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5일 수요일

동정

엄마가 없는 사람들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가 없는 우리 엄마까지 포함해서.

중학교 체육시간의 자유시간에 한창 수업 중인 창문 근처를 얼쩡이는데, 창가 쪽의 여자애가 턱을 괴고 지루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이전의 나는 놀랄만큼 눈치없고 모든 거짓말에 다 속아 넘어가는 애였는데, 그 날 뭔가 업되어 있었는지 친구에게 "헐 쟤네(수업 중인 애들)가 우리(놀고있는) 부럽게 쳐다봐"라고 말했고, 청소시간에 일군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알고보니 창가에 있던 여자애가 세탁소를 운영하는 가난한 집 아이었고, 내 말을 '가난한 자신이 나를 부럽게 쳐다본다'로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게다가 소위 '욕빨'로는 지지 않는다는 명성을 가진 여자애라, 나는 싸가지 없는 년이 되어 그 친구들에게까지 욕을 엄청 먹었다. 미친년아 씨발 니가 뭔데 우리 엄마 아빠 가난하다고 나한테 불쌍하다고 씨발 etc... 나는 그애 이름도,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명의 말 같은 건 걔네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애에겐 응징, 내게는 속죄라는 각각의 프로세스가 남아있었을 뿐, 둘 사이를 잇는 용서나 화해를 위한 공간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만'을 다룰 줄 모르던 시절이라, 나는 꽤 오랫동안 의도적이든 아니든 타인의 가난을 비웃어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한 번 더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가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다. 이듬 해에 그애는 자퇴했다. 나른한 말투로 늘 투덜거리던 아줌마 사회 선생님이 버스에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그애를 만났던 일을 말해주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없는데 다녀서 뭐하녜요. 뭘 모르는 소리에요. 여러분 졸업은 하는 게 나아요. 걔도 살아보면 알겠죠."

그애에게 엄마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냥 엄마가 없는 사람들이 안되었단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연달아 생각이 났다. 야무지고 무식했던 여자애. 별로 행운을 빌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