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이 있었다. 아람이 표를 예매해 준 덕분에 무사히 관람했다. 자끄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 les desmoiselles de Rochefort>(1967)을 보았다. 2009년에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놓친 게 약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지루하지 않을까 약간 걱정했는데 오프닝 시퀀스가 너무 근사한 데다가 영화를 인솔하는 미셸 르그랑의 음악이 유려하고 힘이 넘쳐서 그냥 영화의 장력 속으로 슉 끌려들어갔다.

아래는 메모.

- 자끄 드미의 영화를 볼 때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 사람의 어떤 점을 그렇게 아꼈는지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나만의 일반론 : 흐르는 물. 유연하고 풍성한 리듬을 가장 잘 구사하는 감독들은 프랑스에 있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영화가 강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빛과 어둠의 드라마틱한 미장센은 이탈리아 감독들이 가장 뛰어나게 활용하고, 미국 감독들은 굉장한 정신적 장악력으로 세계를 영화적으로 치밀하게 구조화한 작품을 보여주곤 한다.

- 위의 얘기를 꺼낸 까닭은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리듬과 색의 영화였기 때문. 사실상 색들도 리듬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동선과 편집과 미장센과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심포니를. 내용은 시종일관 낭만, 운명, 사랑 타령이어서 프랑스인의 자기지시적 농담으로 보일 정도인데(옆자리 남자가 영화 내내 코로 웃어대서 조금 거슬렸다),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는 치밀한 계산을 뒤로한 것이라 정말 감탄했다. 음악-연기-카메라의 동선-색감 모든 게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동되서 움직였기에 나왔을 결과인데. 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변태잖아.

- 성적인 코드를 전혀 잘라내지 않고도 저런 무드,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프랑스 인의 변태력이란... 매끈하게 일그러진 일본 미소녀 그림보다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장미향 마카롱에서 관능을 느껴보세요 하는 느낌. 그런데 그 어조가 의뭉스럽지도 않아서 조금 황당. 문화적 차이일까.

아무튼 경쾌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갔던 건 12년 전 고1 때, 아트선재센터에서 아빠와 만나 마이클 파웰의 <분홍신 The Red Shoes>(1948)을 봤었다. 아빠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의 여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내게 보여줬던 것 같다.

아래는 작년 초였나 서울아트시네마를 위한 관객지지글을 모을 때 썼다가 타이밍을 놓쳐 보내지 못했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시네마테크가 마모되고 소멸되었어야 할 나의 개인적 취향을 지지하고 보호해 준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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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서울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강과 서울아트시네마를 말할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내 고향은 친근하지 않다. 가끔은 어쩌다 우리 집에서 이런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주는 부모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와  너무 안닮았기 때문인데, 특히 시간감각에 있어 그렇다. 도심에서 얼굴없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자주 밀치고 지나갈 때 이를 실감한다. 서울의 시간은 빠르구나. 나와는 영 박자가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은 나의 집이다. (내 느림은 서울의 빠른 시스템에 기대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괴로운 것은 괴롭다. 가끔 남의 시간이 내 시간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꺼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 서울아트시네마는 더 없는 위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느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낙원상가 옥상에 올라, 밖의 빛을 무시하는 컴컴한 극장 속에 무릎을 당겨안고 앉아있으면 다른 모든 시간들은 잦아들고 낯선 시간만 스크린 위에 남아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바다를 보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차의 시선을 보고, 탭댄스를 보고, 배가 전쟁을 관통하는 걸 보고, 안 가본 대륙의 모르는 시대를 감지하고, 편집된 시선들이 어긋날 때 감정이 실패하며 쪼개지는 틈을 보고, 영어, 불어, 대만어, 일어, 이태리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칸디나비아어 따위를 들었다. 가끔은 잠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빠져나오면 불화하던 시간들이 다시 스타트라인에 가지런히 리셋되어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들이 내 삶을 바꿔놓지는 않았지만, 삶을 지속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다. 각별한 이들이 각별한 시공간으로부터 불려온 빛과 소리들의 기운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어떤 작품들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고, 아마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서울시에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는 살 수 없다. 영화가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백희원('관객들의 대화'운영팀)

p.s- 사적인 얘기는 이렇고, 시민으로서 지당한 말을 좀 더 보태야겠다. 한국에 시네마테크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지난 십 몇 여년 간 한국 영화계가 거둬 온 성취와 비교해보면 이상하고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12년이나 된 자생적인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문화정책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정부와 달리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시민들이 사는 도시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공적 지원을 받아 마땅하다. 박원순 시장이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