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 : 가족, 공간, 세대

온라인 출판 플랫폼 퍼블리에서 글로벌 기본소득 리포트 프로젝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7일까지 진행되는 펀딩에 참여하시면 리포트 본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북미, 유럽, 인도와 나미비아 등 전세계의 기본소득 동향을 살펴보는 글이고 BIYN 운영위원회가 공동집필합니다. 정부, 시민사회, 시장, 국제구호조직 등 다양한 주체의 관점에서 보는 기본소득을 총정리한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아래는 사전에 공개되는 저자소개 글을 위해 제가 쓴 초안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기본소득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아예 다른 주제로 새로 썼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나름대로 제게 의미있게 쓰여져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퍼블리와 함께 쓴 저자소개 글은 프로젝트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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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올해 초 몇 해 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넌 그렇게 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산다”는 게 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대기업에서 일하며 결혼을 곧 앞두고 있었던 친구가 보기에 어딘가 특이해 보이는 삶인 모양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줄 정말 몰랐는데, 남의 눈에는 십 년 전부터 기본소득 같은 의제를 주장하며 NPO에서 일하는 어른이 될 것 같았다니. 하긴 대학 때 거리에서 리플렛 배포하다 만난 다른 동창도 “잘 어울린다! 화이팅!”이라고 응원해 준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체 어떤 애였기에 이런 대답을 듣게 된 것일까. 어느 반에나 한 명씩은 꼭 있고 인터넷에는 바글바글한, 토론수업을 좋아하고 유난스럽게 음악을 듣는 십대였을 뿐이다. 그런 애가 대학에 들어간 뒤 투쟁 현장 언저리를 맴돌거나 화제의 시집을 구입하거나, 고전영화들을 보러 다니는 것은 분명 자연의 섭리보다 강력한 사회의 섭리다.

하지만 졸업 후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경영학을 공부하고, NPO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당사자로서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었다. 매 번 나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 지 하나의 줄거리로 통합하려고 스스로를 위한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때문에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 반갑다. 나는 왜 위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게 되었고, 2016년 추석에 기본소득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한 자기소개를 쓰고 있게 되었을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공동집필 할 리포트에서 우리는 의견보다 사실에 집중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반대로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음껏 써보려 한다.

돌이켜 보면 이후 벌어진 일들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해도, 내가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활에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게 된 것만큼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싱겁게도 역시 친구의 말이 맞다. 조금 호들갑을 떨자면 2005년에 세상의 좋은 음악, 좋은 서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며 고3을 보내고 있을 때부터 2016년 추석에 이런 글을 쓰게 될 운명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1.

내 아버지는 정년을 1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데, 지난 4월 수업을 하던 중 혀의 느낌이 이상해서 곧장 병원 응급실을 찾았더니 뇌에 종양이 있었다. 검사를 더 해본 결과 이 종양은 혈액암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쁜 소식에 여러 감정들이 밀려오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돈 문제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모든 교사들이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으로 재직 중엔 의료비의 80%까지 보장된다고 했다. 긴 직장생활 동안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병가를 낸 채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나, 동생은 큰 걱정 하나를 내려두고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걱정이 컸던 만큼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대단한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것이 혜택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누구라도 일하다 아프면 생계 위험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큰 병으로 인해 빈곤에 빠지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이 정도는 누구나 누리는 게 당연하지”와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경험은 자주 있는 일이다. 대학 때 만난 지방출신 친구들 몇은 서울에 사는 내게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같은 시기 한편에서는 “너는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에 서울이 아니라 “압구정”이나 “도곡동”이라고 답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대화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에 상계동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서울애인 나는 이런 저런 상대평가의 격차를 느낄 때마다, 내가 누리는 삶의 수준에 대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 두 가지는 우리 가족에게 20년 넘게 살아 온 집이 있다는 것과 은퇴 후 교사인 아버지의 연금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 후 자립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이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부모 부양의 부담을 차치하고 일단은 스스로의 삶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 아닌 가정,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면 되는 인생. 엎드려 절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 바랄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중요한 점은 ‘충분한 삶’은 특권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했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나와 달리 제 인생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또래들도 아주 아주 많이 있었다.(두 번의 강조도 모자라다)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내 생각에 이 정도 삶의 조건이 행운의 영역에 있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였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더 짧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했다. 완전한 자유는 어불성설이더라도, 협상의 여지 정도는 있어야 했다.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 첫 번째가 여기에 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우리가정에 가져다 준 혜택을 체감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알았으며, 이 정도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은퇴자에게 연금을 보장하고 모든 가구에 집을 주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가정 사정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생계유지 이상의 목적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생활기반의 최저선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 정책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달성할 수 있다. 왜 국민연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사회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장이 아니라 굳이 기본소득인지는 아래 차차 더 드러나게 써 볼 예정이다.


2.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상대평가적인 표현을 쓸 때면 어색하다. 기준이 하나이고, 그 기준으로 상하 위계를 만드는 것이 이상하고, 종종 정보를 단순하게 왜곡하며, 그것이 사회에서 권력 기제로 작동하기까지 하면 옳지 못한 것이 된다. 특히 누가 돈이 더 많고 적다거나, 일을 (질과 상관없이) 더 싼 값에 빠르게 끝낸다거나, 어떤 여자가 더 날씬해서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평가는 매일 들어도 매일 이상하다.

최근 든 생각인데, 위와 같은 공정성에 대한 기준은 (가족과 성격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정도 내가 자라온 공간에 의해 형성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 살 때부터 노원구에 있는 상계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총 4만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지하철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가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동네에선 다른 종류의 집을 볼 일이 없다. 집뿐이 아니다. 상가도 학교도, 공원도 대칭 구조로 비슷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현관문 안쪽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사정이 다 달랐을 테고, 실제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좀 더 ‘의미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성장기에는 방이 두 칸이건 세 칸이건 화장실은 한 개인 집에 살고 같은 놀이터에 모여 노는 비슷비슷 형편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마포로 놀러 다니고, 강남으로 출근해보기도 하고, 산도 있고 강도 있는 용산에 4년 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서로 빈부격차를 느낄 일 없는 또래들이 함께 사는 평범한 환경이 보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상계동 아파트단지는 내게 생활공간의 준거점이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하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 말한 것처럼 상대평가에 어색함을 느끼는 감각. 미색의 페인트가 칠해 진 큰 벽을 보면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격차와 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두 번째 까닭은 이것이다. 공감할 수 없는 가치체계와 별개의 가치체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게 기본소득과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회안전망 정책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질 것 같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부합하는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피고용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이 보장받는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육아수당 같은 현금지급정책들은 특정한 생애주기나 가구형태를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질적인 가치의 추구는 아무리 보편성을 추구한다 해도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에는 수급 조건이 없고 사용처에 제한도 없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소비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국가나 시장이 요구하는 가치체계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들이 신념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개인에게는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5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환경의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 적합한 ‘유연한 사회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더 설명하겠지만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사회안전망은 한국에 꼭 필요한 것이다.

3.

나는 87년생이다. 2010년대의 어린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90년대의 어린이들은 한 국역사 가장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했다. 6, 7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흰 쌀 밥이 없어서 보리밥을 먹고, 바나나가 너무 비싸서 못 사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2010년대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때는 시판 샐러드 드레싱이 없어서 마요네즈 묻힌 사라다를 먹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8,9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또 나와 같은 2000년대의 청년들은 8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억압적인 독재정권에 항거해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2006년에 00학번의 입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친미 정서와 통일문제라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요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가 파산해서 미처 복지제도는 못만들고 대신 대학생들에게 신용카드를 뿌린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서 ‘잉여’니 ‘삼포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말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헬조선’같은 단어가 없던 때에도 한국은 항상 어딘가 좀 모자란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의무적으로 구독하던 소년조선일보 1면에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 어린이들의 체험수기 연재가 있었다. 한국인 부모와 달리 미국인 부모는 극장 요금을 적게 내기 위해 자녀의 나이를 속이지 않는다거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은데도) 양말을 기워 신더라는 소소한 교훈들이 실리곤 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외관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선진국의 시민의식과 혁신과 복지 등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이런 결핍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정부복지지출액과 노조가입율과, 시민들의 정치참여율과, 청년 창업율과, 학술서 번역과 아무튼 끝도 없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해외연수는 제일 많이 가는 나라 아닐까? 빠르게 해외 레퍼런스를 카피하는 능력은 여러 부작용을 낳지만 한국의 경쟁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정량적 지표에 대한 목표를 달성함으로서, 눈에 보이는 부유함을 카피하려 노력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었다 해도 복지는 그렇지 않다. ‘삶의 질’이나 안정성, 행복 등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더러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복지의 역사가 빈민 구제부터 시작하면 길게는 2세기에 이르고 적어도 1950년대부터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의 한국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한국의 복지는 정부의 발전주의적 기조에 따라 경제성장을 위해 투자하고 남은 예산을 빈곤층에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잔여적 복지체제이고, 그나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도 채 20년이 못된다.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정책가들은 있지만, 이를 실행 하기위한 정치적 지지 세력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복지모델을 카피하는 것은 어렵고, 적합하지도 않다. 기본소득은 실행까지 정치적 비용이 필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장 간단한 복지정책이다.(특히 한국처럼 주민번호등록이 잘 되어있고 빠르고 통합적인 전산화를 구축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 방법이나 다른 정책과의 연결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대안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에 나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사회안전망을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리포트에서 살펴보겠지만 각 국가의 기본소득에 대한 접근 방식은 모두 다르며, 이를 비교해보는 작업은 국내에서의 접근법을 개발하기 위한 의미있는 내용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 세대로서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이다. 앞서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에 대응하는 미션이 있다면 바로 가정을 넘어 사회적 보호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핵심 의제가 될 수 있다.


0.

나 개인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쩐지 직업병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청년으로서 청년 세대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내가,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지난 4년 간의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오늘 날 청년들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존재로서, 사회의 잉여나, 무엇을 포기한 존재로 스스로를 주변화 시키는 데 익숙하고, 부정의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모순에 빠져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취약화 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나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안전하고 유연한 사회를 위한 ‘충분한 기본소득’을 요구함으로서 이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청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제시함으로서 자원을 집중시키려 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목표를 가진 주체로서 자원을 요구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나 '흙수저'같이 빠르게 유통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이상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동력이 내가 가진 것들, 소중한 개인적인 기억들, 그리고 약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내가 그러했듯 누구나 개인적인 의미에서부터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공통의 목표를 갖게 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게 기본소득 운동의 멋진 점이다. 읽고 나면 향후 몇 년 간 진행 될 이 멋진 과정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들 만한 ‘팩트 중심의 리포트’를 약속하며 글을 마친다.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중2는 기본권

요즘 나 자신에 대해서 내 좋을대로 설명하고 싶은 욕구가 되게 크다. 나 자신에 대해 설명이 요구되는 순간에 그러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 대한 말이 계속 생산된다는 얘기임.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오류만큼이나 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오류도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반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이루어진 윤리는 약간 존재를 위협함.

남들이 그러는 걸 보는 게 좀 불편해서 나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남사스럽게 여기고 꺼려왔는데 최근에는 그냥 이건 좀... 일종의 기본권처럼 느껴짐.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자신에 대해 스스로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설명하고 싶다면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내 뜻대로 설명하고자 시간을 들이는 게 죄악이 아니야. 타인들을 부정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트위터에 성폭력 경험에 대한 용기있는 진술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일련의, 유사한 패턴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지난 경험들 몇 가지가 성폭력이거나 그럴 위험에 처했던 '사건'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들을 말하는 데 나에겐 별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인지한 뒤에도 별 일 아닌 사건들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운 좋게도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심각한 물리적 폭력은 동반되지 않았고, 그들이 내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일들이어서 그런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달은 것이다.

늘 나오는 얘기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고 친구거나 동료였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는 이상함을 분명히 감지했음에도 모르는 채 넘어갔다.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서서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약자이지만,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잘못을 알려주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이유로 어렸던 나의 유연함과 관용, 사람에 대한 신뢰를 후회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잘 지켰던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여기고 지내왔던 사람에게 (사람을 그 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만져보거나, 찔러보거나, 지배하기 위한 여체로 대상화되는 순간의 기분은 형언하기 어렵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잊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름도, 의미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 경험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사실은 그때 더럽다고 느꼈다. 사실은 그때 눈 앞의 사람이 어쩌면 나쁜 사람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나는 제대로 판단하고, 나를 지지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번에 나와 나의 동료 여성들에게 유사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빠르게 인식하고 단호함으로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말 신기하다.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눈치없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아마 2,3년 전에만 깨달았어도 자책이 심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바보같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도. 지금은 앞에 적었듯, 나의 좋음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내가 여성 시민들의 연대를 실감하고, 내 안에도 피해자/생존자를 지지하는 마음이 뚜렷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시적 의미의 공동체가 아닌) 사회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식으로 개인을 지지해주는 거구나, 정말 처음으로 실감해보는 것 같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 우리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7/15 올라온 조성주씨의 기본소득 반대 글을 빌미로, 진보진영에서 자주 보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폄하적 레토릭에 대해


정의당 조성주 씨가 당 내에서 기본소득을 검토중이라며 자신은 이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페북에 밝혔다.



스위스 국민투표, 이재명 성남시장, 김종인 더불어 민주당 대표를 거치며 기본소득이 "유행"(언젠가 버려질 거란 뜻이다)의 길을 걷기 시작한 듯한 지금, 솔직히 좀 반가운 말이다.

예컨대 올해 초 토론 자리에서 서로 다른 입장으로 만난 한 청년 활동가는 자신이 정책설계과정에 참여한 서울시 청년수당이 기본소득을 지향하고, 자신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말을 해서 현장의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환영 받았는데(당연히 그 뒤에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딱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기 보단...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유보처럼 보였는데), 솔직히 논의를 무척 비생산적인 프레임 땅따먹기로 만들어버려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 기저에 있는 심리는 조성주 씨의 글에 너무 잘 묘사되어 있다.

<<내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의 설계자체에 큰 이견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게 된 배경에 의구심이 더 강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의당이 기본소득을 검토하게 된 이유도, 서로가 더 진보적이라고 경쟁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진보진영 내부가 언제부턴가 기본소득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도 결국은 선명성 경쟁이나 이슈선점의 의도가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보수정당들을 말하지 못하는(때로는 다른 진보정당은 말하지 못하는)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강박.">> (이하 인용 <<>>표시)

동의한다. 제발 하겠다고 한 거나 잘 했으면. 정책 좀 이슈메이킹 불쏘시개로 갖다 쓰고 버리는 짓 좀 그만했으면.

그리고 이 외에는 의문이다.


1.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다른 복지정책 도입을 방해하는가?

조성주 씨는 기본소득보다 사회안전망의 획기적인 강화, 노동시장 내의 불평등의 완화, 복지체제의 확충 등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납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음의 의문이 든다.
한국의 복지담론 지형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은 기존의 사회보험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미국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복지정책의 양적 수준이 턱 없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가장 큰 효과는 공공부조의 획기적인 확대와 정규직 비정규직 간 소득격차 및 사회안전망 격차의 완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찬반을 구하지 않고 사회안전판을 구성하는 좋은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낙관적 가능성으로 인해, 여타 "시급한" 복지정책이 도입 될 순서(?)를 새치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음 글쎄. 북유럽 '강소국가'가 참여정부에 의해 롤 모델로 상정되고 복지국가 담론이 개진된 지도 어언 10년이고, 무상(보편)급식 논의 이후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었지만, 획기적인 강화와 확충은 없었다. 증세에 대한 논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순서는 증세가 우선이라고 생각된다.

현 시점에서 나는 기본소득이 증세논의의 트리거로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40만원? 5,000만명이면 1년 재원 240조? 계산이 쉽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처럼 모른 척 넘어갈래야 못 넘어간다. 김종인 같은 정치인이 기본소득 얘기를 해서 반가운 거 딱 하나다. 그 정도 권력자에겐 증세의 책임도 끝까지 물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기본소득이 국가 주체의 공공서비스 및 복지를 현금 지급으로 대체함으로서 시장을 강화한다는 사고는, "정부"와 "시장"이라는 주체 중심의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복지 영역에서 한국정부는 적게 지급하면서 (시민을) 많이 통제하는, 서구중심의 이론으로 보면 기이한,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친숙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사고틀이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한국에서 공공서비스와 복지정책이 강화될 경우 그만큼 시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적 상황을 인정한다면 "기본소득"처럼 국가가 시민에게 충분히 지급하면서 시민을 적게 통제하는 정책은 "공공을 시장화"하는 것과 또 다른 효과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장 혹은 노, 사, 정 구조에 대한 메타포 외에 정책이 "현장"에 적용될 때 개인, 조직, 지역, 시장, 국가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인데, 경험 상 (특정 부류의)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를 더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2.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고민이 낭만적인 고민인가?

<<4.13총선 당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들과 한 토론회에 나간적이 있다. 상호질문 시간이었는데 한 진보정당의 후보가 내가 주장하는 특수고용직 및 실업자까지 포함하는 고용보험의 획기적인 확대 등을 두고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고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솔직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 사람들에게 <실업>이란 것은 '꿈을 키우며 살고 싶어요',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따위로 이야기 될 만큼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실업에 대한 대책도 결코 아름답거나 예쁘지 않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한 정당의 대표로 토론회에 나온 상대 후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은 그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에 대한 예의다"라고 한 한 후배의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배 때문에 정치하면서 조만간 화병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실업안전망의 확대를 주장하면 선별복지가 되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현금'으로 주는 것이 '보편적 복지'라는 것인가? 아직 진보진영의 복지관련 논의가 고작 이정도 수준에 머물러있다. 아니 돌아보면 선별복지/보편복지라는 프레임 자체가 진보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 부분에 등장하는 '선별적 복지'라는 워딩은 내가 봐도 별로 적절치 않다. 몇 가지 변호할 거리가 좀 있긴 한데 각설하고, 실업문제랑 일에서의 자아실현의 문제가 왜 충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얘기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지도 모르겠다. 서로서로 별 관련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실업 문제는 심각하다. 자기돌봄 없는 노동환경도 심각하다. 무식하게 구분하면 전자는 경제적 문제고 후자는 문화적 문제다. 이 둘의 해결 방법은 별개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어야 할텐데,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공급과잉의 노동시장에서 하고싶은 일을 찾아 직장을 때려치기의 리스크가 크다고 하기는 힘드니까.

그런데 왜 이 두 문제가 충돌하지? 차라리 상호보완적이지 않나? 억지로 끼워맞춰 보건대, "해고는 살인"인 구조조정 현장의 노동자들, 하청업체 파견직 노동자들과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어요"라고 폼재며 일을 때려치는 3%의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이미지로 "현장"(당사자라는 단어로 대체 가능할 듯)을 구분하고 계시나? 전자의 냉혹한 현실은 모르면서 "꿈"이라는 한가한 얘기나 한다고? "실업안전망 확충"보다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분연히 화를 참으신 걸까?

'생존'과 '자아실현' 중 뭐가 중요하냐고 하면 아무래도 전자인데, 그렇다고 후자는 감히 전자와 나란히 논의되어서는 안되는 건가 하면 좀 애매하다. 그리고 애초에 남의 티끌만한 고통이라도 "낭만적"인 것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은 자유지만 말로 뱉은 이상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일을 하면서 "갑질"을 요구받는 게 너무 괴로워서, 조직문화가 힘들어서, 야근 때문에 매일 울고, 면역체계가 망가져서 여기저기 아프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지속한다. 이 문제는 "현장"이 아닌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말할 것도 없이 실업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꿈"처럼 "아름답고 예쁜"(나는 이 한정사가 어느 정도 "윤리적으로 옳은"으로 등치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에는 든다. 역설법의 용법으로 쓰는 건 이해가 안가지만) 욕망이 생존, 노동권과 같은 당위보다 먼저 나온 것은 이에 대한 욕망이 "현장"에 많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치적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에 대한 바람으로 실업안전장치를 사회에 도입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왜 이것이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고민이라고 이상하게 폄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족 - 개인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요인을 모처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전교조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행동해야 할 시민의 의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친구가 북한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부생 시절 죄책감 반 책임감 반으로 이런 저런 투쟁현장에 뜨내기처럼 참여했지만 연대에 충분은 없었고, 공권력의 폭력 앞에 무력감을 느꼈고, 당사자들에게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무엇이 되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의식과잉이라 그런 게 맞지만 아무튼간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당신의 고통을 이해해?'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는 나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고, 그는 그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 분들과 대화했을 때 나는 내가 나를 위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힘이 기초생활수급자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았고 더불어 그들에게도 자기 자신만이 아는, 생존 이상의 다양한 욕구가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청년, 노인, 실업자, 노동자, 장애인, 비장애인, 여성, 부모, 자녀 etc 각자가 최선의 삶을 지향하며 기본소득에 합의할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현장에서 "낮은 곳에 임한 나" 뽕에 취한 사람들도 너무 많이 봤다. 나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고 이 편이 내게는 훨씬 윤리적인 선택이었다.)



3.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정의당은 천호선 전 대표 시절에 '복지국가 선도정당', '비정규직 정당'이라는 당의 노선을 정립한 바 있다. 좀 투박하고 별로 세련되지도 또 급진적이거나 상상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노선은 여전히 저 두 슬로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소 투박하고 재미없어도 된다. 우리가 대변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지루하고 투박하고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뭐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기본소득 활동 4년 하면서 진영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받는 멸시가 바로 이것이다. 뭐랄까. 팬시해보인다는? 심지어 기본소득 지지자들 안에서도 이런 종류의 멸시를 받는다. 주로 "힙스터"라는 비아냥을 자주 들었는데, 뭐... 정말로 딱히 할 말이 없다. 힙스터가 아니기도 하고... 힙스터가 욕도 아니고... 안 투박하고 안 재미없다는 데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대문자 진정성...안 아쉬워... 안 사요...

다만 내가 기본소득 강의 할 때 마다 꼭 하는 말은 "기본소득은 쉽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한 마디로 모두에게 조건없이 매달 돈을 준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이고, 사실 이것만 알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바로 이 논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 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전염성이 높은 아이디어이고, 그래서 국가개조, 정책설계 어쩌고보다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이 재미에서부터 말 걸기를 시도해왔다. 효과적인 캠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 오프 상시 진행해 온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캠페인이 있다. 청소년은 저축을 하고, 엄마는 이혼하고, 알바노동자는 롯데리아를 그만둔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가정해보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잘 인지 못하는 욕망 아닌지. (특히 2번째) 재미있다.

하지만 좌파, 생태, 급진 언저리에서 재미를 고려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기만 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 전 열린 국제대회에 독일 마인 그룬트아인코멘 프로젝트 담당자 아미라 예히아(http://h21.hani.co.kr/ar…/special/special_general/42038.html)를 초청하는 데도 그것이 재밌는 이벤트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이유로 수 차례 반대에 부딪혔다. 우리의 입장은 사실 재미있다기보단 진지하고 간단했는데, 기술을 적극 사용하는 방법론이 참조할만하고, 국가 차원, 지역 차원의 기본소득 실험이 중요한만큼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미라는 기대대로 다양한 사례를 이야기해주었고 한겨레에서 기사로 발행되어 많은 공감을 얻었다.



4. 그 외 이상한 인과관계를 전제하는 표현들에 대해.
- 사는 게 쉽고 생각이 없어서 "재미있고" 낙관적인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악에 있다고 차악을 지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
- 단순한 게 꼭 오류가 많다고 할 수 없고, 지름길이 틀린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점진적인 로드맵이 더 실현가능성 높은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그냥 잘못된 시각화인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투박함"과 "재미없음"은 당위와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글쓴이의 미감이 좀 별로라는 것만 누설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약간은 인신공격이지만... 취향 따위 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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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좀 처럼 할 기회가 없던 내용을 담아 기본소득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리고 진보진영 내의 이러한 반대가 기본소득을 실현가능하도록 벼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일찍 자야하는데. 망원동 동경 커피 카페인 효과 최상급...

<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심포지엄 토론문


올해 3월 시립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발제한 글입니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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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토론문

2016.3.11 백희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1. 문제적 주체 :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의 정치적 한계와 가능성

청년세대를 지시해 온 단어들은 오늘 날 청년들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잘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문제들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돈이 없지만(88만원 세대),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그들의 부모세대에 종속되어있으며(에코세대), 부모세대와 같은 ‘정상적 4인가족’의 생애주기를 포기해야 하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욕망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삼포세대)

최근 JTBC에서 보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22.6%), 2위는 건물주와 임대업자(16.1%)였다. 명문대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는 얘기는 신기한 뉴스도 아니다. 청년기, 청소년기는 보통 가장 도전적인 시기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오늘 날 이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안정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소득 불안정성, 낮은 취업률, 노동시장 이중화의 심화와 계층이동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높은 주거비용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맥락을 더하고 싶다. 청년 세대가 한국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증언컨대, 우리 세대의 성장기는 사회가 퇴보하는 역행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이후 태어나 IMF 이후의 사회에서 자립해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단 맛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시기는 짧았다. IMF의 개입으로 정규직 일자리 시스템이 깨지면서 가정의 붕괴도 함께 경험해야 했다. 삶의 회복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사회는 새로운 규칙에 맞춰 빠르게 재조직화 된 결과 밀레니엄을 지나며 위기는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눈에 드러나면서 통일의 대업도 사반세기 내에 이루어질 것 같았다. 한일 월드컵이라는 대형 이벤트는 폭발적으로 사기를 드높이며 ‘광장’을 호출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에 진출했다. 정권 교체 후 광장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0년이 되었을 때, 천안함 사건과 전례 없는 연평도 포격이 있었다. 머리 크고 처음으로 당선을 지켜 본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진보정당은 분열했고 통합진보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경제발전, 민주주의, 평화. 어떤 가치도 성공하는 걸 경험하지 못한 채, 또래들과 조직화 할 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세대의 내면이 냉소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희망은 세계화의 흐름과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빠른 확장 덕분에 문화적 다양성을 누린 세대라는 것이다. 적어도 컨텐츠 소비의 측면에서는 선진국과 시간 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시대이다. 또한 한국의 청년세대는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데 아무튼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목적보다는 수단으로서의 배움이었고, 시험에서 얕게 활용되고 말 뿐 실질적으로 축적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은 청년 세대 일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직장과 가정에만 충성하기 보다는 자아실현을 꿈꾸고, 동질한 사회구성원이 되기를 요구하는 집단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체들이 등장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에도 평생직장을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삼포세대’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이나 직장보다 자아실현의 권리에 집중하는 욕망이 정치적 동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여태까지 정치적 주체로 조명 받지 못한 도시 청년 여성은 자아실현의 욕망을 강하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직장에 잔존해 있는 구시대적인 위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해 점화 된 페미니즘 열풍이 데이트 폭력, 몰카 외에도 여성의 일할 권리와 가사 및 육아분담을 적극적인 의제로 삼고 있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높은 취업이민율과 ‘이민계’도 많은 청년들이 한국사회에선 실현될 수 없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청년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득불안정성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회의주의가 결합되면서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을 지향하고 있고 사회에서도 기성 세력에 대한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역동성의 감소는 경제적으로는 불황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의 청년 복지가 갖는 의미는 ‘불쌍한 청년’의 지원이라기보다 사회를 위한 투자이다. 즉, 청년을 위한 사회안전망이자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다시 공무원, 건물주 임대업자란 장래희망을 떠올려 보면, 안정성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자율성의 욕망을 짐작할 수 있다. 건물주 임대업자라고 대답한 청소년에게는 사실 소득이 확보된 이후 정말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래희망이 있을 것이다. 투자로서의 청년복지는 바로 이 진정한 장래희망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 이 사회적 약속을 해내지 못하면 현 청년 세대가 미래에 다음 청년 세대를 위해 기여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2. 지금 청년복지의 방향 : 청년배당, 청년수당, 청년희망통장

다행히 2015년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년들을 위한 직접적인 소득 지원 정책이 지역에서부터 논의 된 의미 있는 해였다. 성남시 청년배당과 서울시 청년수당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경기도는 청년희망통장 정책을 발표했다. 각 정책들은 서로 다른 청년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성남시 청년배당은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편적 현금지급 정책이다. 올해 시범적으로 24세의 성남시민에게 지역화폐의 형태로 연 50만원이 지급되고 있으나 당초 계획한 대로 19세부터 24세까지로 대상을 확대하고 연 1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미취업 상태의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NEET)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선별하여 3,000여 명에게 월 50만원 씩 연 최대 300만원을 지급하는 계획으로 아직 세부 내용 확정을 위한 연구 중에 있다. 청년수당 뿐 아니라 사회활동을 위한 지원도 함께 한다. 선별 기준에는 소득수준과 지원자의 활동계획 여부 등이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매월 활동 보고서를 등록해야 한다. 경기도의 청년희망통장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월 소득 130만원 이하의 청년이 3년 간 퇴사하지 않고 매월 10만원 씩 저축할 경우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매칭펀드 형태로 15만원 씩 더해서 3년 후 1,000만원의 목돈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 정책으로 올해 50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이 중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무엇일까? 기회는 기본적으로 시간, 학습과 장기적 관계 축적,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시 청년배당의 경우 그 효과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 돈으로 교재를 살 지, 친구를 만날 지,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을 할 지는 전적으로 청년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통제권은 성남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있다. 청년배당은 청년이 자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반면 청년수당의 경우 서울시가 선별기준과 프로그램을 잘 설계하고 좋은 협력기관들을 발굴할 수 있는지가 관권이다. 노파심이 드는 지점은 복잡한 선별 및 지원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역량, 활동기회의 질, 지급대상자의 “자기주도”를 해치지 않는 관계수립이다. 청년 문제를 위해 오래 노력해 온 서울시인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할 따름이다. 경기도의 경우 청년희망통장이 아니라 사장희망통장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이는 월 15만원으로 청년을 저소득 저임금 일자리에 묶어두고자 하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복지대상자와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각 정책의 방향성을 요약하면 청년배당은 청년을 신뢰하는 정책, 청년수당은 청년을 보호하는 정책, 청년희망통장은 청년을 착취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각 정책들은 세대 간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청년배당의 경우 지역화폐를 지급함으로서 지역 자영업자들과 상호의존적 이해관계를 형성시켰고, 청년수당의 경우 시니어 멘토 그룹과 연결하는 프로그램(대청마루)을 기획 중이다. 청년희망통장의 경우 중소기업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청년노동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상생 모델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등하고 긴밀하게 연결시킨 청년배당이라고 생각된다.


3. 앞으로의 방향

청년희망통장은 차치하자.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에 내재된 정부와 수급자 간의 관계성을 향후 국가차원에서 도입해야 할 복지 프로그램의 방법론으로 생각할 때 어떤 쪽을 지지해야 할까? 양 쪽 모두 긍정적 비전과 위험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상적인 사회통합의 상에 맞춰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수요를 공급하는 방향보다는 시민들의 역량을 신뢰하고 곧장 자원의 지원하는 방향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행정부의 권력이 강한 한국에서 지원체계가 복잡해지면 아무리 선의에 근거한 복지정책이라도 지급대상자가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될 공산이 크다. 또한 청년배당과 같은 보편적 소득지원은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인 소득불안정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가정과 기업에서 위계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계속 유지되는 것, 청년들이 시장에서 도전을 꺼리는 것, 사교육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개인들이 참고 견디는 리스크이다. 최소한의 조건 없는 소득안전망이 보장된다면 기층에서부터 개인들의 권리행사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청년의 입장으로 돌아오자면, 소득불안이 해결되고 권위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한국은 다양한 욕망을 촉발시키는 매력적인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 청년배당, 즉 보편적 기본소득의 방향성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십년 넘게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사회보험 및 공공부조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합의를 통한 복지국가의 구축이 저성장 시대의 한국 시민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주었다. 기본소득은 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을 자극한다. 한 마디로 논의하기 쉬운 프로그램이다.(이는 물론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비용 계산이 단순하므로 반드시 증세 논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본소득 도입의 장애물로 보기도 하지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리과정을 둘러싼 갈등은 증세에 대한 합의 없이 도입된 복지정책이 중앙정부의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휘둘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증세”라는 아젠다를 감당하고자 하는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이미 세계 곳곳의 사례를 통해 또 총선을 앞 둔 국내 상황에서 보여지 듯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매력적인 정책임에 틀림없으며,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힘이 있는 의제이다. 오히려 증세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한국은 모든 국민에게 코드가 있고, 전산화가 잘되어있는 국가이다. 기본소득 지급이 기술적으로 이보다 쉬운 나라가 있을까?


4. 나가며

창업, 창직, 해외취업, 중소기업 취업, 마을 공동체, 사회적 경제.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책가들은 청년들에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을 권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국가에서 비전을 제시할 역량이 없다면 개인들이 리스크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도박이어서는 안된다. 개인들에게 일정한 소득이라는 예측 가능한 요소가 주어진다면, 미래세대는 알아서 제 욕망과 비전에 근거한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 즉,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과는 다른 경로로 기본소득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성사될 때,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 등으로 명명되어 온 청년세대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청소년세대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갖고 비로소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자 할 것이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영화 4등(2016) 리뷰: 성장은 아이의 몫

사랑니 (2005), 은교(2012) 등 금기시 된 사랑을 소재로 삼아왔던 정지우 감독의 신작 4등(2016)은 수영을 소재로 한국의 교육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언뜻 뜬금없이 느껴지지만 막상 영화를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논란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벼려 들이미는 솜씨가 예의 그것이다.

수영을 "놀려고" 시작한 초등학생 준호(유재상)는 소질은 있지만 나가는 대회마다 4등이다. 메달만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등수에 속이 뒤집어지는 엄마 정애(이항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메달 따게 해준다는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광수의 진심어린 지도 덕에 준호는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 메달을 딴다. 그러나 이 진심어린 지도의 실체는 다름 아닌 체벌이다. 진실을 마주한 부모는 갈등한다.

<4등>은 준호의 몸에 멍이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광수란 인물에 공을 들인다. 그가 준호를 체벌하는 까닭은 십 수 년 전 유망주였다가 체벌에 반발해 성공가도에서 엇나간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하기 때문이다. 정애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서운” 불안감에 이를 눈 감아 준다. 관객은 이 불안이 메달만 따면 그만인 한국의 성과 중심 선수 양성 시스템에서 비롯함을 광수의 과거 에피소드와 현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다행히 아빠 영훈(최무성)이 나서서 상황을 제재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과거 광수를 낙오시킨 체벌 시스템의 적극적인 방관자이다. 이 영화 속 도식을 복기하다 보면 도입부 삽입 된 98년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보도 화면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등에게만 환호하며 4등을 몰아붙인 것은 수많은 국민영웅을 소비해 온 이 나라다.

하지만 이는 다 어른들의 사정일 뿐, 주인공 준호는 복잡한 갈등을 배경으로 유유히 영화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과정 내내 관객은 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준호를 볼 수 있다. 준호는 심드렁한 코치에게 용기 있게 자신의 수영을 봐달라고 요구하고, 체벌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야 혼자 수영장으로 돌아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기를 치른다. 준호를 따라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아름다우며 숏 마다 명확한 의미로 충만하다.

이처럼 준호의 결정에 극의 진행을 맡기면서도 그 당위를 설명하는 데 무관심한 태도에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성장은 아이의 몫이며 그 원동력도 아이 내면에 기인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세계로 달려 나갈 때 어른을 우선 이해시켜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생각이 너무 쏟아져서 그냥 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슬픔에 일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는 뜻),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기분1) 날씨도 좋고 거리에 귀여운 스커트를 입고 나온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보며 느낀 전에 없는 감정. 위태로워 보이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 안스러움 같은 것?
기분2) 나 스스로도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이 멈칫했다.

너무나 평범한 공간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 우리 여성 모두가 공통의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슬픔이나 공포, 분노, 문제제기 등 각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더라도 안전에 대한 위기감은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내가 되었을 수도 있어. 우리는 이 생각을 해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든가, 계속 두려움을 품고 행동의 제약 속에 살아가든가.
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할 줄 알았다. 살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규범을 깬 문제니까. 아니 이런 설명이 필요하기나 한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의 쟁점이 '여성혐오범죄냐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냐'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피의자가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 죽였다"고 제 입으로 말했음에도 굳이 한 발 물러선 곳에 문제를 재설정하기 위한 쟁점을 만드는 이유가 뭔가. 그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들 피해자의 성별이, 현장이 바뀌나?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한 특수한 사례라고 하면 우리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용인되는 문화와 제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잃게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봤다. 가해자가 가난해서 사회로부터 배제당해온 것이 사건의 원인이고 그도 구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이다. 예컨대 가난한 아이들이 학업성취도가 낮은 게 문제라고 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가난이므로 그럼 교육적인 노력은 손 떼고 있자고 제안할 것인가? 가해자를 구조의 피해자로 본들, 문제의 본질이 여성혐오라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가난의 문제는 여성이 다치고 죽는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폭력행사로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맥락이라면 가난을 위한 프로그램과 약자의 인권을 위한 프로그램은 같이 가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지. 그 두 가지는 상충되지도 않으며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이전에 이 사회가 그렇게 총력을 다해서 가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오기나 했나? 왜 이럴 때만 갑자기 가난이 호출되는데?)

이 사회의 다수 남성들이 여성이 처한 위기를 동료 시민에 대한 위기, 즉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하며 자신들이 잠재적 범죄군으로 지목되는 데 대해서만 히스테릭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꾸만 편을 가르고 혐오를 조장한다고 하는데, 아니 위험에 처한 게 여성들로 한정되어있는데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지.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위기상황을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냥 우리가 된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배제하고 편을 가르는 쪽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수동적 공격은 결국 어떤 폭력을 용인하고, 누구를 죽게 만드는가? '심기가 불편해서' 우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가해자일 수 밖에 없다. 이건 그런 문제.
당연하지만 여성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일이 보호의 명목으로 여성을 조심시키고 통제하는 방향을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날, 나와 친구는 슬픔과 두려움을 공유하면서도 거듭해서,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런 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바람은 별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잠재적 폭력'에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며 사는 것. 더 구체적으로,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멀리서 다가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나를 노리지는 않는지, 길가에 주차된 차 문이 갑자기 열리지는 않을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매일 밤. 매일매일의 생활. 기본적인 자유.

2016년 2월 4일 목요일

헛된 토론

우연한 기회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린 1인 1가구 생존프로젝트 워크숍에 참석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평소 1인 가구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 온 터였다. 원래는 이 기회를 빌어 1인 가구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해 한 편의 글로 발행하고 싶었는데, 기대보다 허무한 논의가 오간 자리가 되어서 후기나 써본다. (초청해 주신 분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사는 연구자들이 우선 발제를 하고 추가 패널들의 사례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실 1인 가구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는 많이 오고가지 않았다. 부모로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있다는 발제자들은 1인 가구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우려의 기색을 드러냈다. 첫 번째 발제자인 문학평론가는 일본에서 화제가 된 고독사 문제를 예로 들며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빌어 커뮤니티가 사라져감으로서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키다가 아무튼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형성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정치학자는 자신을 폴리스가 아닌 오이코스(집)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혼자 살 수 있는 집은 없다고 운을 떼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가정 내에서 생산적 활동이 일어났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점점 가정의 일이 시장과 복지국가에 의해 외주화되고 그 만큼 가정은 외부에 종속된 소비집단이 되었다. 그는 '집'이 정치의 공간, 사회와 연대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며 사적인 것을 배제하는 기존의 엘리트주의 공론장을 비판했다. 이 '집'은 기존의 가족 이기주의로 뭉친 중산층 기득권 가족과는 다른 관계성을 가진 가족인데 그러한 대안의 실마리를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가출팸이나 쪽방촌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득권들은 나눌 수록 가진 것이 줄어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나눌 수록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발제문에 첨부된 보론에는 시골의 대가족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해 도시에서 커리어를 쌓아왔으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게 되며 어머니들의 자매 공동체를 그리워하게 된 '엄마 딸'의 자기반성 서사가 실려있어 좀 뜨악했다. 성별분업과 여성의 경력단절,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던 지금은 상실해버린 가정 내 자급의 기술과 육아 공동체를 회복해야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며 가사노동을 여성의 책임으로 보는 관점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발제자인 철학자는 독신의 실존미학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요약하기 어려운 글이라 생략한다. 아무튼 세 발제의 공통적인 결론은 "알리앙스"든 "약한 고리 사회"든 "해방의 가족"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인 가구가 (특히 노인인구) 고립으로 사회문제화 되는 것은 사실이니 관계를 통한 안전망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커뮤니티를 위해 이야기되어야 할 실용적인 덕목은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진 '남'과 남으로서 관계맺는 기술에 대한 것이지, '사와 공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너나 없이 나누자'의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름답지도, 실용적이지도, 옳지도 않은 주장이다.

나는 패널들에게 물을 것까지 포함하여 일곱 개의 질문을 준비했다. 그 중 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협력과 타협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 협력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보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없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뾰족한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통찰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자리에선 그래서 어떤 대답을 들었냐면 일단 희소가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중학교 사회책에 나오는 그 희소가치 얘기를. 그리고 자원이 부족하면 경쟁이 일어난다는 편견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깨우침을 당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환의 관계뿐 아니라 '증여'라는 게 있는데(몰랐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디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자신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디의 원주민들은 선물의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는 세 시간 여의 워크숍이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와...... 선생님들 대체 뭐가 문제세요? 인디언이세요??? 희소가치랑 증여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있다니 너무너무 놀랍네요. 장담하건데 인류학자들은 증여 개념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쓰는 걸 보면 매우 화를 낼 것이다. 시장경제랑 도시를 역기능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지식인'으로 먹고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모순도 없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인 사랑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명되었다구 생각하시는지... 

워낙 보편적인 문제이고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아서 사례를 들지 않았지만 저 질문을 적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노인 주거복지 전문가 분의 경험담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영구임대지역이 신혼부부나 중산층 가정도 섞여있는 전세임대지역보다 노인복지사업을 하기에 힘들다고 했다. 전세임대지역에서 노인분들을 위해 공간을 사용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하시네요' 하고 별 트러블 없이 넘어가는데, 영구임대지역에서는 왜 노인만 돌보느냐 나도 알바하며 애 키우기 힘들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불평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다. 물론 이를 극복하는 사례들도 있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진 뛰어난 활동가-코디네이터가 수 년에 걸쳐 공동자원을 형성하기도 하고, 놀랍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모두에게 그냥 돈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있는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관계에는 돈이 들고, 신뢰와 개방성이라는 사회적, 심리적 자원을 축적하고 학습할 기회도 결코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지 않다. 

다른 것보다도 2016년에 1인가구에 대해 논의하며 인디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놀라웠다. 아직 살만 하신가보다는 생각 밖에 안들었는데, 그렇다고 공론장을 이렇게 허무하게 막 쓰시면 빚내서 토건사업 벌이는 것 못잖게 미래세대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 된답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할 말을 잃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