감나게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 복장과 표정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현실에 없다.


3. 진짜 같은

그런데 <문라이즈 킹덤>은 조금 다르다. 전작들과 달리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니라 그냥 소년 소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아마 웨스 앤더슨의 가장 어른스러운 드라마일 것이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다 자란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마무리 한 후에도 딱히 인물들의 내적 변화나 반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장물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애정관계를 허들로 삼는 성장물이었던 전작들을 역전시킨 듯 오히려 성장물의 외피를 쓴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사랑(혹은 우정)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이 이야기의 목적지이자 핵심이다. 세계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두 소년 소녀가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편지를 통해 감정을 교환하며 둘 만의 낙원에 함께 있으려 한다는 줄거리는 관객들로부터 익숙하게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그 만큼 이 작품의 사랑은 전에 없이 진짜 같은 것이 된다. 앤더슨의 영화에 잔혹한 장면들은 제법 자주 등장하지만, 샘(자레드 길먼)이 낚시 바늘로 수지(사라 헤이워드)의 귀를 뚫어주는 장면만큼 고통이 생생하고 아찔하게 와 닿는 장면은 없다.

진짜 같아진 것은 인물과 감정만이 아니다. 배경의 인공적 느낌도 한 결 덜어졌다. <문라이즈 킹덤>의 모험은 초원과 숲, 해변과 바다에서 진행된다. 이는 앤더슨이 무대, 혹은 동화책을 벗어나 어느 정도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단 이 모든 변화는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앤더슨에게 섬이란 자연까지 세트로 삼을 수 있는, 확장된 버전의 무대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와 숲을 포함한 무대 위에서, 뉴욕이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보다 마음 놓고 넓은 공간감을 즐긴다. 이전 작품들이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완성되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은 이 섬의 지도를 그려내며 완성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딘지 쓸쓸한 정조를 풍기는 삶의 지속이 남아있다. 앤더슨의 1960년대는 그가 그려내는 동시대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노스탤지어만이 과거의 유물을 끊임없이 수집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진짜 같은 감정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4. 1점 투시의 3차원 서사

<문라이즈 킹덤>이 한정 된 공간 속의 모험담이었던 데 반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차 대전 전의 유럽이라는 광활한 공간으로 돌아가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세운다. 대신 이번에 한정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점점 먼 과거로 향해야 한다. 첫째로 묘지의 소녀가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작가(톰 윌킨슨)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 든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난 젊은 시절의 작가(주드 로)를 거친 뒤에야 마침내 무스타파가 구스타브의 로비보이였던 어린 시절(이하 제로)의 '이야기'로 진입 할 수 있다. 한 명의 독자(소녀)와, 한 명의 청자(작가), 그리고 한 명의 화자이자 목격자(무스타파)를 거치며, 이미 세 차례 종결된 이야기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 한정된 시간 구성 속에서 전에 없이 스케일 큰 서사를 펼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뿐이다. 틸다 스윈튼, F 머레이 아브라함, 하비 케이틀, 마티유 아말릭, 레아 세이두, 주드 로, 윌렘 대포(그리고 조지 클루니)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캐스트를 채운 배우들은 이야기의 안내자나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신속하고 말끔하게 수행한 뒤 잔상 없이 퇴장한다. 조연들에게 따로 허락된 사연이 없다는 점 또한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시간대에 따라 화면비를 바꾸는 수고이다. (30년대 - 1.37:1, 60년대 - 1.85:1, 80년대 - 2.35:1) 이는 이야기의 중층적 시간 구성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면서 관객이 점점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3차원 적 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에 이야기의 초점이 단 한 명의 인물, 구스타브에 맞춰지면서 그 자체가 소실점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이에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쳐인 1점 투시 촬영과 인물을 중앙에 두고 움직이는 트래킹샷이 서사적으로 구현된다. 전작들이 이야기책이라는 병렬적이고 평면적인 심상을 완성한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확실히 입체로서 완성된다.


5. 20세기 유럽이라는 팝업북

한편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간 구성과는 달리 공간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구스타브와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마치 보드게임 위의 말처럼 호텔, 마담 D.의 저택, 수도원과 감옥, 이 점에서 저 점으로 동선 없이 이동한다. 다시 인공의 세계로 돌아온 웨스 앤더슨이 만든 유럽에 진짜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예쁜 마분지 같은 알프스는 귀엽고, 국경을 지나는 기차는 아무래도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유럽이 당시 유럽의 실제 모습보다는 30년대 헐리웃에서 활동한 동유럽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세트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재현이 아니라 수집과 조립과 상상의 작가라는 걸 관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품 제작을 위한 집요한 고증 따위와는 별개로, 지난 시절을 설득력 있게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그가 성취하려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중층적 시간 구성의 서사가 만들어낸 입체적 공간은 섬세하고 평면적인 미장센으로 채워지게 되고, 결국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한권의 ‘팝업북’으로 완성된다.

이 팝업북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예쁜 그림들과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과 파시즘이라는, 20세기를 양분하는 역사를 담고도 이렇게 팬시한 제품을 내놓아도 되는 걸까? 파스텔톤의 멘들스 케이크 박스가 정의의 중심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파시스트들의 깃발이 내걸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마침내 드미트리 일당과 구스타브 일행이 맞닥뜨리고 총격전이 오갈 때, 멘들스 박스는 총알을 막아주고, 난간에서 떨어지는 제로와 아가사를 받아준다. 역사 속의 거악을 불러내 대처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작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다채롭고 입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도 그 사이즈는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녀의 무릎 위를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까닭에 감탄과 질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말 뛰어난 팝업북이다! 하지만 고작 팝업북을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원: 기억의 재현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기는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독자인 소녀와, 청자인 작가를 지나 관객이 실질적으로 접속하는 시점은 제로, 무스타파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구스타브라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두 말할 것 없이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일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빛을 발한다.

아가사의 첫 등장 장면과 데이트 씬은 앤더슨의 그림들 사이에서 돌출적인 인상을 남긴다. 첫 등장 장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 구시가지의 평범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장면에는 앤더슨 특유의 인공적인 분위기가 전혀 더해져 있지 않다, 대칭도, 평면적이고 회화적인 느낌도 없이 평범한 새벽녘의 차갑고 낮은 채도 속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차가운 공기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겨울의 설산이 배경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찬 공기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이 지나갈 때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무스타파는 아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즉 이 장면은 책 속의 이야기도, 작가에게 전달된 말도 아니라 무스타파의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다.

회전목마에서의 데이트 씬 역시 예외적이다. 화면구성이나 카메라의 동선이나 각을 무척 잘 잡는 앤더슨의 영화에서 동선이 원을 그린다. 그리고 제로에게 낭만 시 선집을 선물 받은 뒤 클로즈업 된 아가사의 얼굴 위로 동그란 색색의 조명들이 둥글게 움직인다.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이 장면들은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시간의 재현을 실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인 순간이다. 제로와 아가사의 사랑에 대한 예외적 취급은 팝업북의 삽화가 묘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퇴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묘지와 대비를 이루며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마분지 세계의 이야기에 일말의 ‘진정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굉장히 완성도 높은 마분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효과이다.


7. 21세기의 걸작?

자, 그래서 잘 만든 팝업북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으로 아름답게 감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인가? 웨스 앤더슨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을까? 촌스러운 질문에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는 진부한 대답만이 기다릴 뿐이다. 다만 지지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 앤더슨이 21세기 초반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21세기 초라는 동시대를 투명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인류는 달에 인간을 보냈지만 오늘 날 인류는 인간을 달에 보낸 컴퓨터보다 수 배 뛰어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보이저 1호가 36년 만에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뉴스를 리트윗하고 잊어버린다. 21세기 대도시의 시민에게는 우주도 감동과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영화는 오죽할까. 극장용 영화 산업은 사실상 100년 전에 발명된 기술인 3D에서 스펙터클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3D 영화야말로 진짜 입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팝업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전까지는 그의 영화제작 방식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동시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으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부터 눈을 돌려 자꾸 과거로 향하는 동시대의 퇴행적 관점 자체를 액자 서사 구조 안에 내재화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미장센과 서사의 구조를 결합함으로서 취향의 영역 바깥에 생성시키는 의미이며,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일 것이다. 소녀가 스킨헤드 풍의 청년이 서있는 무덤 입구를 지나 살풍경한 작가의 묘 옆에서 책을 펼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도입부는 이러한 시대의 적나라한 거울 같은 장면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그것이 기대한 만큼 숭고하거나 충분히 아름답지 않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팝업북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이 그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만큼 위대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가 가장 ‘21세기 적인 방식의 진정성’을 개척해내기를 바란다. 그 역시 난이도로 따져보자면 전에 없이 위대한 과제일 것이다.


* P.S

이제 빛바랜 향수와 함께 무릎 위의 책을 덮고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비석 같은 질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20세기라는 노스탤지어, 혹은 테러나 재해, 불황을 바라보는 생존자의 ‘윤리적 시선’ 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전쟁뿐일까? 중동과 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 영화가 영화제를 점령하게 될 때는 언제쯤 올까? 과연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있기는 한가. 

2014년 6월 1일 일요일

기타 등등

   내가 나를 혐오하고 부정하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타인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길었던 불화의 시기가 끝나가고 곧 화해의 순간이 돌아오리란 기분이 든다.

   어제 발표하며 새삼 반성의 서사만큼 쉬운 성장 서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반성까지만 공유해도 이미 반 쯤 문제를 극복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동은 쉽게 변하지 않고, 반성 이후엔 기나긴 적응과 이행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고개는 이미 꺾였는데, 몸은 관성대로. 보는 사람이 민망할 듯한 어색한 움직임으로 삐걱삐걱 걷는다. 어쩐지 목적지로부터 오히려 멀어져가는 듯한 느낌에 몸이 바르게 적응할 때까지 그냥 멈추고 싶어진다. 완벽하게 다시 세팅된 포즈로 걷고 싶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허영심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휴식과 성찰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발판삼아 도약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회복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향했던 시선을 복원해야 한다. 딱 5초만 눈을 감고 있으면 금새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구두 뒷굽을 딱딱 부딪히면. 보네거트를 다시 읽으면. 로메르를 한 두 편 보면.

   대화는 좀처럼 쉬워지지 않는다. 1)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 2) 상대의 자리를 남겨둘 것. 그 외의 주의사항들이 더 있을터인데, 잘 모르겠다. 요즘은 어떤 대화 자리에 갈 때 머리 속에 미리 지도를 그리는 게 습관이 되었고, 언제나 그 이상을, 예외를 기대하며 반만 내뱉고 있으면, 파울. 공이 뚝 고꾸라진다.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포즈 뿐이다.

   오늘 하나의 오빠가 떠나셨다. 나랑 관계있는 일도 아닌데, 한 달 정도는 떠올리면 웃음이 나올 듯. 남사스럽게 남의 일에 이입하구 난리야 ㅋㅋ 으크.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청년

   결핍은 많은 걸 설명한다. 하지만 설명만 할 뿐이다. 이에 결핍을 탐색하는 일을 멈추고, 내가 가진 것들을 순순히 인정하며 그것의 쓸모를 탐구하기 시작한 뒤 부터 불행이 떠나지 않는다. 이 불행을 끝내고 다시 우울로 회귀하고 싶은 충동이 갈 수록 더 자주 찾아오고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비겁하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옳은 정신과 아름다운 영혼을 갖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독특한 것이다. 내면이 존재하고 언어가 처음 움직일 때부터 나는 선량했다. 눈치는 없는 게 스스로의 사소한 악함에는 민감했다. 어린시절 내가 저지른 악행은 세 살 때 동네 마트에 가서 크런키 초콜렛을 집어온 것,(너무 작아서 카운터에서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서 사과시키며 물건을 사고 파는 개념을 학습시켰다.) 다섯 살 때 유리병을 깨뜨리고는 말 못하는 동생의 실수로 돌린 것 정도가 다였다.(아홉 살 때 어버이날 편지에서 고백하고 용서 받았다.) 당연히 다른 어린이들의 야만을 이해할 수 없고 동참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거짓말에 속아넘어갔다. 한 번 술래가 되면 그날 마지막까지 술래였다. 


그 심성 그대로 자랐기 때문에, 스무 살 넘어서는 솔직함이 의도치 않게 처세로 자리 잡았다. 바닥을 다 드러내면 악의라고는 없는 민낯이 나타났기 때문에, 예상했던 경멸 대신 의외의 애정들이 돌아왔던 것이다. 내게는 과분하게 느껴졌던,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에 대한 위안이기도 했을 애정들. 그러나 자기로 수렴하는 태도의 윤리적 한계를 깨달으며 이 안온한 내면 전시의 시간은 끝났다. 동시에 타인의 내면을 고평가하는 기만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옳은 정신과 아름다운 영혼은 꾸준한 내면 관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건강한 육체와 잘 가꿔진 표정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당위에 더 걸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곧 단정한 아침을 설계하는 생활, 밤을 정리해야 하는 생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부터.


그 이후로는 매일 아침이 절망이다.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을 걷어내면 한결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자기혐오다. 행동력을 높이기 위해 근거도 없는 부실한 자부심을 성급히 쌓아올린 게 잘못이었을까. 새로 찾아낸 기준이 모든 어제를 실패로 판단하자, 삶은 호소할 수 조차 없는 하찮은 수치로 얼룩지고 모든 내일은 공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달리 무슨 도리가 있단 말인가. 겸손을 빙자해 스스로를 저평가하며 다독거릴 시간, 뻗어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이런 순간 가장 나쁜 선택은 자기혐오를 잊기 위해 타인에 대한 경멸을 시작하는 것이다. 입밖으로 내지 않은 최근의 몇몇 경멸과 혐오는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일단 오늘은 다시 제 바닥을 들통내며 스스로를 까내리는 차악을 택해본다. 나는 20 세기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비대한 자의식의 숙주에 불과하다. 핵폐기물에 피폭당한 영혼이 할 줄 아는 건 소비와 성찰 뿐이다. 별자리점과 심리테스트, 자기계발서들은 말한다. 생각을 멈추고 행동하세요. 아니 나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거에요. 영원히 못할 거에요. 더 나은 실패조차 아닌, 같은 실패만을 지긋지긋하게 반복할 거에요. 잠든 새 솜이불에 질식당해 죽어버렸으면...... 죽음조차 이토록 부드럽게 상상하는 나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걸 포기하고 의탁할 곳을 찾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선량할 때.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을만한 여지가 있을 때.

   아니야. 인간이 못된다고 벌레가 될 순 없다. 나는 아직 젊고, 머리도 쓸만하다. 부모는 나를 지지하고, 친구들은 나를 이해한다. 예쁜 남자친구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면 애정의 눈빛을 돌려 준다. 나는 지지부진함을 견뎌내며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사회에 개입할 수 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구원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그럴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결말 같은 것. 그런 건 꿈도 꾸지마 ㅎㅎ 오늘도 스스로에 대해서만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했으니까 ㅎㅎ 고다르의 부고를 들으면 눈물이 날까? 이런 건 언제나 닥쳐야 알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안 날 것 같다. 그런데 눈물 따위 정말 알 게 뭐람.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청년을 사로잡는 기본소득


* <대토론회: 복지국가론 vs 기본소득론>에서 발표된 토론문 입니다.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모인 개인들과 단체들의 네트워크다. 청'소'년은 0세~30대의 미래 세대를 칭하는 조어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경제생활에 진입하게 된 세대, 축적되어가는 생태 및 빈곤 문제를 짊어진 세대, 다양한 상상력을 지녔으나 이를 펼칠 자원이 없는 세대를 가리킨다.

청'소'년이 기본소득이라는 대안을 미래를 위한 열쇠로 선택한 이유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기술해보고자 한다. 학술적으로 엄밀한 사용에서 벗어난 단어들이 곳곳에 많이 있을 터인데 미리 양해를 구하며,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


1. 청년에게 복지국가보다 기본소득이 매력적인 이유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일자리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일자리 문제는 청년 문제의 뇌관이다.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한국의 청년 일자리 현황은 특히 심각하다. 한편에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의 주축을 맡으며 장시간의 질 낮은 일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경제활동에 진입하기를 유예하며 스펙을 만들거나 경쟁률이 400:1에 육박한다는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청년들이 있다.

  청년의 입장에서 이는 피치 못할 상황이다. 90년대부터 물가 인상률의 두 배로 매년 가파르게 상승한 대학 등록금과, 지방 출신 청년들의 발목을 잡는 수도권의 값비싼 임대료는 아직 전문 기술을 익히지 못한 청년들을 협상의 여지 없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덫으로 이끈다. 운 좋게 부모의 지원을 받아 준비 기간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안정적 일자리에 올인 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이 야기하는 불안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이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정이 이러한데 정치권에서는 중소기업 투자를 통한 일자리 확대나 청년 창업 프로그램 제안과 같은 주변적인 아이디어들만 내놓는 수준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용 문제를 맞닥뜨린 유럽은 어떨까. 선진 모델로 국내에 곧잘 소개되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중산층 노동자 계급이 국민 다수의 비중을 차지하고, 이들에게 높은 세율을 부과해서 확보한 재원으로 탄탄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완전고용에의 지향을 전제로 두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일자리 정책은 노동연계성이 높다. 이를테면 직업 교육 프로그램과 연계된 실업수당을 통해 임금 소득이 없는 동안의 생계를 보장하면서 새 일자리 찾기를 돕는 식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모델이지만 여기에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결함이 있다. 70년대 석유파동 이후 대량생산을 통해 안정적인 부를 축적하고, 국가가 주도해서 부를 재분배하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 대안으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는 유동적 자본과 초국적 기업 시스템에 의한 노동유연화를 채택함으로써 오늘날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노동 연계 복지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성을 보완하는 역할에 그친다. 일례로 독일은 2000년대에 경제위기의 압박으로 비정규 저임금 일자리들과 연계된 복지 정책을 펼쳤고, 이는 지금도 빈곤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과거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함으로써 일자리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일자리 창출이 요원한 상황에서 결국 실업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책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분배일 것이다. 기본소득은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효과를 가져온다. 생계를 위해 적은 수의 일자리를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임금 노동을 통한 추가 소득의 인센티브는 여전히 존재하므로, 노동시장의 공급이 모자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비로소 협상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노동시장의 공급 수요 곡선이 적절한 균형점을 새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계를 위한 계산 대신 자신의 삶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일자리를 탐구할 수 있는 사회에서, 청년은 비로소 자살을 고민하지 않고, 결혼과 출산을 포함한 삶의 꼴에 대한 고려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생태 사회로 향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화석연료를 통해 전에 없이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던 시절은 반세기 전에 끝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자력 발전이 결코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특히 현존하는 세대 중에 가장 먼 미래까지 살아가야 할 청년 세대에게,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면에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지속 가능한 저성장으로 유지되는 생태사회로의 전환은 청년 세대가 직면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생태운동과 결합한 기본소득은 청년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 국가, 복지국가, 자본주의 국가 모두가 자연에 대해 수탈의 자세를 취했고, 그 결과 우리는 전 지구적 협력이 요구되는 생태 문제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문제들을 해소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다른 형태의 국가 혹은 사회 시스템의 개발이야말로 이번 세기에 해결해야만 할 숙제일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시행되는 기본소득제는 석유 자원에서 얻은 이익을 주민들에게 지급한다. 천연자원을 배제적인 이익 창출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공유자원으로 여겨,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석유뿐 아니라 다른 자연자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태사회에서 자원 부족 문제 해결의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관리다. 조건 없는 보편적 기본소득은 이에 걸맞는 자원 재분배 도구일까? 사회보험은 소득 수준에 따라 보험비의 납부와 지급액에 차등이 있고, 이것이 더 많은 소득에 대한 유인이 되는 데 반해, 기본소득은 소득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지급되므로 이와 같은 위계를 없애고, 임금 노동을 생계로부터 분리시켜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도록 유인한다. 사람들이 생산(노동)을 덜 하는 동시에 추가 소득을 얻음으로써, 삶의 질은 낮아지지 않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잘 알려진 것처럼 기본소득은 다른 복지 정책에 비해 행정비용을 크게 감소시킨다.

  물론 이와 같은 생태적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재원 조달부터 지급까지, 생태사회를 염두에 둔 다양한 세팅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일례로 생태 문제와 기본소득을 결합한 생태 기본소득 모델은 생태세를 책정해 기본소득의 재원 및 에너지 문제 해결 비용으로 사용한다.

  셋째,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해 자율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언급하지만 사실 기본소득이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다는 것.

  청년들의 답답한 현황을 좀 더 이야기해야겠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라는 수식처럼 오늘날의 청년들은 뛰어나다. 한국의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케이블방송이 들어오고, 일본 문화가 개방되고, 음악 검열이 사라지고, 영화, 게임, 아이돌 산업을 필두로 한 한류까지 90년대에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이 결정적이었다. 대중문화의 확장과 함께 서브컬처와 독립문화의 맹아도 싹텄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은 사교육 훈련과 이 다양한 문화적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세대다. 강한 생존력과 빠른 학습 능력, 다양한 콘텐츠! 바야흐로 창조경제에 걸맞는 고부가가치 인력들인 것이다. 야근과 저임금을 원동력으로 획득한 IT 강국 한국이라는 칭호가 씁쓸하게 이를 증명한다.

  문제는 이 잠재된 능력들이 발휘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음악, 요리, 춤, 별별 영역의 재능 있는 청년들은 최후의 1인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놀라움을 선사하며 소진되고, 스펙 좋은 대학생들은 수차례에 걸친 테스트, 그룹 면접, 합숙 면접, 프레젠테이션 등으로 이루어진 대기업 입사 경쟁에 뛰어든다. 그런데 작금의 시스템에서 과연 이들의 능력이 얼마나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까? 불안과 무력감, 오랜 경쟁 관계로 인한 불신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자기계발 욕망은 번번이 좌절되곤 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도 회의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대다수다.

  기본소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이 제공된다면 청년들은 제도권의 허락 없이도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다양한 공간들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존보다 높은 차원의 성취를 이루고자 노력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개인을 나태하게 만들기보다 사회적 책임을 내재화해서, 상품화된 노동과는 다른 가치로 사회에 기여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 청년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소비적인 문화를 삶의 양식 깊이 학습한 세대이기도 하다. 24시간 편의점이 주는 안정감과 대형 쇼핑몰의 편리함, 탄소 발자국을 남기며 매주 전 세계로 값싸게 공급되는 SPA 패션 트렌드의 신속함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앞서 생태운동적 맥락에서 기본소득을 언급하며 기본소득이 생산을 축소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소비가 줄지 않으면 생태사회는 도래할 수 없다. 기본소득이 현재와 같은 과잉 소비의 흐름에 흡수된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청년 세대는 과연 이 ‘값싼 편리함’이라는 삶의 질을 포기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은 청년 세대를 설득할 만한 삶의 양식을 제시할 수 있을까?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삶의 양식을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다. 낮은 가격이나 편리함과는 다른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이를테면 2년 쓰면 갖다 버려야 하는 조립식 합판 가구 대신, 시간을 들이더라도 오래도록 쓸 수 있는 가구를 직접 만들거나 주문해보는 시도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지금 여기에 발붙인 채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청년들이 이미 출현하고 있다. 도시에서 농업 교육을 실천하는 <씨앗들협동조합>,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배움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시작해 지자체와의 협업까지 이어나가고 있는 <언니에게 한 수 배우다>, 자급 기술로 강정, 밀양 등 다양한 투쟁 현장에 연대하는 <물체주머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대학, 마을, 도시에 생산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위한 콘텐츠들을 제공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위와 같은 활동들을 크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 노동 외의 다른 사회적 활동들, 특히 자활노동, 정치적 활동, 문화 활동 등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도를 높이며, 시민사회와 사회적 경제를 확장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공동체의 발전과 실천적인 삶은 생태운동의 핵심이다. 생산량을 줄이는 대신 사회적 경제를 통해 공유자원을 늘려서 새로운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들이 활발히 병행될 때만이, 생태사회와 자율적 삶의 필요조건이었던 기본소득을 충분조건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여성을 비롯해 청소년, 성소수자 등 다양한 주체들의 시민권을 강화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여성들이 도맡아 해온 돌봄노동과 같은 ‘그림자노동’의 가치를 가시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부장적인 관점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불러올 위험이 있고 생계가 해결됨으로써 여성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할 유인이 사라져, 성별 노동분업을 오히려 강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근본적으로 개인들의 '차이'를 해치지 않는 정책이다. 이를테면 여성 경제활동 인구 비율이 20대에는 남성보다 높은데 30대에는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육 서비스' 정책을 시행한다면, 육아가 여성의 몫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인식을 강화하게 된다. 반면 보편적으로 개별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선택과 책임을 모두 개인의 몫으로 남겨둔다.



2. 청년의 기본소득 정치

  청년 세대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자랐다. 우리는 국가 주도하의 경제 성장도, 연대와 조직화를 통한 민주화도 겪어본 적 없으며, 전통적 공동체가 이미 사라진 사회에서 자랐다. 그나마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는 ‘정상적 4인 가족’의 구성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타인을 경쟁 상대로 느끼고 가족은 부양해야 할 업보로 여기는 부정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한 ‘사회적 모델’을 당위로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은 청년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사회’라는 것 자체가 내 삶의 변화로 와 닿지 않고, ‘연대’를 통해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공을 비전으로 제시하는 시장 이데올로기는 승승장구해왔다. 2000년대 초반 베스트셀러를 휩쓸었던 자기계발 서적, 그와 다를 바 없는 온갖 힐링 서적들의 선전이 이를 증명한다. 계급적 정체성보다는 세분화된 소비 기호의 취사선택을 통해 남들과 차별화되는 자아가 더 중요한 세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삶과 직결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진보적 의제라는 점은 기본소득의 큰 장점이다. 청년들은 내 삶을 변화시킬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에 일차적으로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의 현실 가능성을 점쳐볼 때 사회 전체의 자원 재분배 방식이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 운동을 통해 사회에 대한 입장을 내놓고 미래를 타인과 함께 구성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우리가 뽑아본 과제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정책 패키지를 개발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앞서 말한 생태적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본소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정책들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먼 미래에 대한 구상으로 느껴지는 기본소득을 현재화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주거 문제와 교육 문제는 기본소득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오히려 기본소득이 주거 비용에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키거나 사교육 문제를 심화할 수도 있으므로, 이를 고려한 정책이 필히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교통, 통신, 의료 등의 사회 서비스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투명하고 단순한 시민 공론장과 정책 합의 테이블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거시 정책인 만큼 다양한 영역의 주체들이 협업해서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야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각계의 전문가 집단에 기본소득을 알리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생태적인 삶의 실험에 대한 수집이 필요하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실험적 삶의 방식을 시도 중인 사례들을 꾸준히 수집해야 한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한 당위는 신자유주의하의 현황에서 찾아낼 수 있지만, 다양한 삶의 실험의 성공 사례와 탄탄한 시민사회는 기본소득이 시행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을 이야기할 때 일부 수급자에 대해 ‘베짱이’라는 비유를 쓰고는 한다. 나는 이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기본소득이 사람들을 경쟁 모드에서 협동 모드로 전환하는 버튼을 눌러주기를 바라는바,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뛰어남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며 언제나 나의 협업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의 전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신뢰가 사회에 스며들 때 비로소 노동 및 생산 패러다임의 전환과 태도의 변화, 그리고 기본소득의 도입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4년 3월 5일 수요일

동정

엄마가 없는 사람들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가 없는 우리 엄마까지 포함해서.

중학교 체육시간의 자유시간에 한창 수업 중인 창문 근처를 얼쩡이는데, 창가 쪽의 여자애가 턱을 괴고 지루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이전의 나는 놀랄만큼 눈치없고 모든 거짓말에 다 속아 넘어가는 애였는데, 그 날 뭔가 업되어 있었는지 친구에게 "헐 쟤네(수업 중인 애들)가 우리(놀고있는) 부럽게 쳐다봐"라고 말했고, 청소시간에 일군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알고보니 창가에 있던 여자애가 세탁소를 운영하는 가난한 집 아이었고, 내 말을 '가난한 자신이 나를 부럽게 쳐다본다'로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게다가 소위 '욕빨'로는 지지 않는다는 명성을 가진 여자애라, 나는 싸가지 없는 년이 되어 그 친구들에게까지 욕을 엄청 먹었다. 미친년아 씨발 니가 뭔데 우리 엄마 아빠 가난하다고 나한테 불쌍하다고 씨발 etc... 나는 그애 이름도,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명의 말 같은 건 걔네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애에겐 응징, 내게는 속죄라는 각각의 프로세스가 남아있었을 뿐, 둘 사이를 잇는 용서나 화해를 위한 공간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만'을 다룰 줄 모르던 시절이라, 나는 꽤 오랫동안 의도적이든 아니든 타인의 가난을 비웃어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한 번 더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가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다. 이듬 해에 그애는 자퇴했다. 나른한 말투로 늘 투덜거리던 아줌마 사회 선생님이 버스에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그애를 만났던 일을 말해주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없는데 다녀서 뭐하녜요. 뭘 모르는 소리에요. 여러분 졸업은 하는 게 나아요. 걔도 살아보면 알겠죠."

그애에게 엄마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냥 엄마가 없는 사람들이 안되었단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연달아 생각이 났다. 야무지고 무식했던 여자애. 별로 행운을 빌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