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4일 목요일

헛된 토론

우연한 기회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린 1인 1가구 생존프로젝트 워크숍에 참석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평소 1인 가구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 온 터였다. 원래는 이 기회를 빌어 1인 가구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해 한 편의 글로 발행하고 싶었는데, 기대보다 허무한 논의가 오간 자리가 되어서 후기나 써본다. (초청해 주신 분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사는 연구자들이 우선 발제를 하고 추가 패널들의 사례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실 1인 가구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는 많이 오고가지 않았다. 부모로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있다는 발제자들은 1인 가구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우려의 기색을 드러냈다. 첫 번째 발제자인 문학평론가는 일본에서 화제가 된 고독사 문제를 예로 들며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빌어 커뮤니티가 사라져감으로서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키다가 아무튼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형성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정치학자는 자신을 폴리스가 아닌 오이코스(집)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혼자 살 수 있는 집은 없다고 운을 떼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가정 내에서 생산적 활동이 일어났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점점 가정의 일이 시장과 복지국가에 의해 외주화되고 그 만큼 가정은 외부에 종속된 소비집단이 되었다. 그는 '집'이 정치의 공간, 사회와 연대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며 사적인 것을 배제하는 기존의 엘리트주의 공론장을 비판했다. 이 '집'은 기존의 가족 이기주의로 뭉친 중산층 기득권 가족과는 다른 관계성을 가진 가족인데 그러한 대안의 실마리를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가출팸이나 쪽방촌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득권들은 나눌 수록 가진 것이 줄어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나눌 수록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발제문에 첨부된 보론에는 시골의 대가족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해 도시에서 커리어를 쌓아왔으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게 되며 어머니들의 자매 공동체를 그리워하게 된 '엄마 딸'의 자기반성 서사가 실려있어 좀 뜨악했다. 성별분업과 여성의 경력단절,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던 지금은 상실해버린 가정 내 자급의 기술과 육아 공동체를 회복해야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며 가사노동을 여성의 책임으로 보는 관점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발제자인 철학자는 독신의 실존미학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요약하기 어려운 글이라 생략한다. 아무튼 세 발제의 공통적인 결론은 "알리앙스"든 "약한 고리 사회"든 "해방의 가족"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인 가구가 (특히 노인인구) 고립으로 사회문제화 되는 것은 사실이니 관계를 통한 안전망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커뮤니티를 위해 이야기되어야 할 실용적인 덕목은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진 '남'과 남으로서 관계맺는 기술에 대한 것이지, '사와 공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너나 없이 나누자'의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름답지도, 실용적이지도, 옳지도 않은 주장이다.

나는 패널들에게 물을 것까지 포함하여 일곱 개의 질문을 준비했다. 그 중 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협력과 타협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 협력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보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없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뾰족한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통찰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자리에선 그래서 어떤 대답을 들었냐면 일단 희소가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중학교 사회책에 나오는 그 희소가치 얘기를. 그리고 자원이 부족하면 경쟁이 일어난다는 편견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깨우침을 당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환의 관계뿐 아니라 '증여'라는 게 있는데(몰랐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디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자신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디의 원주민들은 선물의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는 세 시간 여의 워크숍이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와...... 선생님들 대체 뭐가 문제세요? 인디언이세요??? 희소가치랑 증여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있다니 너무너무 놀랍네요. 장담하건데 인류학자들은 증여 개념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쓰는 걸 보면 매우 화를 낼 것이다. 시장경제랑 도시를 역기능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지식인'으로 먹고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모순도 없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인 사랑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명되었다구 생각하시는지... 

워낙 보편적인 문제이고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아서 사례를 들지 않았지만 저 질문을 적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노인 주거복지 전문가 분의 경험담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영구임대지역이 신혼부부나 중산층 가정도 섞여있는 전세임대지역보다 노인복지사업을 하기에 힘들다고 했다. 전세임대지역에서 노인분들을 위해 공간을 사용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하시네요' 하고 별 트러블 없이 넘어가는데, 영구임대지역에서는 왜 노인만 돌보느냐 나도 알바하며 애 키우기 힘들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불평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다. 물론 이를 극복하는 사례들도 있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진 뛰어난 활동가-코디네이터가 수 년에 걸쳐 공동자원을 형성하기도 하고, 놀랍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모두에게 그냥 돈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있는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관계에는 돈이 들고, 신뢰와 개방성이라는 사회적, 심리적 자원을 축적하고 학습할 기회도 결코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지 않다. 

다른 것보다도 2016년에 1인가구에 대해 논의하며 인디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놀라웠다. 아직 살만 하신가보다는 생각 밖에 안들었는데, 그렇다고 공론장을 이렇게 허무하게 막 쓰시면 빚내서 토건사업 벌이는 것 못잖게 미래세대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 된답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할 말을 잃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