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안녕을 물으신다면,

   안녕들하시냐는 대자보가 큰 인기를 얻고있다는 말을 들었던 건 금요일 낮이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하고 넘어갔는데 하루 반나절이 지난 오늘에는 SNS에서 그 얘기를 입에 안 올리는 사람이 없다. 기사만 수 개가 떴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제 나름의 자보들이 붙고있다. 그리고 이 파도타기를 보며 내가 가장 먼저 지은 표정은 환멸이었다. 환멸은 입장이 아니기에 입을 열지 않았으나, 감정의 층위에서 이 현상을 대충 파악하고 고개 젓고 넘어가서도 안될 것 같다. 판단하고, 입장을 만들어보자. 내게 드러난 환멸의 기저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그것을 넘어서보기로 한다.

   이 대자보 행렬은 개인의 직접행동에서 촉발되었다. 환멸의 일차적 이유는 여기 있을 것이다. 개인의 직접행동에 대한 불신. 그것이 대중적 움직임으로 번지는 데 까지 성공하더라도 유효하게 지속되는 것을 목격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상과 액션은 보통 사회적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내 자신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그렇다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양심이 허락치 않을 때 행해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이 보통은 문제해결에의 욕망보다 양심의 가책에 있다는 게 내가 심적으로 불편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겠다.

그럼에도 주현우 학생의 이 행동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방이 어둡고 동료도 보이지 않을 땐(글쓴이가 청년학위라고 듣기는 했지만) 직접 촛불을 켜야 한다. 사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이상의 어떤 행동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이 액션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갑자기'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고 화답하는 상황은 씁쓸하다. 희망보다는 다른 게 읽히는 탓이다. 

대자보라는 형식, 학생이라는 신분, 각자의 정치적 무관심을 질타하고, 동시에 그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청년 스스로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 진정성의 삼위일체다. 평범한 한 학생이 자신을 침묵의 공범자로 위치시키며 양심고백 하고, 안부를 물어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사실은 나도 안녕하지 못했다"고 입을 연다. 문제는 줄곧 있어왔고, 선정적인 비극을 내세운 거친 슬로건들도 그친 날들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이토록 사려깊은 수사를 만났을 때에야 응답할 마음이 든다는 게...... 솔직히 이 얼마나 나약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이 진정성이 그들을 매혹시킨 핵심이라면, 얼마나 착각 속에 살고 싶어하는 소비자-시민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성은 정치적인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진정성'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싶어하고, 적어도 그렇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고서는 행동할 생각이 없는 냉담한 대중들이다. 어떤 정치적 전략에도 동원되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내게는 이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반향이 커지는 것이 깨어있는 시민의 대다수가 결국 이런 소비자들이라는 증거로 읽힌다. 그리고 그 '깨어있는'이 수식하는 대상은 양심 뿐인 것 같다. 양심만 깨어있고 머리는 깨어있지 않은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 만다.

   한편, 예기치 못한 대중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촛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08년의 촛불은 축적된 분노가 거리로 터져나왔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씩씩했고, 참 늦게까지도 걸었다. 4대강, FTA같은 의제들은 MB아웃이란 슬로건으로 수렴하며 일차원적인 분노표출로 변환 되었다. 누구도 그에 책임지며 대답하지 않은 채로 날이 추워지자 거리는 더 이상 달아오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 대자보 행렬은 누적된 죄책감이 흘러나온다는 인상이다. 촛불 때의 분노가 그러했듯, 죄책감 역시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해소될 수 있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서 침묵을 깨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 데도 어쩔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거두게 된다. 그냥 그렇게 된다. 예를 하나 들자면 특히 용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기승전결을 거쳤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동안 일말의 죄책감은 해소되고 뭔가 하기는 했다는 양심의 알리바이가 생성된다. 

지금의 대자보판 역시 1.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소비자-시민들이 그간 쌓인 죄책감 해소의 장으로 사용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양심의 알리바이 공작소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알리바이로써의 액션들이 유효한 결과를 불러온다면, 아무렴 좋은 일일테지만 정부와 자본은 대중의 목소리에 어떻게 일관하면 되는 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 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으면 무력감과 피로가 구석에 딱지처럼 굳어붙는다. 그 뒤로는 둘 중 하나다. 뻔뻔하게 같은 레토릭을 반복하며 알만한 실패를 반복하거나, 비겁하게 못 본척 하는 삶에 들어서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걱정은 다 제쳐두고, 정말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이 참담한 상황 속에 어떤 흐름이 생기고 위기감이 공유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다만 자보든, SNS든, 문제를 인식하고, 제 자리에서 발화하고, 그리하여 여럿이 한 데 모였을 때, 다음 행선지가 집회 현장 순례가 되어버리고.....되어버릴 뿐이라면, 발발했던 의미들은 또 딱지가 되어 앉을 것이다. 현 상황의 희망적인 지점은 아무튼 처음으로 각자의 서사들이 모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 자신을 위해 그들에게 연대한다는 게 기만없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들이 슬로건으로 소비되지 않고, 타자와 접속된 상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지속가능한 플랫폼의 구성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그리하여 복잡한 관계의 지도가 가시화되길. 그리고 말미에 자기 이름을 적었던 이들이 자의적으로 쓸데없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촛불은 불어 끄면 그만이지만, 온-오프라인으로 기록된 이름은 못지우니까.

덧-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관련해서 설렘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중적인 움직임이 특정 아젠다 운동에 결합해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은 불가능할 일처럼 여겨진다. 기실 그런 게 가능한 건 정말 독재반대 민주화 투쟁정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