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3일 금요일

청년

   결핍은 많은 걸 설명한다. 하지만 설명만 할 뿐이다. 이에 결핍을 탐색하는 일을 멈추고, 내가 가진 것들을 순순히 인정하며 그것의 쓸모를 탐구하기 시작한 뒤 부터 불행이 떠나지 않는다. 이 불행을 끝내고 다시 우울로 회귀하고 싶은 충동이 갈 수록 더 자주 찾아오고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비겁하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옳은 정신과 아름다운 영혼을 갖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독특한 것이다. 내면이 존재하고 언어가 처음 움직일 때부터 나는 선량했다. 눈치는 없는 게 스스로의 사소한 악함에는 민감했다. 어린시절 내가 저지른 악행은 세 살 때 동네 마트에 가서 크런키 초콜렛을 집어온 것,(너무 작아서 카운터에서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서 사과시키며 물건을 사고 파는 개념을 학습시켰다.) 다섯 살 때 유리병을 깨뜨리고는 말 못하는 동생의 실수로 돌린 것 정도가 다였다.(아홉 살 때 어버이날 편지에서 고백하고 용서 받았다.) 당연히 다른 어린이들의 야만을 이해할 수 없고 동참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거짓말에 속아넘어갔다. 한 번 술래가 되면 그날 마지막까지 술래였다. 


그 심성 그대로 자랐기 때문에, 스무 살 넘어서는 솔직함이 의도치 않게 처세로 자리 잡았다. 바닥을 다 드러내면 악의라고는 없는 민낯이 나타났기 때문에, 예상했던 경멸 대신 의외의 애정들이 돌아왔던 것이다. 내게는 과분하게 느껴졌던,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에 대한 위안이기도 했을 애정들. 그러나 자기로 수렴하는 태도의 윤리적 한계를 깨달으며 이 안온한 내면 전시의 시간은 끝났다. 동시에 타인의 내면을 고평가하는 기만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옳은 정신과 아름다운 영혼은 꾸준한 내면 관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건강한 육체와 잘 가꿔진 표정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당위에 더 걸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곧 단정한 아침을 설계하는 생활, 밤을 정리해야 하는 생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부터.


그 이후로는 매일 아침이 절망이다.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을 걷어내면 한결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자기혐오다. 행동력을 높이기 위해 근거도 없는 부실한 자부심을 성급히 쌓아올린 게 잘못이었을까. 새로 찾아낸 기준이 모든 어제를 실패로 판단하자, 삶은 호소할 수 조차 없는 하찮은 수치로 얼룩지고 모든 내일은 공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달리 무슨 도리가 있단 말인가. 겸손을 빙자해 스스로를 저평가하며 다독거릴 시간, 뻗어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이런 순간 가장 나쁜 선택은 자기혐오를 잊기 위해 타인에 대한 경멸을 시작하는 것이다. 입밖으로 내지 않은 최근의 몇몇 경멸과 혐오는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일단 오늘은 다시 제 바닥을 들통내며 스스로를 까내리는 차악을 택해본다. 나는 20 세기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비대한 자의식의 숙주에 불과하다. 핵폐기물에 피폭당한 영혼이 할 줄 아는 건 소비와 성찰 뿐이다. 별자리점과 심리테스트, 자기계발서들은 말한다. 생각을 멈추고 행동하세요. 아니 나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거에요. 영원히 못할 거에요. 더 나은 실패조차 아닌, 같은 실패만을 지긋지긋하게 반복할 거에요. 잠든 새 솜이불에 질식당해 죽어버렸으면...... 죽음조차 이토록 부드럽게 상상하는 나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걸 포기하고 의탁할 곳을 찾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선량할 때.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을만한 여지가 있을 때.

   아니야. 인간이 못된다고 벌레가 될 순 없다. 나는 아직 젊고, 머리도 쓸만하다. 부모는 나를 지지하고, 친구들은 나를 이해한다. 예쁜 남자친구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면 애정의 눈빛을 돌려 준다. 나는 지지부진함을 견뎌내며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사회에 개입할 수 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구원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그럴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결말 같은 것. 그런 건 꿈도 꾸지마 ㅎㅎ 오늘도 스스로에 대해서만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했으니까 ㅎㅎ 고다르의 부고를 들으면 눈물이 날까? 이런 건 언제나 닥쳐야 알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안 날 것 같다. 그런데 눈물 따위 정말 알 게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