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금요일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생각이 너무 쏟아져서 그냥 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슬픔에 일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는 뜻),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기분1) 날씨도 좋고 거리에 귀여운 스커트를 입고 나온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보며 느낀 전에 없는 감정. 위태로워 보이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 안스러움 같은 것?
기분2) 나 스스로도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이 멈칫했다.

너무나 평범한 공간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 우리 여성 모두가 공통의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슬픔이나 공포, 분노, 문제제기 등 각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더라도 안전에 대한 위기감은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내가 되었을 수도 있어. 우리는 이 생각을 해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든가, 계속 두려움을 품고 행동의 제약 속에 살아가든가.
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할 줄 알았다. 살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규범을 깬 문제니까. 아니 이런 설명이 필요하기나 한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의 쟁점이 '여성혐오범죄냐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냐'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피의자가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 죽였다"고 제 입으로 말했음에도 굳이 한 발 물러선 곳에 문제를 재설정하기 위한 쟁점을 만드는 이유가 뭔가. 그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들 피해자의 성별이, 현장이 바뀌나?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한 특수한 사례라고 하면 우리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용인되는 문화와 제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잃게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봤다. 가해자가 가난해서 사회로부터 배제당해온 것이 사건의 원인이고 그도 구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이다. 예컨대 가난한 아이들이 학업성취도가 낮은 게 문제라고 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가난이므로 그럼 교육적인 노력은 손 떼고 있자고 제안할 것인가? 가해자를 구조의 피해자로 본들, 문제의 본질이 여성혐오라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가난의 문제는 여성이 다치고 죽는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폭력행사로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맥락이라면 가난을 위한 프로그램과 약자의 인권을 위한 프로그램은 같이 가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지. 그 두 가지는 상충되지도 않으며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이전에 이 사회가 그렇게 총력을 다해서 가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오기나 했나? 왜 이럴 때만 갑자기 가난이 호출되는데?)

이 사회의 다수 남성들이 여성이 처한 위기를 동료 시민에 대한 위기, 즉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하며 자신들이 잠재적 범죄군으로 지목되는 데 대해서만 히스테릭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꾸만 편을 가르고 혐오를 조장한다고 하는데, 아니 위험에 처한 게 여성들로 한정되어있는데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지.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위기상황을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냥 우리가 된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배제하고 편을 가르는 쪽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수동적 공격은 결국 어떤 폭력을 용인하고, 누구를 죽게 만드는가? '심기가 불편해서' 우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가해자일 수 밖에 없다. 이건 그런 문제.
당연하지만 여성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일이 보호의 명목으로 여성을 조심시키고 통제하는 방향을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날, 나와 친구는 슬픔과 두려움을 공유하면서도 거듭해서,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런 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바람은 별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잠재적 폭력'에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며 사는 것. 더 구체적으로,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멀리서 다가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나를 노리지는 않는지, 길가에 주차된 차 문이 갑자기 열리지는 않을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매일 밤. 매일매일의 생활. 기본적인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