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안녕을 물으신다면,

   안녕들하시냐는 대자보가 큰 인기를 얻고있다는 말을 들었던 건 금요일 낮이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하고 넘어갔는데 하루 반나절이 지난 오늘에는 SNS에서 그 얘기를 입에 안 올리는 사람이 없다. 기사만 수 개가 떴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제 나름의 자보들이 붙고있다. 그리고 이 파도타기를 보며 내가 가장 먼저 지은 표정은 환멸이었다. 환멸은 입장이 아니기에 입을 열지 않았으나, 감정의 층위에서 이 현상을 대충 파악하고 고개 젓고 넘어가서도 안될 것 같다. 판단하고, 입장을 만들어보자. 내게 드러난 환멸의 기저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그것을 넘어서보기로 한다.

   이 대자보 행렬은 개인의 직접행동에서 촉발되었다. 환멸의 일차적 이유는 여기 있을 것이다. 개인의 직접행동에 대한 불신. 그것이 대중적 움직임으로 번지는 데 까지 성공하더라도 유효하게 지속되는 것을 목격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상과 액션은 보통 사회적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내 자신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그렇다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양심이 허락치 않을 때 행해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이 보통은 문제해결에의 욕망보다 양심의 가책에 있다는 게 내가 심적으로 불편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겠다.

그럼에도 주현우 학생의 이 행동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방이 어둡고 동료도 보이지 않을 땐(글쓴이가 청년학위라고 듣기는 했지만) 직접 촛불을 켜야 한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이상의 어떤 행동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이 액션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갑자기'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고 화답하는 상황은 씁쓸하다. 희망보다는 다른 게 읽히는 탓이다. 

대자보라는 형식, 학생이라는 신분, 각자의 정치적 무관심을 질타하고, 동시에 그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청년 스스로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 진정성의 삼위일체다. 평범한 한 학생이 자신을 침묵의 공범자로 위치시키며 양심고백 하고, 안부를 물어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사실은 나도 안녕하지 못했다"고 입을 연다. 문제는 줄곧 있어왔고, 선정적인 비극을 내세운 거친 슬로건들도 그친 날들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이토록 사려깊은 수사를 만났을 때에야 응답할 마음이 든다는 게...... 솔직히 이 얼마나 나약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이 진정성이 그들을 매혹시킨 핵심이라면, 얼마나 착각 속에 살고 싶어하는 소비자-시민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성은 정치적인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진정성'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싶어하고, 적어도 그렇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고서는 행동할 생각이 없는 냉담한 대중들이다. 어떤 정치적 전략에도 동원되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내게는 이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반향이 커지는 것이 깨어있는 시민의 대다수가 결국 이런 소비자들이라는 증거로 읽힌다. 그리고 그 '깨어있는'이 수식하는 대상은 양심 뿐인 것 같다. 양심만 깨어있고 머리는 깨어있지 않은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 만다.

   한편, 예기치 못한 대중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촛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08년의 촛불은 축적된 분노가 거리로 터져나왔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씩씩했고, 참 늦게까지도 걸었다. 4대강, FTA같은 의제들은 MB아웃이란 슬로건으로 수렴하며 일차원적인 분노표출로 변환 되었다. 누구도 그에 책임지며 대답하지 않은 채로 날이 추워지자 거리는 더 이상 달아오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 대자보 행렬은 누적된 죄책감이 흘러나온다는 인상이다. 촛불 때의 분노가 그러했듯, 죄책감 역시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해소될 수 있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서 침묵을 깨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 데도 어쩔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거두게 된다. 그냥 그렇게 된다. 예를 하나 들자면 특히 용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기승전결을 거쳤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동안 일말의 죄책감은 해소되고 뭔가 하기는 했다는 양심의 알리바이가 생성된다. 

지금의 대자보판 역시 1.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소비자-시민들이 그간 쌓인 죄책감 해소의 장으로 사용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양심의 알리바이 공작소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알리바이로써의 액션들이 유효한 결과를 불러온다면, 아무렴 좋은 일일테지만 정부와 자본은 대중의 목소리에 어떻게 일관하면 되는 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 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으면 무력감과 피로가 구석에 딱지처럼 굳어붙는다. 그 뒤로는 둘 중 하나다. 뻔뻔하게 같은 레토릭을 반복하며 알만한 실패를 반복하거나, 비겁하게 못 본척 하는 삶에 들어서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걱정은 다 제쳐두고, 정말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이 참담한 상황 속에 어떤 흐름이 생기고 위기감이 공유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다만 자보든, SNS든, 문제를 인식하고, 제 자리에서 발화하고, 그리하여 여럿이 한 데 모였을 때, 다음 행선지가 집회 현장 순례가 되어버리고.....되어버릴 뿐이라면, 발발했던 의미들은 또 딱지가 되어 앉을 것이다. 현 상황의 희망적인 지점은 아무튼 처음으로 각자의 서사들이 모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 자신을 위해 그들에게 연대한다는 게 기만없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들이 슬로건으로 소비되지 않고, 타자와 접속된 상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지속가능한 플랫폼의 구성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그리하여 복잡한 관계의 지도가 가시화되길. 그리고 말미에 자기 이름을 적었던 이들이 자의적으로 쓸데없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촛불은 불어 끄면 그만이지만, 온-오프라인으로 기록된 이름은 못지우니까.

덧-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관련해서 설렘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중적인 움직임이 특정 아젠다 운동에 결합해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은 불가능할 일처럼 여겨진다. 기실 그런 게 가능한 건 정말 독재반대 민주화 투쟁정도 아닐까. 

2013년 11월 27일 수요일

나의 선의

   나는 모든 일을 가능한 지체시키고 싶어하며, 가능한 작은 점으로 수렴해 웅크리고 싶어한다. 짧은 생 내내 그래왔다. 알고 있었지만, 과거지향적이며 만사를 내부로 수렴시키는 이 수동적 태도가 이 정도로 적극적인 욕망을 통해 발현되는 것인 줄은 몰랐다. 뭐냐면, 나는 아주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꼼짝않고 싶어진다. 매 초 마다. 매일 매일.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라고 하면 궤변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다 쓰고 있다. 그러나 팽창하는 우주에는 블랙홀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아무튼 새삼 이로 인해 괴로운 까닭은 요즘 하는 일이란 게 순 남들한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사방으로 늘리는 일을 하는데 순조롭게 진행될 때 조차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의도를 감추느라 허름한 레이어를 몇 겹 둘러싼 마음은 하루만 지나도 너덜너덜.

   그러다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의 선의를 좀 믿자. 타인에게 증명해보이려 할 것 까지는 없다해도, 나 자신은 나의 선의를 믿자고. 남들이 어떻게 꼬아서 올려 보든 내려 보든 간에 그냥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선의를 보아주자고. 정말이지 나는, 우리는 얼마나 선량한 마음으로 이 일에 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어째서 떳떳한 표정을 짓고있지 못한 걸까. 언제나 비굴하게 쭈뼛대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서칭을 하다가 프랑스 기본소득 포털 사이트 운영자의 개인 블로그에 들어가게 되었다. '셀프 인터뷰'로 이루어진 자기 소개를 읽었다. 그는 24세의 청년으로 생각보다 젊었다. 그랑제꼴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엘리트. 지금은 공동경제, 공유경제를 키워드로 한 웹진의 치프 에디터이자, 유럽 기본소득 시민 발의안의 주요 조직가들 중 한 명이다. 요즘에는 배낭 메고 세계 각지에서 머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목표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계를 물려주는 것이며, 그래서 더 발전된 자유를 담보할 수 있는 머니-시스템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어디에 가서 저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계를 물려주고자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나는 모두에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 어째서 모른 척 해왔을까.

......아마 당위를 당당히 내세우기엔 이 사회가 이해 관계 당사자로써의 입장조차 세우는 게 일반화되어있지 않은 곳이라서 그렇겠지. 당위가 아니라 욕망 때문에 이 운동을 한다는 화법이 더 시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알고나면 욕망이 곧 당위고, 당위가 곧 욕망이 된다. 아무튼 나는 이 몰락감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당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하는 방향으로 삶을 조정해나가고 있다.

일단 체력을 좀 키워야겠지만 말이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젊은 엄마들.

   가구 전시장에 이어 유아교육전에서 행사보조 알바를 했다. 젊은 엄마들, 예비엄마들로 붐볐다. 코치, 토라버치, 칸켄백의 거대한 웨이브 속에서 나는 몇 가지를 발견했다. 1) 미취업 기혼여성들의 미인 빈도수가 높다. 2) 모든 엄마들은 멋진 팔뚝을 갖고있다. 3) 그러나 엄마들의 미모 격차는 어린 미혼 여성들 간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4) 요즘 아가들의 옷은 정말 예쁘다.

이 엄마들의 미모는 뼈대부터 다르다. 이마와 콧날이 반듯하고, 눈매가 선명하고, 피부는 맑다. 대개 화장기 없이 수수하며 앞머리 없이 어깨를 살짝 넘는 생머리. 옷은 기본 화이트 톤에 카키, 블루, 오렌지 정도로 어쨌거나 세련되고 편안한 배색. 질 좋은 린넨 같은 것으로 된 걸 입고 있었다. 또 하나 특징은 얼굴에 새겨진 표정이 없다는 것으로, 대개 멍하고 무심한 낯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제품에 대해 묻고 평가했다. 소비 전문가들.

한편, 분명 같은 나이대 같은데 나 어릴 적 아주머니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엄마들도 많았다. 부은 몸, 피로가 역력한 얼굴, 삐져나온 머리. 기혼 여성들의 빈부 차는 미혼 여성들 간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확연히 드러난다.

아.

2013년 8월 4일 일요일

서점에 갔다.

   서점에 갔다. 무척 오랜만이었다. 돈이 궁해지면 가장 먼저 그만두는게 도서 구입. 근데 본래 책을 오프라인에서 사는 편이고, 서점에 '구경'가면 어김없이 뭐라도 하나 집어 나오기 때문에 요즘 같은 때엔 아예 서점을 들르지 않게 된다. 오늘은 모처럼 종로라 맘 속 지름신을 굳게 단속시키고 들어갔다. 정말이지, 많은 새 책들 사이를 좀 걷고 싶었다.

뭔가를 사리란 기대를 아예 접고 들어가니 뭐라도 읽어야 겠다는 마음이 절실해졌다. 책 한 권 다 읽을 시간은 안되고, 찝찝함 없이 적당량 읽을만한게 무엇 있을까 하며 신간 소설 진열대를 둘러보다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그러하듯이>가 눈에 걸렸다. 벗 하나가 올해의 단편이라며 추천했었다.

담담한 묘사로 이루어진 소설이었다. 그러나 작가들만이 잊지 않을 법한 단어들이 곳곳에 별사탕처럼 박혀있었다. 세 장 만에 목이 따갑고 머리가 찡했다. 눈시울이 시큰댔다. 결국 터지려는 순간, 무심히 동선을 그리던 주인공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눈물은 멋쩍게 잦아들었다. 마치 술자리에서 옆사람이 만취하면 내 정신이 돌아오듯이.

노모의 죽음을 맞은 장남의 심리를 좇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제 감정의 결을 돌볼 줄 모르는 묵묵하고 성실한 중년 남자여서 작가는 그의 내면을 서둘러 표현않고, 그가 구멍을 감지할 때까지 천천히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절차들을 묘사한다. 그게 너무 좋았다. 요새 유독 이야기들이 '과정'을 전개하는 장면에 홀린다. 시간이 채워지면서 마디가 생기는 것 말이다.

몇 번 더 콧잔등이 달아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는데, 작가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묘한 거리조절. 맑은 콧물만 훌쩍이며 감탄했다. 십점이네 십점.

   출간 소식 듣자마자부터 정말 갖고 싶은 책이 있었다.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 원래 갖고 싶은 책이나 앨범은 가지기 전까지 들여다보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건 한참 나중 일이 될 것 같아서 일단, 집어들고 털퍽 앉았다. 그러고보니 반디 의자가 다 없어져있었지만, 원래 서점 독서는 바닥에 앉아서 하는게 제 맛이다.




짧은 글들은 평범한 형식을 지키고 있었다. 일상적인 소재로 시작해서, 주제를 꺼내고, 마지막엔 통찰로 마무리하는. 옛사람, 혹은 나이든 사람만이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포리즘을 감당할 수 있고 통찰을 자랑않는 글. 해야할 말만을 단정하게 담은 글. 너무 술술 읽혀서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읽었다.

   한편 앉은 자리에서 발치에 걸리는 책이 있었는데 천운영의 <그녀의 눈물사용법>이었다. 아 원래 눈물사용에 밝은 작가였군. 서점이나 도서관에 오면 이렇게 동선이 독서를 이끈다. 기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으나 배가 너무 고파서 다 못읽고 일어났다. 새우버거를 허겁지겁 쑤셔넣고 근처의 국정원 집회에 있었던 아빠를 만나 같이 집에 왔다. 중년 넘어간 남자들은 다른 사람 발걸음에 보폭을 맞춰주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늙어서가 아니라 옛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젊을 때도 똑같았을 것이다.

지하철에서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책 봤니?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아니 네가 황현산 선생을 알아?
응 알지. 너무 좋던데. 다 못읽었어.
허 텔레파시가 통했나.

그러고 아빠는 배낭에서 <밤이 선생이다>를 꺼내주었다. 감격에 겨워 주는 거냐고 물었더니 오늘 다 읽고 집에 두고 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취직하면 아빠한테는 예쁜 캡모자를, 엄마한텐 <엄마도 그러하듯이>를 선물해야지. (동생녀석은 뭘 줘도 별로 안기뻐한다)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시간 의상실

   내가 뭘 원하는지 자꾸 잃어버린다. 잊어버리는 거 아니야. 잃어버리는 거야. 열심히 메모해둔 쪽지를 분명 처음엔 손에 쥐고 있는데, 여기 저기 사방에서 거절당하면서 정신없이 튕겨나가다 보면 어느새 손은 텅 빈 채 땀에 젖어있고 바닥없는 간절함만 어두컴컴하다.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일기 안 쓴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구나. 한 달도 안되었으니. 키보드는 여전히 고장난 채 있다. 지금 굳이 넷북 켜서 쓴다.

어느 회사 면접에 떨어지곤 평소보다 좀 더 상심했다. 아마 상황이 절실한 탓. 거기서 내게 기대감을 많이 주기도 했고. 하기야 주변 얘기를 들어봐도 꼭 면접 분위기 좋은 데에선 떨어지고 아닌 데에 붙더라는 이야기는 많지만.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기에 더 아쉬웠다. 별 수 없지 뭐.

그 동안 일일 알바를 전전했다. 정말 가뭄에 빗방울처럼 돈이 똑, 똑 떨어지며 순식간에 지면에 스며들고... 이 회사 저 회사 다녀보니 각각 분위기가 정말 천차만별이다. 조용하고 가라앉은 곳, 느슨하고 활달한 곳, 여자가 많은 곳, 남자가 많은 곳, 비상장 회사부터 대기업까지. 그나저나 당연하게도 회사는 대학사회의 연장이었다. 수동태로 사람 가리며 인간관계 맺어온지 어언 7년, 주변에 어느덧 재밌고 똑똑한 (그리고 조금 절망적인) 소수의 사람들만 남았는데. 그 재미없는 테레비 개그하던 대학교 애들 전부 다 회사에 있었다. 아 어쩔 수 없는 건가. 저 맞장구의 세계를 피할 수 없단 말인가... 옷만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뿐이지 새터 때 한 번 보고 뒤돌아 도망쳤었던 그 친구들이 저기 고스란히. 아아. 사춘기 소녀가 되어버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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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BAR이라는 용어를 많이들 쓴다. 어느 주부 게시판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각설하고, 뭔가 약간 터무니없는 낭만이랄까 환상같은 걸 투사한 대상을 말한다. 인도의 자유로운 영혼이라던가 북유럽의 조용하고 모던한 삶 같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보통 타인에게 들통나는 종류의 것. 나는 내 BAR이 궁금해져서 찾아보려 했지만 도통 없었다. BAR이 웃음거리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나도 없다니(모르겠다니), 이 역시 비루한 영혼 아닌가. 안그래도 요즘 내 인생행로가 이렇게 걍팍한 것은 방어적이고 안일한 조로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그러다 오늘 문득 찾아냈다. 내 BAR은 구김살 없는 속물적인 소녀였다. 투명한 여자애들. 사랑받는 데 최적화 된 애들.(개츠비에서 데이지가 바라는 딸 아이 같은) 얼굴에 바로바로 욕망을 애교로 띄워내는 그 투명한 구조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그들의 그림자는 더 깊으리라 생각해왔다. 주변의 우울한 스놉/룸펜들보다 훨씬 더.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네들과 별로 친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더 내 BAR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걘 너무 철이 없다고, 남자를 너무 막 만난다고, 애가 좀 생각없어보인다고, 저번엔 자기 명품 가방을 대놓고 자랑하더라고 뒷다마 마당에 오르내릴 때도 어쩐지 영 흥이 나질 않았다. 그도 그런게, 그렇게 솔직하게 명품 자랑을 하면 조금도 거만해 보이지 않는 걸. 그렇게 자기방어의 레이어를 한 겹도 안두르고 있는 애를 까내리고 싶지는 않다고. 나처럼 겁많고 내면에선 열등감이랑 우월감 쩌는 애 보다 훨씬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타인의 깊이를 상상해주는 일도 예의는 아니다.

2013년 6월 2일 일요일

연어와 피자와 다우니의 천국!

   연어와 피자와 다우니의 천국! 미제와 삼성의 아름다운 팀플레이! 말로만 들어왔던 코스트코에 갔었다. 차도 없고 차있는 친구도 없는 관계로 우리 둘은 든든히 백팩을 메고 버스를 탔다. 그 전에 원기충전을 위해 하루 지난 치킨과 동빙고의 로얄밀크티 빙수도 흡입했다. 밀탑도 좋고 차 박물관의 수북한 녹차빙수도 좋아하지만 역시 이것이 가장 훌륭하다. 동빙고가 있는 동부 이촌동 아파트 단지상가의 카페와 식당들을 보고 나는 괜히 분개했다. "아니 시발 집 1층에 동빙고가 있는 것도 모자라서 김뿌라가 있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웃기위한 분개였으므로 웃었다.

보광동에서 양재 코스트코로 가는 길. 버스는 신사-논현-강남역을 가로질렀다. 인도에 북적이는 검은 머리통들. 차도를 가득 매운 붉은 미등들. 서로를 반사시키는 유리 외벽의 고층 빌딩들. 복학 첫 해 써야했던 레포트를 떠올렸다. '현대 사회의 바로크적 특성'을 찾아 쓰는 과제였는데, 한국 시와 이 고층 빌딩 중 무엇을 주제로 할까 고민했었다. 요즘 대학 인문학 강의들이 으레 그렇듯, 교수님은 과제를 아주 쉽게 수정해주셨는데 다른 거 됐고 "프레시오지떼"(사치스럽고 경박한 화려함)과 "뷔를레스크"(낯설고 이상한 것. 혼란스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변신)라는 두 가지 특성에 집중해서 쓰라고 했었다. 결국 '주체가 사라진 포스트 모던 시대'의 빈약한 예시를 찾아내면 그만인 과제였다. 그리고 밤에도 야근으로 불을 꺼뜨리지 않으며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는 종로 일대의 대기업 건물들이 주는 심상 같은 게 있었다. 결국 주체가 변신하고 사라지는 미래파 시인들의 시집을 주제로해서 썼지만. (나이들어 이런 걸 쓰면 영혼이 파.괘.된.다)


입장에서 계산가지 3시간이 넘게 걸려버렸다. 중간에 푸드코드 피자와 핫도그를 먹긴했다. 그래도 역시 와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박물관으로 치환해보니 뭐 또 그 정도 걸릴만도? 각종 공산품들을 파는 1층에선 소파에도 앉아보고 접이식 의자도 펴보고 코렐 접시도 들었다 놔봤다. 지하의 식품관엔 아름다운 연어들, 청순한 소고기들, 술... 치즈... 각종 소스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동식품들. 그러나 우리는 할인하는 다우니 4리터와 에프킬라 전기 훈증기, 좀 싼 와인 두 병(맥주를 끊기 위함이다), 프레고 토마토 소스 3.6 킬로그람, 쯔유 1.8리터, 발사믹 소스(식초를 졸인 것) 정도만 샀다. 예산도 예산이고 짐도 짐이라 무리하지 않았다. 젊은 부부들은 카트가 넘치도록 생수며, 우리아이 술안주 우리남편 영양간식 등을 채워넣고 있었다. 우리는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이 때 만큼은 결혼하고 싶기도 하단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역시 매일 4인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건 할 짓이 못된다. 곰국이나 한 달 내내 먹겠지란 결론으로.

   그리하여 지금, 여기. 나의 새로운 욕망. 그건 거대한 냉장고... 그리고 코스트코 회원증... 사촌 언니들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대한 냉장고가 갖고 싶다보면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고, 차 있는 파트너와 결혼하고,  ## 뉴타운에 입주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근데 나는 그 부분을 스킵하기 때문에 저 욕망이 완전 뜬 구름이 되어버린다. 5년 내로 1억 모으기 같은 것 보다 거대한 냉장고가 훨씬 추상적인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아무래도 타고난 그릇이 작은 것 같다. 그런데 일단 매일 커피 한 잔이라는 것도 실은 거대한 냉장고와 그리 먼 곳에 있는 욕망이 아니라서 이미 가랑이 찢어질 것 같이 힘든 뱁새입니다. 무제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얼마나 고마운 포장지인지 아시나요?



아무튼 다음에 코스트코에 갈 땐 차없는 친구들 여럿이 모여 가서 사이좋게 대용량 상품들을 나눠야겠다. 기대된다. 문구류도 사고 싶다.


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작년에 새롭게 얻은 것으로 두통이 있다

작년에 새롭게 얻은 것으로 두통이 있다. 스트레스가 곧장 물리적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이 여전히 신기한 감각이다. 어릴 때 부터 신경성 소화불량이 있어왔기는 했지만 복통과 두통은 확실히 다른 느낌. 두통은 언어화된 감정들의 직접공격 같다. 그 순간 머리 속에 차오른 울화의 언어들이 엉키고 마찰하며 연소해버리는 것 같달까. 그 과정에서 열이 나면서 머리 양 끝 지점이 지끈지끈. 한편 복통은 좀 모호하고 뭉근한 통증이다. 어디 가야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던져지면 배가 아팠는데, 좀 끼워맞추기 같지만 정체불명의 불안이 원인이기 때문에 두통과는 달리 모호한 통증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잠들었다 일어나서 이어쓴다. 어제는 두통으로 괴롭더니 오늘은 복통이 양반은 못된다는 듯 찾아왔다. 소화가 통 안되었다. 밀가루를 먹어서 그럴까. 곧 치통도 찾아올 것 같아서 두렵다.

요즘은 여유없음이 곧 희망없음으로 느껴지고, 엉망이다. 삶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 몰입이 두렵다. 시간가는 줄 모르는게 두렵다. 사실 그래서 컴퓨터로 영화를 잘 못본다. 다 보고나면 러닝타임이 틀림없이 지나가 있을 거라는 게 두려워서. 30분 이상의 시간이 드는 일은 통제할 자신이 없다. 시작도 못하겠다. 그렇게 한 달 간 시계에서 눈을 못 땐 체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 

너무나 한심하다.

새벽에 잠들기 전, 프랑스에 있는 친구와 카톡으로 수다를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상냥하고 관대하다. 미안한 마음보다 기쁨과 안도감이 앞섰다. 

한심하기 싫다. 

이를테면 나나난 키리코 만화 여주인공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미나미 큐타나 에릭 로메르의 여자들이 좋다. 

급화제전환. 에릭 로메르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홍상수도 좋아하겠네 하고 아는 체들을 한다. (당연하다) <생활의 발견>, <극장전>,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밖에 안봤는데 맘이 환하게 좋은 작품은 딱히 없었다. 만듦새의 기이한 훌륭함도 스스로 설명이 안되어 약간 껄끄러움이 남아있다. (이건 좋은 거다.) <하하하>가 제일 재미있다고 해서 언젠가 보게 될 날을 기대중이다. 로메르와 홍상수는 비슷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른 점이 더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메모는 이런 인상비평: 로메르의 인물들은 귀엽지만 그가 사람들을 귀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홍상수는 사람들을 귀여워하고 그의 인물들은 찌질하다. 로메르의 영화는 문학적이다. 물론 문학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의 속성을 활용해서 문학적 심상을 남긴다는 것. '영화는 새로운 문학이다' 같은 표현도 무리없이 허락될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는 모든 요소가 영화라는 장르로써만 설명된다는 맥락에서 유독 영화적이다.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월세를 송금했다

월세를 송금했다. 이사온지 만 한 달이다. 오전에는 주문한지 10일만에 드디어 의자가 왔다. 방정리에 일단 종지부를 찍은 느낌. 조립식 데스크 2만 7천원. 접이식 의자 1만 2천원. 하필 이사와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덕분에 돈 없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말도 안되게 싼 공산품들 덕분에 살았다. 다이소, 이케아, 소프시스, 중국, 인터넷 쇼핑 만세. 왕자행거 2만원 대, 책장 6만원 대, 40와트 전구 스탠드 2만 2천원? , 2.0채널 스피커 1만 5천원. 다 정말 예상보다 싼 값. 이불솜, 커튼, 서랍이 아쉽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고 내 기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다.

오후에는 작년에 모 언론사에 보냈던 자기소개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나의 빈약한 구직활동. 제법 번듯한 문화/진보언론 세 군데 정도에 지원한 게 전부였는데(토익 점수가 없어서 달리 쓸 곳도 없었다) 하나는 필기에서 똑 떨어지고, 두 개는 면접을 개운하게 망쳤다. 


#1. 면접 중인 회의실

면접관: 본인의 장점은 뭐가 있죠?
나: 제 장점이요? (정지)
면접관: (약간 당황한듯) 음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는 장점이라도?
나: 아 어. 귀엽다고들 하는데...요...

몇은 어이없다는 듯, 몇은 귀엽다는 듯 웃는다. 

거의 무례했구나. 자소서는 지금 보기에도 적당히 잘썼다. 명료하고, 짧고, 촌스럽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너무 끼부리지는 않았고, 레토릭은 전형에서 벗어나있지만 가족관계, 성장과정, 성격, 활동경력 등 아무튼 자소서에 포함되어야 할 요소들은 전부 들어가 있다. 아부도 제법, 허세도 제법이다. 물론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번듯한 진보언론에 지원할 게 아니니까. 마지막 면접자리에서는 편집장으로부터 초장부터 "별로 기자가 될 생각이 없나봐요?"라는 질문을 받곤 당황해서 아 아닌데요라고 더듬거렸었다. 얼굴에 써있나 싶었다. 맞아요. 저 별로 기자 되고 싶지 않은데 고를 수 있는 번듯한 선택지가 이정도였어요. 같잖은 언론인 사명감 같은 걸로 무장한 멍청한 언시생들 너무 싫어서 언시판에 얼씬도 않았어요. 

음? 좆도 모르는 애송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각잡고 무난한 자소서나 써야겠다. 저녁에 무일푼 아이쇼핑을 했더니 구직에의 의욕이 조금 높아졌다.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에 이토록 게으르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염치가 많이 사라진 모양이다. 걱정이 된다. 나에게 염치는 그 역할과 비중으로 치자면 어제 일기에 썼던 언니의 '낭만'에 견줄만한 것이다. 이전에 나는 염치에 기대어 많은 것을 안했고, 어떤 것들을 해냈었는데 이젠 그냥 일차원적인 두려움만 남아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염치를 되찾으려 하기 보다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끌어내야 한다. 아니 다 개소리인 듯. 닥치고 니 엿같은 자소서나 쓰란 말이야.

정말 그래야겠다. 일기는 3일 째 매일 쓰고 있네. 맥주를 마시면서 써도 된다는게 참 좋다. 의식의 흐름..... 좋아하니? ^^ 나는 좋아해. 쓰는 것만. 하하. 재활치료 성과있어서 조만간 의식의 흐름 말고 감각의 조립과 같은 리뷰도 쓸 수 있게 되기를. 최근에 극장에선 <위대한 개츠비>,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고 컴퓨터로는 로메르의 <내 친구의 남자친구>를 보았다. 셋 다 할 말이 있다. 

2013년 5월 26일 일요일

재활치료를 받는 듯한 감각으로 일기를 쓴다.

재활치료를 받는 듯한 감각으로 일기를 쓴다. 일단은 목적없이 그냥 글쓰기. 글자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블록쌓기하듯이. 영향력도 의미도 없다는 게 너무 마음 편하다. 하 세상에 어쩜 이렇게 연약한지? 그러고보면 SNS로 온갖 쓸데 없는 말은 다 하면서 매체에 나간 내 글들을 제대로 홍보한 적은 없다. 자격 없네.


이런 면에서 나보다 백배 자격있는 옛동료/친구가 '환멸'이란 단어의 뜻이 환상의 멸망이더라는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환멸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나는 보기와는 달리(?) 정도 없고 낭만도 없다. 귀여운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한 때 조악한 미문 필터를 손가락에 끼우고 살았던 탓인지 '따뜻하고 투명하다'는 오해를 산 바 있으나, 주여 저는 맹세코 눈 먼 사랑도 보헴의 삶도 어른의 자유도 꿈꿔본 적이 없다는 거 잘 아시지요? 프랑스로 어학연수 갈 때도 눈에 별 안띄웠다. 그저 불안에 볼만 홀쭉해졌었지.

그 때 가장 친했던, 지금도 프랑스에서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는 언니가 얼마 전 페북 메시지로 자기 텀블러 주소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 블로그에도 링크시켜둔 내 텀블러와 같은 스킨을 쓰고 있었는데, 카테고리가 여러 개 있어 의아했다. 아아- 클릭해보니 새로운 텀블러 페이지가 뜨는 게 아닌가. 주소도 아예 다른... 그런 하위 카테고리=외부 링크=다른 계정을 한 10개 만들어 놓은 걸 보니 너무 언니다워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슥싹슥싹 몸을 써서 직관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능하고, 뭐든 '예쁘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성에 안차지만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사고 기능은 거의 꺼두었던 언니. 정색한채 커튼치고 고독의 시간을 가지면서, 푼수끼도 다분했던 언니. 주름이 잔뜩 생기게 활짝 웃는 미인이었던 언니를 모두가 좋아했었다. 

눈여겨 보게 되는건 아무래도 2008-2013년까지 매 해의 사진들을 올려둔 페이지였다. 그 중 나와 함께한 2008, 2009년의 사진들이 가장 많은데 나에 대한 언니의 사소한 기억들이 꽤 많이 적혀있어서 약간 감동해버렸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관심받는 데에서 어린아이 같은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언니는 나를 '녀석'이라고 칭하고 있다. '녀석은 종종 이쁜 그림자를 발견하면...' 뭐 이런 식으로. 아유 간지러워. >< 언니는 2008년 겨울의 사진을 올리며 '내 낭만은 다 어디로 갔을까'하고 있었다. 저런. 언니에게 낭만이 없다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다. 작가로써는 괴롭기까지 한 일일 것이다. 어쩐지. 지난 작업의 일부를 나누어 받았을 때 노스탤지어에 기대있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언니가 낭만을 되찾기 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추동력을 얻기를 바랄 따름이다. 낭만을 품고 따뜻하게 타오르는 자아와의 이별은 통과의례같은 어려움이기도 하니까. 4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내가 모르는 언니가 있겠지. 

언니가 내게 '너처럼 진실된 영혼'을 만나서 기쁘다는 편지를 써주었던게 기억난다. 당시 그런 말들은 나를 외롭고 기쁘게 했었는데... 다 어여쁜 기억이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참 많이 찍어주었었다. 아무래도 사춘기나 여고생시절과는 별개로, '소녀시절'을 공유한 사이인 것이다. 떠올려보면 배경이 꽃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