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6일 토요일

7/15 올라온 조성주씨의 기본소득 반대 글을 빌미로, 진보진영에서 자주 보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폄하적 레토릭에 대해


정의당 조성주 씨가 당 내에서 기본소득을 검토중이라며 자신은 이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페북에 밝혔다.



스위스 국민투표, 이재명 성남시장, 김종인 더불어 민주당 대표를 거치며 기본소득이 "유행"(언젠가 버려질 거란 뜻이다)의 길을 걷기 시작한 듯한 지금, 솔직히 좀 반가운 말이다.

예컨대 올해 초 토론 자리에서 서로 다른 입장으로 만난 한 청년 활동가는 자신이 정책설계과정에 참여한 서울시 청년수당이 기본소득을 지향하고, 자신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말을 해서 현장의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환영 받았는데(당연히 그 뒤에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딱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기 보단...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유보처럼 보였는데), 솔직히 논의를 무척 비생산적인 프레임 땅따먹기로 만들어버려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 기저에 있는 심리는 조성주 씨의 글에 너무 잘 묘사되어 있다.

<<내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의 설계자체에 큰 이견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게 된 배경에 의구심이 더 강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의당이 기본소득을 검토하게 된 이유도, 서로가 더 진보적이라고 경쟁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진보진영 내부가 언제부턴가 기본소득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도 결국은 선명성 경쟁이나 이슈선점의 의도가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보수정당들을 말하지 못하는(때로는 다른 진보정당은 말하지 못하는)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강박.">> (이하 인용 <<>>표시)

동의한다. 제발 하겠다고 한 거나 잘 했으면. 정책 좀 이슈메이킹 불쏘시개로 갖다 쓰고 버리는 짓 좀 그만했으면.

그리고 이 외에는 의문이다.


1.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다른 복지정책 도입을 방해하는가?

조성주 씨는 기본소득보다 사회안전망의 획기적인 강화, 노동시장 내의 불평등의 완화, 복지체제의 확충 등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납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음의 의문이 든다.
한국의 복지담론 지형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은 기존의 사회보험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미국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복지정책의 양적 수준이 턱 없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가장 큰 효과는 공공부조의 획기적인 확대와 정규직 비정규직 간 소득격차 및 사회안전망 격차의 완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찬반을 구하지 않고 사회안전판을 구성하는 좋은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낙관적 가능성으로 인해, 여타 "시급한" 복지정책이 도입 될 순서(?)를 새치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음 글쎄. 북유럽 '강소국가'가 참여정부에 의해 롤 모델로 상정되고 복지국가 담론이 개진된 지도 어언 10년이고, 무상(보편)급식 논의 이후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었지만, 획기적인 강화와 확충은 없었다. 증세에 대한 논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순서는 증세가 우선이라고 생각된다.

현 시점에서 나는 기본소득이 증세논의의 트리거로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40만원? 5,000만명이면 1년 재원 240조? 계산이 쉽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처럼 모른 척 넘어갈래야 못 넘어간다. 김종인 같은 정치인이 기본소득 얘기를 해서 반가운 거 딱 하나다. 그 정도 권력자에겐 증세의 책임도 끝까지 물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기본소득이 국가 주체의 공공서비스 및 복지를 현금 지급으로 대체함으로서 시장을 강화한다는 사고는, "정부"와 "시장"이라는 주체 중심의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복지 영역에서 한국정부는 적게 지급하면서 (시민을) 많이 통제하는, 서구중심의 이론으로 보면 기이한,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친숙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사고틀이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한국에서 공공서비스와 복지정책이 강화될 경우 그만큼 시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적 상황을 인정한다면 "기본소득"처럼 국가가 시민에게 충분히 지급하면서 시민을 적게 통제하는 정책은 "공공을 시장화"하는 것과 또 다른 효과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장 혹은 노, 사, 정 구조에 대한 메타포 외에 정책이 "현장"에 적용될 때 개인, 조직, 지역, 시장, 국가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인데, 경험 상 (특정 부류의)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를 더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2.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고민이 낭만적인 고민인가?

<<4.13총선 당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들과 한 토론회에 나간적이 있다. 상호질문 시간이었는데 한 진보정당의 후보가 내가 주장하는 특수고용직 및 실업자까지 포함하는 고용보험의 획기적인 확대 등을 두고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고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솔직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 사람들에게 <실업>이란 것은 '꿈을 키우며 살고 싶어요',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따위로 이야기 될 만큼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실업에 대한 대책도 결코 아름답거나 예쁘지 않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한 정당의 대표로 토론회에 나온 상대 후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은 그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에 대한 예의다"라고 한 한 후배의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배 때문에 정치하면서 조만간 화병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실업안전망의 확대를 주장하면 선별복지가 되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현금'으로 주는 것이 '보편적 복지'라는 것인가? 아직 진보진영의 복지관련 논의가 고작 이정도 수준에 머물러있다. 아니 돌아보면 선별복지/보편복지라는 프레임 자체가 진보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 부분에 등장하는 '선별적 복지'라는 워딩은 내가 봐도 별로 적절치 않다. 몇 가지 변호할 거리가 좀 있긴 한데 각설하고, 실업문제랑 일에서의 자아실현의 문제가 왜 충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얘기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지도 모르겠다. 서로서로 별 관련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실업 문제는 심각하다. 자기돌봄 없는 노동환경도 심각하다. 무식하게 구분하면 전자는 경제적 문제고 후자는 문화적 문제다. 이 둘의 해결 방법은 별개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어야 할텐데,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공급과잉의 노동시장에서 하고싶은 일을 찾아 직장을 때려치기의 리스크가 크다고 하기는 힘드니까.

그런데 왜 이 두 문제가 충돌하지? 차라리 상호보완적이지 않나? 억지로 끼워맞춰 보건대, "해고는 살인"인 구조조정 현장의 노동자들, 하청업체 파견직 노동자들과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어요"라고 폼재며 일을 때려치는 3%의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이미지로 "현장"(당사자라는 단어로 대체 가능할 듯)을 구분하고 계시나? 전자의 냉혹한 현실은 모르면서 "꿈"이라는 한가한 얘기나 한다고? "실업안전망 확충"보다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분연히 화를 참으신 걸까?

'생존'과 '자아실현' 중 뭐가 중요하냐고 하면 아무래도 전자인데, 그렇다고 후자는 감히 전자와 나란히 논의되어서는 안되는 건가 하면 좀 애매하다. 그리고 애초에 남의 티끌만한 고통이라도 "낭만적"인 것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은 자유지만 말로 뱉은 이상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일을 하면서 "갑질"을 요구받는 게 너무 괴로워서, 조직문화가 힘들어서, 야근 때문에 매일 울고, 면역체계가 망가져서 여기저기 아프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지속한다. 이 문제는 "현장"이 아닌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말할 것도 없이 실업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꿈"처럼 "아름답고 예쁜"(나는 이 한정사가 어느 정도 "윤리적으로 옳은"으로 등치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에는 든다. 역설법의 용법으로 쓰는 건 이해가 안가지만) 욕망이 생존, 노동권과 같은 당위보다 먼저 나온 것은 이에 대한 욕망이 "현장"에 많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치적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에 대한 바람으로 실업안전장치를 사회에 도입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왜 이것이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고민이라고 이상하게 폄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족 - 개인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요인을 모처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전교조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행동해야 할 시민의 의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친구가 북한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부생 시절 죄책감 반 책임감 반으로 이런 저런 투쟁현장에 뜨내기처럼 참여했지만 연대에 충분은 없었고, 공권력의 폭력 앞에 무력감을 느꼈고, 당사자들에게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무엇이 되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의식과잉이라 그런 게 맞지만 아무튼간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당신의 고통을 이해해?'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는 나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고, 그는 그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 분들과 대화했을 때 나는 내가 나를 위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힘이 기초생활수급자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았고 더불어 그들에게도 자기 자신만이 아는, 생존 이상의 다양한 욕구가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청년, 노인, 실업자, 노동자, 장애인, 비장애인, 여성, 부모, 자녀 etc 각자가 최선의 삶을 지향하며 기본소득에 합의할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현장에서 "낮은 곳에 임한 나" 뽕에 취한 사람들도 너무 많이 봤다. 나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고 이 편이 내게는 훨씬 윤리적인 선택이었다.)



3.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정의당은 천호선 전 대표 시절에 '복지국가 선도정당', '비정규직 정당'이라는 당의 노선을 정립한 바 있다. 좀 투박하고 별로 세련되지도 또 급진적이거나 상상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노선은 여전히 저 두 슬로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소 투박하고 재미없어도 된다. 우리가 대변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지루하고 투박하고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뭐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기본소득 활동 4년 하면서 진영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받는 멸시가 바로 이것이다. 뭐랄까. 팬시해보인다는? 심지어 기본소득 지지자들 안에서도 이런 종류의 멸시를 받는다. 주로 "힙스터"라는 비아냥을 자주 들었는데, 뭐... 정말로 딱히 할 말이 없다. 힙스터가 아니기도 하고... 힙스터가 욕도 아니고... 안 투박하고 안 재미없다는 데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대문자 진정성...안 아쉬워... 안 사요...

다만 내가 기본소득 강의 할 때 마다 꼭 하는 말은 "기본소득은 쉽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한 마디로 모두에게 조건없이 매달 돈을 준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이고, 사실 이것만 알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바로 이 논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 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전염성이 높은 아이디어이고, 그래서 국가개조, 정책설계 어쩌고보다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이 재미에서부터 말 걸기를 시도해왔다. 효과적인 캠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 오프 상시 진행해 온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캠페인이 있다. 청소년은 저축을 하고, 엄마는 이혼하고, 알바노동자는 롯데리아를 그만둔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가정해보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잘 인지 못하는 욕망 아닌지. (특히 2번째) 재미있다.

하지만 좌파, 생태, 급진 언저리에서 재미를 고려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기만 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 전 열린 국제대회에 독일 마인 그룬트아인코멘 프로젝트 담당자 아미라 예히아(http://h21.hani.co.kr/ar…/special/special_general/42038.html)를 초청하는 데도 그것이 재밌는 이벤트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이유로 수 차례 반대에 부딪혔다. 우리의 입장은 사실 재미있다기보단 진지하고 간단했는데, 기술을 적극 사용하는 방법론이 참조할만하고, 국가 차원, 지역 차원의 기본소득 실험이 중요한만큼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미라는 기대대로 다양한 사례를 이야기해주었고 한겨레에서 기사로 발행되어 많은 공감을 얻었다.



4. 그 외 이상한 인과관계를 전제하는 표현들에 대해.
- 사는 게 쉽고 생각이 없어서 "재미있고" 낙관적인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악에 있다고 차악을 지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
- 단순한 게 꼭 오류가 많다고 할 수 없고, 지름길이 틀린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점진적인 로드맵이 더 실현가능성 높은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그냥 잘못된 시각화인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투박함"과 "재미없음"은 당위와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글쓴이의 미감이 좀 별로라는 것만 누설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약간은 인신공격이지만... 취향 따위 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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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좀 처럼 할 기회가 없던 내용을 담아 기본소득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리고 진보진영 내의 이러한 반대가 기본소득을 실현가능하도록 벼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일찍 자야하는데. 망원동 동경 커피 카페인 효과 최상급...

<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심포지엄 토론문


올해 3월 시립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발제한 글입니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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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토론문

2016.3.11 백희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1. 문제적 주체 :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의 정치적 한계와 가능성

청년세대를 지시해 온 단어들은 오늘 날 청년들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잘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문제들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돈이 없지만(88만원 세대),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그들의 부모세대에 종속되어있으며(에코세대), 부모세대와 같은 ‘정상적 4인가족’의 생애주기를 포기해야 하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욕망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삼포세대)

최근 JTBC에서 보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22.6%), 2위는 건물주와 임대업자(16.1%)였다. 명문대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는 얘기는 신기한 뉴스도 아니다. 청년기, 청소년기는 보통 가장 도전적인 시기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오늘 날 이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안정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소득 불안정성, 낮은 취업률, 노동시장 이중화의 심화와 계층이동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높은 주거비용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맥락을 더하고 싶다. 청년 세대가 한국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증언컨대, 우리 세대의 성장기는 사회가 퇴보하는 역행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이후 태어나 IMF 이후의 사회에서 자립해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단 맛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시기는 짧았다. IMF의 개입으로 정규직 일자리 시스템이 깨지면서 가정의 붕괴도 함께 경험해야 했다. 삶의 회복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사회는 새로운 규칙에 맞춰 빠르게 재조직화 된 결과 밀레니엄을 지나며 위기는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눈에 드러나면서 통일의 대업도 사반세기 내에 이루어질 것 같았다. 한일 월드컵이라는 대형 이벤트는 폭발적으로 사기를 드높이며 ‘광장’을 호출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에 진출했다. 정권 교체 후 광장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0년이 되었을 때, 천안함 사건과 전례 없는 연평도 포격이 있었다. 머리 크고 처음으로 당선을 지켜 본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진보정당은 분열했고 통합진보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경제발전, 민주주의, 평화. 어떤 가치도 성공하는 걸 경험하지 못한 채, 또래들과 조직화 할 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세대의 내면이 냉소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희망은 세계화의 흐름과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빠른 확장 덕분에 문화적 다양성을 누린 세대라는 것이다. 적어도 컨텐츠 소비의 측면에서는 선진국과 시간 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시대이다. 또한 한국의 청년세대는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데 아무튼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목적보다는 수단으로서의 배움이었고, 시험에서 얕게 활용되고 말 뿐 실질적으로 축적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은 청년 세대 일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직장과 가정에만 충성하기 보다는 자아실현을 꿈꾸고, 동질한 사회구성원이 되기를 요구하는 집단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체들이 등장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에도 평생직장을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삼포세대’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이나 직장보다 자아실현의 권리에 집중하는 욕망이 정치적 동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여태까지 정치적 주체로 조명 받지 못한 도시 청년 여성은 자아실현의 욕망을 강하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직장에 잔존해 있는 구시대적인 위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해 점화 된 페미니즘 열풍이 데이트 폭력, 몰카 외에도 여성의 일할 권리와 가사 및 육아분담을 적극적인 의제로 삼고 있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높은 취업이민율과 ‘이민계’도 많은 청년들이 한국사회에선 실현될 수 없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청년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득불안정성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회의주의가 결합되면서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을 지향하고 있고 사회에서도 기성 세력에 대한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역동성의 감소는 경제적으로는 불황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의 청년 복지가 갖는 의미는 ‘불쌍한 청년’의 지원이라기보다 사회를 위한 투자이다. 즉, 청년을 위한 사회안전망이자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다시 공무원, 건물주 임대업자란 장래희망을 떠올려 보면, 안정성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자율성의 욕망을 짐작할 수 있다. 건물주 임대업자라고 대답한 청소년에게는 사실 소득이 확보된 이후 정말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래희망이 있을 것이다. 투자로서의 청년복지는 바로 이 진정한 장래희망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 이 사회적 약속을 해내지 못하면 현 청년 세대가 미래에 다음 청년 세대를 위해 기여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2. 지금 청년복지의 방향 : 청년배당, 청년수당, 청년희망통장

다행히 2015년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년들을 위한 직접적인 소득 지원 정책이 지역에서부터 논의 된 의미 있는 해였다. 성남시 청년배당과 서울시 청년수당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경기도는 청년희망통장 정책을 발표했다. 각 정책들은 서로 다른 청년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성남시 청년배당은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편적 현금지급 정책이다. 올해 시범적으로 24세의 성남시민에게 지역화폐의 형태로 연 50만원이 지급되고 있으나 당초 계획한 대로 19세부터 24세까지로 대상을 확대하고 연 1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미취업 상태의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NEET)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선별하여 3,000여 명에게 월 50만원 씩 연 최대 300만원을 지급하는 계획으로 아직 세부 내용 확정을 위한 연구 중에 있다. 청년수당 뿐 아니라 사회활동을 위한 지원도 함께 한다. 선별 기준에는 소득수준과 지원자의 활동계획 여부 등이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매월 활동 보고서를 등록해야 한다. 경기도의 청년희망통장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월 소득 130만원 이하의 청년이 3년 간 퇴사하지 않고 매월 10만원 씩 저축할 경우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매칭펀드 형태로 15만원 씩 더해서 3년 후 1,000만원의 목돈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 정책으로 올해 50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이 중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무엇일까? 기회는 기본적으로 시간, 학습과 장기적 관계 축적,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시 청년배당의 경우 그 효과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 돈으로 교재를 살 지, 친구를 만날 지,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을 할 지는 전적으로 청년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통제권은 성남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있다. 청년배당은 청년이 자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반면 청년수당의 경우 서울시가 선별기준과 프로그램을 잘 설계하고 좋은 협력기관들을 발굴할 수 있는지가 관권이다. 노파심이 드는 지점은 복잡한 선별 및 지원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역량, 활동기회의 질, 지급대상자의 “자기주도”를 해치지 않는 관계수립이다. 청년 문제를 위해 오래 노력해 온 서울시인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할 따름이다. 경기도의 경우 청년희망통장이 아니라 사장희망통장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이는 월 15만원으로 청년을 저소득 저임금 일자리에 묶어두고자 하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복지대상자와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각 정책의 방향성을 요약하면 청년배당은 청년을 신뢰하는 정책, 청년수당은 청년을 보호하는 정책, 청년희망통장은 청년을 착취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각 정책들은 세대 간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청년배당의 경우 지역화폐를 지급함으로서 지역 자영업자들과 상호의존적 이해관계를 형성시켰고, 청년수당의 경우 시니어 멘토 그룹과 연결하는 프로그램(대청마루)을 기획 중이다. 청년희망통장의 경우 중소기업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청년노동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상생 모델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등하고 긴밀하게 연결시킨 청년배당이라고 생각된다.


3. 앞으로의 방향

청년희망통장은 차치하자.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에 내재된 정부와 수급자 간의 관계성을 향후 국가차원에서 도입해야 할 복지 프로그램의 방법론으로 생각할 때 어떤 쪽을 지지해야 할까? 양 쪽 모두 긍정적 비전과 위험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상적인 사회통합의 상에 맞춰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수요를 공급하는 방향보다는 시민들의 역량을 신뢰하고 곧장 자원의 지원하는 방향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행정부의 권력이 강한 한국에서 지원체계가 복잡해지면 아무리 선의에 근거한 복지정책이라도 지급대상자가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될 공산이 크다. 또한 청년배당과 같은 보편적 소득지원은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인 소득불안정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가정과 기업에서 위계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계속 유지되는 것, 청년들이 시장에서 도전을 꺼리는 것, 사교육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개인들이 참고 견디는 리스크이다. 최소한의 조건 없는 소득안전망이 보장된다면 기층에서부터 개인들의 권리행사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청년의 입장으로 돌아오자면, 소득불안이 해결되고 권위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한국은 다양한 욕망을 촉발시키는 매력적인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 청년배당, 즉 보편적 기본소득의 방향성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십년 넘게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사회보험 및 공공부조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합의를 통한 복지국가의 구축이 저성장 시대의 한국 시민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주었다. 기본소득은 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을 자극한다. 한 마디로 논의하기 쉬운 프로그램이다.(이는 물론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비용 계산이 단순하므로 반드시 증세 논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본소득 도입의 장애물로 보기도 하지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리과정을 둘러싼 갈등은 증세에 대한 합의 없이 도입된 복지정책이 중앙정부의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휘둘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증세”라는 아젠다를 감당하고자 하는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이미 세계 곳곳의 사례를 통해 또 총선을 앞 둔 국내 상황에서 보여지 듯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매력적인 정책임에 틀림없으며,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힘이 있는 의제이다. 오히려 증세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한국은 모든 국민에게 코드가 있고, 전산화가 잘되어있는 국가이다. 기본소득 지급이 기술적으로 이보다 쉬운 나라가 있을까?


4. 나가며

창업, 창직, 해외취업, 중소기업 취업, 마을 공동체, 사회적 경제.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책가들은 청년들에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을 권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국가에서 비전을 제시할 역량이 없다면 개인들이 리스크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도박이어서는 안된다. 개인들에게 일정한 소득이라는 예측 가능한 요소가 주어진다면, 미래세대는 알아서 제 욕망과 비전에 근거한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 즉,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과는 다른 경로로 기본소득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성사될 때,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 등으로 명명되어 온 청년세대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청소년세대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갖고 비로소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