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 : 가족, 공간, 세대

온라인 출판 플랫폼 퍼블리에서 글로벌 기본소득 리포트 프로젝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7일까지 진행되는 펀딩에 참여하시면 리포트 본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북미, 유럽, 인도와 나미비아 등 전세계의 기본소득 동향을 살펴보는 글이고 BIYN 운영위원회가 공동집필합니다. 정부, 시민사회, 시장, 국제구호조직 등 다양한 주체의 관점에서 보는 기본소득을 총정리한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아래는 사전에 공개되는 저자소개 글을 위해 제가 쓴 초안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기본소득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아예 다른 주제로 새로 썼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나름대로 제게 의미있게 쓰여져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퍼블리와 함께 쓴 저자소개 글은 프로젝트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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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올해 초 몇 해 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넌 그렇게 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산다”는 게 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대기업에서 일하며 결혼을 곧 앞두고 있었던 친구가 보기에 어딘가 특이해 보이는 삶인 모양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줄 정말 몰랐는데, 남의 눈에는 십 년 전부터 기본소득 같은 의제를 주장하며 NPO에서 일하는 어른이 될 것 같았다니. 하긴 대학 때 거리에서 리플렛 배포하다 만난 다른 동창도 “잘 어울린다! 화이팅!”이라고 응원해 준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체 어떤 애였기에 이런 대답을 듣게 된 것일까. 어느 반에나 한 명씩은 꼭 있고 인터넷에는 바글바글한, 토론수업을 좋아하고 유난스럽게 음악을 듣는 십대였을 뿐이다. 그런 애가 대학에 들어간 뒤 투쟁 현장 언저리를 맴돌거나 화제의 시집을 구입하거나, 고전영화들을 보러 다니는 것은 분명 자연의 섭리보다 강력한 사회의 섭리다.

하지만 졸업 후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경영학을 공부하고, NPO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당사자로서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었다. 매 번 나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 지 하나의 줄거리로 통합하려고 스스로를 위한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때문에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 반갑다. 나는 왜 위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게 되었고, 2016년 추석에 기본소득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한 자기소개를 쓰고 있게 되었을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공동집필 할 리포트에서 우리는 의견보다 사실에 집중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반대로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음껏 써보려 한다.

돌이켜 보면 이후 벌어진 일들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해도, 내가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활에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게 된 것만큼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싱겁게도 역시 친구의 말이 맞다. 조금 호들갑을 떨자면 2005년에 세상의 좋은 음악, 좋은 서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며 고3을 보내고 있을 때부터 2016년 추석에 이런 글을 쓰게 될 운명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1.

내 아버지는 정년을 1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데, 지난 4월 수업을 하던 중 혀의 느낌이 이상해서 곧장 병원 응급실을 찾았더니 뇌에 종양이 있었다. 검사를 더 해본 결과 이 종양은 혈액암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쁜 소식에 여러 감정들이 밀려오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돈 문제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모든 교사들이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으로 재직 중엔 의료비의 80%까지 보장된다고 했다. 긴 직장생활 동안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병가를 낸 채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나, 동생은 큰 걱정 하나를 내려두고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걱정이 컸던 만큼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대단한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것이 혜택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누구라도 일하다 아프면 생계 위험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큰 병으로 인해 빈곤에 빠지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이 정도는 누구나 누리는 게 당연하지”와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경험은 자주 있는 일이다. 대학 때 만난 지방출신 친구들 몇은 서울에 사는 내게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같은 시기 한편에서는 “너는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에 서울이 아니라 “압구정”이나 “도곡동”이라고 답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대화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에 상계동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서울애인 나는 이런 저런 상대평가의 격차를 느낄 때마다, 내가 누리는 삶의 수준에 대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 두 가지는 우리 가족에게 20년 넘게 살아 온 집이 있다는 것과 은퇴 후 교사인 아버지의 연금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 후 자립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이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부모 부양의 부담을 차치하고 일단은 스스로의 삶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 아닌 가정,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면 되는 인생. 엎드려 절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 바랄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중요한 점은 ‘충분한 삶’은 특권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했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나와 달리 제 인생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또래들도 아주 아주 많이 있었다.(두 번의 강조도 모자라다)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내 생각에 이 정도 삶의 조건이 행운의 영역에 있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였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더 짧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했다. 완전한 자유는 어불성설이더라도, 협상의 여지 정도는 있어야 했다.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 첫 번째가 여기에 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우리가정에 가져다 준 혜택을 체감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알았으며, 이 정도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은퇴자에게 연금을 보장하고 모든 가구에 집을 주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가정 사정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생계유지 이상의 목적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생활기반의 최저선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 정책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달성할 수 있다. 왜 국민연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사회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장이 아니라 굳이 기본소득인지는 아래 차차 더 드러나게 써 볼 예정이다.


2.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상대평가적인 표현을 쓸 때면 어색하다. 기준이 하나이고, 그 기준으로 상하 위계를 만드는 것이 이상하고, 종종 정보를 단순하게 왜곡하며, 그것이 사회에서 권력 기제로 작동하기까지 하면 옳지 못한 것이 된다. 특히 누가 돈이 더 많고 적다거나, 일을 (질과 상관없이) 더 싼 값에 빠르게 끝낸다거나, 어떤 여자가 더 날씬해서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평가는 매일 들어도 매일 이상하다.

최근 든 생각인데, 위와 같은 공정성에 대한 기준은 (가족과 성격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정도 내가 자라온 공간에 의해 형성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 살 때부터 노원구에 있는 상계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총 4만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지하철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가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동네에선 다른 종류의 집을 볼 일이 없다. 집뿐이 아니다. 상가도 학교도, 공원도 대칭 구조로 비슷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현관문 안쪽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사정이 다 달랐을 테고, 실제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좀 더 ‘의미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성장기에는 방이 두 칸이건 세 칸이건 화장실은 한 개인 집에 살고 같은 놀이터에 모여 노는 비슷비슷 형편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마포로 놀러 다니고, 강남으로 출근해보기도 하고, 산도 있고 강도 있는 용산에 4년 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서로 빈부격차를 느낄 일 없는 또래들이 함께 사는 평범한 환경이 보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상계동 아파트단지는 내게 생활공간의 준거점이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하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 말한 것처럼 상대평가에 어색함을 느끼는 감각. 미색의 페인트가 칠해 진 큰 벽을 보면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격차와 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두 번째 까닭은 이것이다. 공감할 수 없는 가치체계와 별개의 가치체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게 기본소득과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회안전망 정책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질 것 같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부합하는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피고용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이 보장받는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육아수당 같은 현금지급정책들은 특정한 생애주기나 가구형태를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질적인 가치의 추구는 아무리 보편성을 추구한다 해도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에는 수급 조건이 없고 사용처에 제한도 없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소비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국가나 시장이 요구하는 가치체계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들이 신념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개인에게는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5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환경의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 적합한 ‘유연한 사회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더 설명하겠지만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사회안전망은 한국에 꼭 필요한 것이다.

3.

나는 87년생이다. 2010년대의 어린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90년대의 어린이들은 한 국역사 가장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했다. 6, 7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흰 쌀 밥이 없어서 보리밥을 먹고, 바나나가 너무 비싸서 못 사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2010년대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때는 시판 샐러드 드레싱이 없어서 마요네즈 묻힌 사라다를 먹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8,9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또 나와 같은 2000년대의 청년들은 8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억압적인 독재정권에 항거해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2006년에 00학번의 입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친미 정서와 통일문제라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요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가 파산해서 미처 복지제도는 못만들고 대신 대학생들에게 신용카드를 뿌린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서 ‘잉여’니 ‘삼포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말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헬조선’같은 단어가 없던 때에도 한국은 항상 어딘가 좀 모자란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의무적으로 구독하던 소년조선일보 1면에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 어린이들의 체험수기 연재가 있었다. 한국인 부모와 달리 미국인 부모는 극장 요금을 적게 내기 위해 자녀의 나이를 속이지 않는다거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은데도) 양말을 기워 신더라는 소소한 교훈들이 실리곤 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외관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선진국의 시민의식과 혁신과 복지 등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이런 결핍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정부복지지출액과 노조가입율과, 시민들의 정치참여율과, 청년 창업율과, 학술서 번역과 아무튼 끝도 없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해외연수는 제일 많이 가는 나라 아닐까? 빠르게 해외 레퍼런스를 카피하는 능력은 여러 부작용을 낳지만 한국의 경쟁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정량적 지표에 대한 목표를 달성함으로서, 눈에 보이는 부유함을 카피하려 노력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었다 해도 복지는 그렇지 않다. ‘삶의 질’이나 안정성, 행복 등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더러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복지의 역사가 빈민 구제부터 시작하면 길게는 2세기에 이르고 적어도 1950년대부터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의 한국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한국의 복지는 정부의 발전주의적 기조에 따라 경제성장을 위해 투자하고 남은 예산을 빈곤층에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잔여적 복지체제이고, 그나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도 채 20년이 못된다.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정책가들은 있지만, 이를 실행 하기위한 정치적 지지 세력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복지모델을 카피하는 것은 어렵고, 적합하지도 않다. 기본소득은 실행까지 정치적 비용이 필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장 간단한 복지정책이다.(특히 한국처럼 주민번호등록이 잘 되어있고 빠르고 통합적인 전산화를 구축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 방법이나 다른 정책과의 연결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대안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에 나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사회안전망을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리포트에서 살펴보겠지만 각 국가의 기본소득에 대한 접근 방식은 모두 다르며, 이를 비교해보는 작업은 국내에서의 접근법을 개발하기 위한 의미있는 내용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 세대로서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이다. 앞서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에 대응하는 미션이 있다면 바로 가정을 넘어 사회적 보호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핵심 의제가 될 수 있다.


0.

나 개인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쩐지 직업병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청년으로서 청년 세대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내가,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지난 4년 간의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오늘 날 청년들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존재로서, 사회의 잉여나, 무엇을 포기한 존재로 스스로를 주변화 시키는 데 익숙하고, 부정의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모순에 빠져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취약화 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나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안전하고 유연한 사회를 위한 ‘충분한 기본소득’을 요구함으로서 이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청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제시함으로서 자원을 집중시키려 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목표를 가진 주체로서 자원을 요구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나 '흙수저'같이 빠르게 유통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이상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동력이 내가 가진 것들, 소중한 개인적인 기억들, 그리고 약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내가 그러했듯 누구나 개인적인 의미에서부터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공통의 목표를 갖게 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게 기본소득 운동의 멋진 점이다. 읽고 나면 향후 몇 년 간 진행 될 이 멋진 과정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들 만한 ‘팩트 중심의 리포트’를 약속하며 글을 마친다.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중2는 기본권

요즘 나 자신에 대해서 내 좋을대로 설명하고 싶은 욕구가 되게 크다. 나 자신에 대해 설명이 요구되는 순간에 그러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 대한 말이 계속 생산된다는 얘기임.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오류만큼이나 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오류도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반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이루어진 윤리는 약간 존재를 위협함.

남들이 그러는 걸 보는 게 좀 불편해서 나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남사스럽게 여기고 꺼려왔는데 최근에는 그냥 이건 좀... 일종의 기본권처럼 느껴짐.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자신에 대해 스스로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설명하고 싶다면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내 뜻대로 설명하고자 시간을 들이는 게 죄악이 아니야. 타인들을 부정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