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9일 수요일

인터뷰 : 모두의 내일이 불안한 사회에서, 삶의 기반이 되어줄 기본소득 - 백희원(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


녹색전환연구소와 한 인터뷰입니다. (2015.12.9 게시되었습니다)
전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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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와 서울시에서 각각 청년배당, 청년수당정책을 들고 나왔는데요. 기본소득을 주제로 오래 활동을 이어 온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중앙정부에서 할 일을 안 해서 지방정부에서 나섰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청년을 위해 내놓는 정책 중에 의미 있는 정책이 별로 없어요. 청년희망펀드 같은 것은 정책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7월에 요란하게 발표한 청년고용절벽해소대책도 무조건 일자리 20만 개 늘리겠다는 말만 하는 데 양적 측면만 보고 질은 따지지 않으면 불안정 일자리만 늘어날 뿐이지요. 그런 일자리는 청년을 착취할 뿐이고요. 무엇보다도 일자리를 늘리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고 기업인데 20만 개 계획 세우면 시장에 일자리가 뚝딱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반면 두 정책은 청년들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준다는 점, 아주 실질적인 지원이라는 점에 충분히 의미부여를 할 수 있죠. 특히 성남시 청년배당정책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연 100만원이니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소득 자체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자체에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울시 청년수당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상이 중위소득 60% 이하의 '사회 밖 청년' 중 사회활동에의 의지가 있는 3,000여 명이고 최대 6개월 간 50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인데요. 자세히 보면 주 노동시간이 15시간 미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해보면 월 30만원 좀 넘는데요. 청년수당이 필요한 청년들은 아마도 돈이 별로 없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사회에 진입하고 싶으니 눈앞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택하기보단 취업준비를 하며 사회 밖에 머무는 청년들이겠죠. 청년수당을 받으려면 아르바이트를 주 15시간 밖에 못하니까 한 달 소득이 80만 원정도로 제한되는 셈인데, 서울에 살면서 부모님 집에 살지 않는 가난한 청년이 '활동'까지 하면서 생활하기에 80만원이 충분한 금액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사회 밖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경력이 안정적인 메이저 일자리에 취직하는 데 불리한 낙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진 않을까하는 우려도 듭니다. 그럼 결국 정책대상과 실제 참여 가능한 대상, 그리고 효과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지요. 그럴 때 사각지대가 생기고요.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밖'이라는 규정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껴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안'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탈락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오히려 '사회 밖'에서 새로운 관계, 시도들이 자리 잡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는 적합하지 않을까요? 청년기는 삶에 대해 유연한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삼포세대, 오포세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포기한 걸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시대적으로 안 맞는 것 같아요.


앞서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이 좀 더 기본소득에 근접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가난하든 부자든, 일을 하든 안하든,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것인데요.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은 해당 나이의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요구사항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본소득에 접근해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한 기본소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정책입니다.


기본소득 논의, 왜 시작되었을까요? 사회에 대한 핵심 문제의식이랄까..?

불평등의 심화죠. 건물 값은 오르고, 생활비도 오르고, 이중노동시장의 격차는 더 심화되니까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경쟁은 더 심해지고, 원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도 훨씬 유리하고요. 사회적으로 이 악순환을 전환시키기 위한 소득재분배의 열쇠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모두의 삶에 당연하게 자리 잡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난하지 않은 사람도, 괜찮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언제든 큰 병이나 실업 등으로 가난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 불안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손실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고요. 기존 복지시스템의 사회보험은 낸 만큼 돌려주는 거고, 공공부조는 피치 못하게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특정한 경우에만 내(정부)가 너에게 돈을 베풀어 줄게’죠. 한국은 그나마 다 보장해주지도 않고 정부 사정 되는 만큼만 도와준다는 식이고요. 반면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방을 하는 정책이죠. 저는 자유가 안전과 함께 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본소득이 실현되어 생계의 안전이 보장될 경우 사람들이 삶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게 다양해지고 이것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환경을 조성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특히 변화를 반기는 청년 세대에게 더 그렇지 않을까요. 좀 창조경제 같네요.


기본소득으로 적절한 금액.. 워낙에 의견들이 다양한데.. 희원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세요?

제가 평생 서울에서만 살아봤는데요. 이번에 ‘함께 사는 돈 탐방기’ 진행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적정 금액을 물었어요. 서울에 사는 사람은 약 80~90만원 정도 이야기하고,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은 약 5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야기하고, 여기에 더 시골로 들어가니 한 3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말씀하시기도 하고.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평소 만나는 서울의 젊은 분들은 혼자 산다고 치고 일단 월세 3, 40만원, 교통비 10만 원 잡고 플러스 생활비로 계산을 하게 되는 거죠. 지방은 물가가 좀 싼 것도 있지만, 제가 만난 분들, 특히 귀농하신 분들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있으니 계산이 달라요. 월세는 나눠 내고, 식비도 같이 농사지어서 나눠 먹고, 30만원이면 빚 안지고 하고 싶은 유기농 농사 지을 수 있겠다고 하시는 거죠.

재원 마련 가능성을 생각하면 월 40만원 정도가 적당하죠. 지금 물가 생각하면 70~80만원 정도. 저도 예전에는 일인 생활자로서만 기본소득 적정금액을 생각했는데 요즘은 저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모아 공동생활을 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생활비를 줄이면 더 적은 금액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한 소득이 들어온다면 일은 몇 년에 한 번 정도 쉬거나, 1년에 6개월만 일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하거나, 아무튼 다양하게 생활을 구조조정해 볼 수 있겠죠. 호혜적으로 자원을 주고받는 관계를 더 늘리고... 여러 조합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최소 40만원에서 70만원 정도가 적절한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 관련 활동을 거의 3년 이상 해오고 있으신건데.. 이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고 있으신지?

잘 못하고 있는 게, 그게 원동력이 된달까. (웃음) 성과를 명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운 활동이지만 항상 아쉬움이 많아요. 조금만 더 잘 해보자, 다음엔 이것보단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생각에.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힘이 많이 되죠.

무엇보다 기본소득이란 아젠다 자체가 항상 새로운 주제를 제게 준다는 게 원동력이 돼요. 예를 들어 맨 처음엔 저 개인적인 욕구로 기본소득을 지지했어요. 제가 문과를 졸업했는데 그간 배운 것에 대해 시장에서 그 쓸모를 설명하기 어려운 거예요. 학부 때 읽던 바르트니 블랑쇼니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그치만 기본소득을 받으면 내가 나를 완전히 노동시장의 '니즈'에 맞춰 설명하고 변명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지지하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남들을 설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이게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면서 잘 모르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재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설득할 수 있죠. 요즘 관심 있는 건 한국 복지 시스템의 낙후성이에요.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의 전형적인 패턴을 볼 수 있어요. 복지는 현장에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잘 전달될 때 빛을 발하는 건데... 당사자 분들 만나면서 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게 정말 잘 안 되어 있더라고요. 심사과정에서 불이익 당하는 사람도 많고. 또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노동대우도 안좋고요. 이런 식으로 기본소득의 설득 근거를 찾다보면 새로운 주제에 관심이 생기고 연결된 또 다른 주제를 보게 되는 루틴이 반복돼요. 이런 게 매력적이죠.


희원 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희원님의 모습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뭘 갖고 싶거나, 하고 싶거나, 이기고 싶거나 이런 게 별로 없었어요. 심지어 식욕도 별로 없고.(웃음) 다만 ‘남에게 해 끼치며 살기는 싫다’ 이 정도 욕망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머리가 크고 보니 평범한 생활만으로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에 살고 있더라고요. 제 머릿 속에서 가장 최근 업데이트 된 버전의 설명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자원이 너무 부족해서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요. 예를 들면 끝도 없는데, 그 동안 쌀값이 안 오를 수 있었던 건 농민 분들이 빚을 지면서까지 대규모 농업을 했기 때문이고, 도서 당일택배가 가능한 건 택배 단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고. 그런데 여기서 농민이나 택배 노동자 분들 손을 들어줘서 물가가 오르면 저소득층이 가장 피해를 보겠지요. 저부터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니까 최대한 싼 물건 사려고 노력하고요. 이런 구조 자체가 싫었어요. 내 가치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랄까. 기본소득이 이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의 생계를 사회가 보장하자는 이야기니까요. 나머지 반은 윤리의 문제일 거고요.

그리고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제가 많이 바뀌었는데... 저는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욕망을 배웠어요. 기본소득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아직도 이 상태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사회화 된 말의 작용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요.


기본소득이라면 충분히 사회문제 공론화의 장이 될 수 있겠다 확신하게 된 계기가 혹시 있으실지..?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약자의 힘이 강화될 거라 확신해요. 인상 깊은 사례가 있었는데... 거리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주면 뭐 하겠냐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한 중년 여성분이 신나게 말씀하시길, "이혼한다!"고. 그 순간 아 가장보다는 여성, 청소년.. 가부장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효용이 더 크겠구나 하는 게 확 와닿았어요. 이런 양상이 다른 영역들에도 적용 되겠다 생각했어요. 실제로 요즘 진행 중인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http://imaginebasicincome.com) 웹 캠페인에도 질 나쁜 일자리를 거부하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이 올라오고 있고요. 가정에서, 노동시장에서, 정치적 권력행사로 이어지는 경제적 종속관계가 약화될 거라는 거죠.

그리고 기본소득의 실행에 대한 논의는 '한 사회에서 어떻게 모든 사회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공공의 자원을 구성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는 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기본소득은 돈 얘기니까 눈에 보이는 구체화 된 숫자들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기본소득, 될 것 같나요? (웃음)

네. 제가 기본소득 운동을 하게 된 데는 비관적인 성격 탓도 있어요. 세상이 너무 안 좋아서 이 정도로 강력하고 종합적인 처치가 아니면 사회문제가 해결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 금수저 이런 단어만 봐도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필요로 할 마음의 준비는 된 것 같아요. 2012년까지만 해도 미래 후손을 위해 하는 거라고 농담했었는데요. 기본소득 논의가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거든요. 핀란드는 집권당에서 기본소득 계획 발표도 했고. 한국도 성남시에서 청년배당 얘기 꺼냈고, 녹색당에서도 당론으로 채택하고 열심히 공론화하고 있고요. 조금 신기했던 건 기본소득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던 분들이 지금까진 거의 예술 쪽 종사하는 분들,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 녹색평론 읽는 분들 정도였고 대개는 부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재명 시장이 한다고 하니까 야권 지지자 분들이 기본소득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 생각이 변하는 경로는 여러가지구나, 나는 지금까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한 스테이지 씩 클리어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 어디서 이게 더 확산될지 모르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방법을 취해보려구요.

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청년에 의한 정책'에 대한 메모

* 2015년 10월 15일 열린 <청년정책 2015 토론회>의 발제문입니다.
행사에 대한 상세정보와 전체 자료집을 위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청년이 사회안전망에 대해 말하자

‘88만원 세대’ 담론의 등장 이후 고용, 결혼 등 사회재생산의 맥락에서 청년이 문제적 주체로 떠오른 지 오래되었으나 그간 중앙정부의 청년 정책은 공급자 중심의 단기적인 일자리 수 확보에 그쳤다. 누적된 문제들을 두고 현 정부는 ‘노동개혁’의 기치 아래 ‘청년희망펀드’같은 홍보성 정책과 함께 신규고용창출의 해법으로 임금피크제와 일반해고 허용이라는 근거 없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없이 사용자 측의 노동유연성만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는 일자리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지역 정부에서는 실질적인 청년 정책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다.

우선 성남시에서 도입 의사를 밝힌 “청년배당”은 19세에서 24세의 모든 성남시민에게 여타 조건없이 월 100만 원 가량을 지급하는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정책으로, “자산심사나 노동요구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으로 정의된다.(BIEN)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제안한 “서울청년(활동)수당”을 포함한 “청년보장(youth guarantee)”은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을 대상으로 월 50만 원의 활동비와 사회 참여의 장을 제공한다. 사회통합을 위해 보조금과 사회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선별적인 통합패키지이다. 두 정책 모두 청년에게 직접 자원을 제공하는 안으로 반가운 관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정책을 둘러싼 논의는 청년 문제 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에서 복지정책이 발전해야 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생각을 전개해나가려 한다.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연 100만 원, 월로 환산하면 8만 원 정도를 지역 화폐로 지급한다. 액수도 적고 사용처에 제약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공유자산에 대한 청년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원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철학과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이 아이디어를 넘어 실현 가능한 제도로서 논의의 장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청년허브가 서울시에 제안한 청년보장은 중간지원조직에서 관에 제안하는, 즉, 아래로부터 구성된 정책제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관과 현장을 연결하며 청년들의 복지수요가 단순 일자리가 아니라 관계, 기회 등 다면적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문제의식을 느껴온 청년허브의 경험이 보조금, 공간, 프로그램을 함께 제공하도록 설계된 정책의 세부에 녹아있다. 연 5,000여명의 ‘사회 밖 청년’들에게 최소 2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 월 50만 원의 활동비를 지원 하자는 계획이다.

청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얘기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보편적 현금지급과 선별적 통합패키지. 나는 기본소득 정책의 지지자로서 전자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청년배당에 내재한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이라는 원리가 앞으로 한국사회의 복지가 확충되는 과정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보편의 원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사회가 직면한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더 합리적인 방향성을 제안하고, 비용의 문제에 있어서도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복지시스템에서는 조건 없이 주는 것이 낫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부가 깊이 개입해온 국가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복지정책의 발전경로도 이와 연동되어 ‘선성장 후분배’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선별적 공공부조 정책 위주로 도입되어 왔다. 한국 복지의 모순적인 점은 국가의 복지지출 수준은 낮은 편, 즉 작은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시행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관의 힘이 강력하다는 점이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제권은 휘두르려고 하는 모양은 일상에서 곧잘 마주해온 권위주의의 비합리성과 꼭 닮았다. 경험상 이러한 패턴은 복지정책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의 지원을 받거나 함께 일하는 것의 피로감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사회안전망 구축의 길은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우선, 재정을 확보하여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관료제에서 작동하는 복지 전달 인프라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과 제도는 가시적이지만, 조직문화나 의사소통방식과 같은 인프라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그만큼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보다도 후자가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선별적 복지정책을 도입할 때는 상대적으로 후자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조건과 상황을 따지는 과정에서 관이 수급대상자에게 더 깊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공급자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복지는 효용을 발휘해야 할 현장에서 실패하기 십상이다.

일례로 지난 5월 동자동 쪽방촌에서 만난 한 기초생활수급자 분은 "국가가 자꾸 빈곤층을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다“며 다음과 같은 사정을 털어놓으셨다. 수급자들이 몸이 아파 정기적인 일을 하기 어려운데, 비정기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 2, 30만원은 ‘소득인정’이 되어 다음 달 생계급여에서 고스란히 깎여 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고 “소비활동에도 생산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생활에 갇히게 된다. 빈곤층의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실상 빈곤을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며 현장에서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에 이야기한 ‘선성장 후분배’ 프레임 속에 발전해 온 한국복지의 맥락과도 닿아있다. 복지예산을 효과성에 근거 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사정에 따라 결정하고, 이에 맞춰 집행과정에서 수급대상자 수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라는 악법을 유지하며 맞춤형복지라는 이름 아래 복지제도의 조건이 더 복잡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 청년배당 정책에서 참여제외의 조건에 주 15시간 이상 노동이 들어간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의 계층하락이 계속되고 있고,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계산해 봐도 빈곤층의 수가 300만 명을 상회하는데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약 13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책의사결정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복지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는 선별적 복지정책의 집행과정에서 무능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복지전달체계는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이고 비효율적인 경로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복지인프라는 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책 설계 과정에서 애초에 조건을 삭제함으로서 복지 전달 과정에 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프라 혁신의 측면에서도 개인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급하는 편이 더 낫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정부 기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조직 내부 혁신을 통해 인프라가 변화 할 가능성은 무척 낮다. 따라서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급함으로서 정부와 개인들 간의 의존관계를 변화시키고 개인들의 발언권을 강화해 외부의 압력이 기능하게 만드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방은 개인들을 지원하는 것

2015년 한국사회가 놓여있는 시대적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따라잡아야 할 미래는 줄곧 서구에 선진국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 미래는 눈에 아주 잘 보이는 형태였다. 국가라는 컨트롤 타워의 지시에 따라 도로를 깔고, 교량을 짓고, 높은 빌딩을 짓고, 수출량을 달성하는 것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반면 “저녁이 있는 삶”정도의 슬로건이 가장 구체적인 심상이었던 ‘삶의 질’, 즉, 복지라는 것은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웠다. 제도는 덜 뚜렷한 것이었고, 성장 동력이 떨어져가던 시점에서야 그 필요성을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래는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한 미래는 정말로 어둠 속에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선진국’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미래 예측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고령화, 일자리를 위협하는 기술발전, 에너지 자원 문제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요인들이다. 이 시대를 살아나가야 할 청년들은 미래의 비전을 모방이 아니라 창안해 내야 한다. 전례 없는 어려운 과제다. 국가가 성과목표를 지시하는 몇 개년 계획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일자리 정책의 실패가 이미 한 사례다. 기업 및 기관에 일자리 수를 늘리라고 지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간절하게 해결하고 싶은 이들, 즉 문제의 당사자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원하는 것이 이 복잡한 문제를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일자리 문제 뿐 아니라 앞에 이야기 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처와 비전도 나는 같은 방법, 즉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원해 역동성을 촉진하는 것이 사회의 문제 해결력을 제고한다는 가설을 갖고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불확실성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펼칠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은 다음 세대가 새로운 기술을 학습하고, 낡은 관습과 결별하고, 사회의 방향성을 주도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확실성은 기회보다 불안으로 인식된다. ‘삼포세대’ 같은 말은 더 이상 기존의 사회재생산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의 삶에 어떤 절망과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청년은 ‘포기’하는 존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존 체제가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제공하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사회재생산 체제의 동력에는 이중노동시장의 강화, 가족주의와 성차별 문화의 재생산, 과도한 사교육 같은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진일보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인식하기엔 지금 개개인들이 놓인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한국인의 81%가 직장 선택 시 소득과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OECD 평균 53.7%) 첫 직장에서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하면 더 힘들어질 미래가 명약관화한데 당장의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시간에 걸쳐 스킬을 익히기보다는 일단 필요한 스펙부터 쌓고, 지지 않기 위한 요령을 구하게 된다. 필요한 만큼만 쌓은 스펙은 자신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감 속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력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욕 자체를 소진시킨다. (인구 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 세대가 축적되는 성과 없이 이 무력감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다. 이 세대가 불확실한 미래를 넘어가야 할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무력감은 심리적인 문제이지만 ‘힐링’이나 ‘계몽’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를 버티느라 미래를 무시하는 것은 시간을 빚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래에 예측 가능한 상수를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제안하는 사회안전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가며 : 청년의 정치와 정책

지금도 종종 쓰이는 말이지만 2000년대 중반에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고생 모르고 자라서 부모 품을 벗어날 줄 모르는 청년세대를 경멸을 담아 부르는 단어였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반값 등록금 이슈가 점화 되고, 청년이 처한 현실이 공론화되면서 이제 청년은 일자리도 없고 자원도 없고 연애도 못하는 안쓰러운 존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프레임은 지원을 요구하면서, 청년들이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설명하게 만든다. 여기서 얻어낸 것들이 있고, 여전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삼포세대’라는 언어는 편리하지만 한계도 그만큼 명확하다. 이제는 주변적 위치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때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 청년이 사회 전반에 대해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이러한 발화가 앞 세대의 담론에 동원될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청년이 청년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구분해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청년이 정책을 경유해 사회적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거시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순위의 위에 있는 당사자로 청년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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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덧붙이자니 좀 민망하지만, 아무튼 길이에 비해서 꽤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디테일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언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한국 복지시스템에 대한 주요 레퍼런스는 <빈곤을 보는 눈>(신명호, 2013)과 인권위의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2013), 양재진(2008), 송다영(2014)인데, 사회복지 분야에서 이 분들이 어떤 입장과 위치에 있는지 지형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은 것이라 놓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비판과 조언을 기다립니다. _ 2016.2.10

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이 있었다. 아람이 표를 예매해 준 덕분에 무사히 관람했다. 자끄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 les desmoiselles de Rochefort>(1967)을 보았다. 2009년에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놓친 게 약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지루하지 않을까 약간 걱정했는데 오프닝 시퀀스가 너무 근사한 데다가 영화를 인솔하는 미셸 르그랑의 음악이 유려하고 힘이 넘쳐서 그냥 영화의 장력 속으로 슉 끌려들어갔다.

아래는 메모.

- 자끄 드미의 영화를 볼 때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 사람의 어떤 점을 그렇게 아꼈는지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나만의 일반론 : 흐르는 물. 유연하고 풍성한 리듬을 가장 잘 구사하는 감독들은 프랑스에 있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영화가 강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빛과 어둠의 드라마틱한 미장센은 이탈리아 감독들이 가장 뛰어나게 활용하고, 미국 감독들은 굉장한 정신적 장악력으로 세계를 영화적으로 치밀하게 구조화한 작품을 보여주곤 한다.

- 위의 얘기를 꺼낸 까닭은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리듬과 색의 영화였기 때문. 사실상 색들도 리듬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동선과 편집과 미장센과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심포니를. 내용은 시종일관 낭만, 운명, 사랑 타령이어서 프랑스인의 자기지시적 농담으로 보일 정도인데(옆자리 남자가 영화 내내 코로 웃어대서 조금 거슬렸다),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는 치밀한 계산을 뒤로한 것이라 정말 감탄했다. 음악-연기-카메라의 동선-색감 모든 게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동되서 움직였기에 나왔을 결과인데. 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변태잖아.

- 성적인 코드를 전혀 잘라내지 않고도 저런 무드,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프랑스 인의 변태력이란... 매끈하게 일그러진 일본 미소녀 그림보다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장미향 마카롱에서 관능을 느껴보세요 하는 느낌. 그런데 그 어조가 의뭉스럽지도 않아서 조금 황당. 문화적 차이일까.

아무튼 경쾌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갔던 건 12년 전 고1 때, 아트선재센터에서 아빠와 만나 마이클 파웰의 <분홍신 The Red Shoes>(1948)을 봤었다. 아빠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의 여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내게 보여줬던 것 같다.

아래는 작년 초였나 서울아트시네마를 위한 관객지지글을 모을 때 썼다가 타이밍을 놓쳐 보내지 못했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시네마테크가 마모되고 소멸되었어야 할 나의 개인적 취향을 지지하고 보호해 준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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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서울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강과 서울아트시네마를 말할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내 고향은 친근하지 않다. 가끔은 어쩌다 우리 집에서 이런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주는 부모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와  너무 안닮았기 때문인데, 특히 시간감각에 있어 그렇다. 도심에서 얼굴없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자주 밀치고 지나갈 때 이를 실감한다. 서울의 시간은 빠르구나. 나와는 영 박자가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은 나의 집이다. (내 느림은 서울의 빠른 시스템에 기대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괴로운 것은 괴롭다. 가끔 남의 시간이 내 시간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꺼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 서울아트시네마는 더 없는 위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느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낙원상가 옥상에 올라, 밖의 빛을 무시하는 컴컴한 극장 속에 무릎을 당겨안고 앉아있으면 다른 모든 시간들은 잦아들고 낯선 시간만 스크린 위에 남아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바다를 보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차의 시선을 보고, 탭댄스를 보고, 배가 전쟁을 관통하는 걸 보고, 안 가본 대륙의 모르는 시대를 감지하고, 편집된 시선들이 어긋날 때 감정이 실패하며 쪼개지는 틈을 보고, 영어, 불어, 대만어, 일어, 이태리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칸디나비아어 따위를 들었다. 가끔은 잠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빠져나오면 불화하던 시간들이 다시 스타트라인에 가지런히 리셋되어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들이 내 삶을 바꿔놓지는 않았지만, 삶을 지속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다. 각별한 이들이 각별한 시공간으로부터 불려온 빛과 소리들의 기운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어떤 작품들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고, 아마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서울시에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는 살 수 없다. 영화가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백희원('관객들의 대화'운영팀)

p.s- 사적인 얘기는 이렇고, 시민으로서 지당한 말을 좀 더 보태야겠다. 한국에 시네마테크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지난 십 몇 여년 간 한국 영화계가 거둬 온 성취와 비교해보면 이상하고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12년이나 된 자생적인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문화정책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정부와 달리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시민들이 사는 도시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공적 지원을 받아 마땅하다. 박원순 시장이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한다.

2015년 2월 19일 목요일

2014 정리

(이걸 구정에 업로드하는 것은 농담도 아니고 그냥 게을러서임. 내용은 201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해당.)

2014년이 너무 싫어서 사실 2014년의 시간에 충분히 동기화되어 살지 않았다. 대학원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있었던 것, 낮보다는 밤에 활동했고, 그 시간마저 학과 수업 관련 텍스트나 사적인 관계에 할애했던 것 역시 그런 생활 감각에 일조했을 것이다.

죽음들만이 방까지 전달되어 방점처럼 남았다. 세 모녀, 부산외대 신입생들, 장애인 송일국 씨, 세월호 승객들, 윤 일병, 판교의 관중들, 현대아파트 경비 분, 제 2 롯데타워 건설현장 노동자 분, 신해철 (무려) 등.

아무튼 한 해 동안 뭘 하기는 했는데, 미미하니까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 2014년에는 우리가 말하기 위한 자리를 우리가 만들었는데, 2016년에는 남들이 불러주는 일도 일어나면 좋겠다. 2015년에 의의를 성취할 일이다.


입력

올해의 영화니 책이니 별로 언급할 것이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것, 가지 못한 곳의 리스트가 더 중요한 해였다. 분더바 투쟁현장에도 거의 가 보지 못했고, 밀양으로부터는 어쩌다 우연히 귤이나 얻어받았다. 성소수자 운동이 재점화 된 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고, 때문에 한국에서도 인권 운동, '정체성'의 운동이 다시 가능할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해였는데 그 현장에도 없었다. APAP도 못 가봤군. 귀신, 간첩, 할머니는 정신 차려보니 끝나있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가서는 돈을 거의 못 썼다.


  • 부모님과 함께 본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전시에서는 얻은 바가 많았다. 특히 1층에 들어서는 순간의 배치. 시대의 흐름을 시각화 해 원경으로 배치하고, 산책자를 위한 1인칭들의 경로를 만들고, 청자와 독자를 위한 이입의 공간을 설치. '우리'를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건 '나'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나는 기획의 서론 본론 결론이 아니라 기획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채널의 효과를 생각하게 되었다. 입체적인 심상이 남았는데 두고두고 사고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도움이 되는 책들을 학교 안팎에서 읽었지만 정리 할 만한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에게 더 명시적으로 익히지 않으면 사실 익히는 게 아닐지도. 그 외에 좋아했던 시인들의 시집이 우르르 출간되어서 오랜만에 몇 권의 시집을 읽었는데,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한 단어 단어들이 너무 자극적이라 아주 느리게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다 못 읽었다. 김행숙, 이제니, 신해욱, 이영주. 다 읽고 모국어랑 오래 떨어져 지낸 친구한테 고스란히 선물할 생각. 시집은 워낙 남에게 잘 주어서 이제는 손님처럼 느껴진다.
  • 기억나는대로 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적어보자면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논픽션 다이어리, 기디언 경감, 혹성탈출, 카트, 액트 오브 킬링, 곤 걸. 다 재미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에 대해서는 글을 썼고, 하나에 대해서는 글을 쓰려다 실패했다. 
  • 그리고 유튜브를 자주 봤다. 유명한 쇼와 아이돌들, 대부분의 걸그룹, 코난 오브라이언 번역 클립 같은 것들.
  • 웹툰도 많이 봤다. 레진 코믹스에서 하양지 작가의 달콤한 애드립과 우리는 시간문제, 이자혜 작가의 미지의 세계를 손꼽아 기다려가며 읽었다. 내 취향의 두 정점이었다. (아마도) 같은 또래의 작가들이 제시하는 세계라는 건 각별하다. 
  • 음악은 그냥 매년 듣던 거 또 들었다. 나에게 음악은 이제 그냥 분위기인 것 같다. 어느 시기의 취향이 박제되었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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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영화 상영회
00 그라운드
기본소득 영화 상영회 @ 동네형들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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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
밀양과 나 집담회
복지국가 vs 기본소득 대토론회
우리 민주와 썸타기
청년 녹색당 여름 워크샵 휴먼 라이브러리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녹색당 기본소득 특별 위원회
  • 발행
복지국가 vs 기본소득 대토론회 토론문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토론문
영화잡지 아노 3호 : 20세기 팝업북, 21세기 서사의 배치,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리뷰
나불나불 골병 :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 답답한 시대, 기본소득으로 시야확보


2014 반성
  • 좋은 내용의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결정을 내려야 할 타이밍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게다가 망설임은 결정의 질에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 실패할 거면 빨리 해보는 게 좋다.

2015 목표
  • 매일의 시간을 들여서 의미있는 논문을 쓴다. 
  • 이틀의 간격으로 운동하고 건강을 지킨다.
  • 매주의 모임을 통해 유효한 운동을 한다.
  1. 제 2회 00 그라운드의 정확한 위치설정으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2.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의 핵심 가치를 개발하고 방향 설정을 명확히 하여 구체를 제시하고 담론의 물꼬를 튼다. 
  3. 새로운 관객의 대화 포맷을 시도한다.

2015년은 총선을 한 해 앞둔 해. 한국에서 열릴 기본소득 국제대회를 한 해 앞둔 해. 논문을 써야하는 해.

도전적인 과제 몇 가지로 목표를 집중해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도 학교 공부를 허덕이며 해냈는데, 올해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강도가 더 세질 예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학교 밖에서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적어도 내 머릿 속에서는 아주 연결이 잘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관점으로 작용하는 두 상이한 주제를 어떻게 나의 입장에서 남들에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잘 엮어볼 것인가. 이것은 즐거운 과제이다. 문제는 체력. 재미가 피곤에게 번번이 진다. 벌써?

아빠가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해이기도 하다. 나의 운명 뿐 아니라 우리 남매의 운명을 고민해야 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남동생에 대한 고민을 더 미룰 시간이 없다.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동생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엄마는 평생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왔고, 가능한 거의 모든 시도를 해봤지만 동생은 결국 지금 혼자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