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답답한 시대, 기본소득으로 시야확보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발행 중인 연속 칼럼 <시대정신 기본소득>에 실린 글입니다. 이후의 칼럼들을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소득의 이야기가 있다. 한 번 들어보자 :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매 달 충분한 생활비가 지급된다면, 우선 가난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해고가 곧 사형선고라는 공식은 무효해질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으니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일자리의 합당한 개선을 이끌어올 것입니다. 소득증가는 소비를 촉진시키므로 시장 경기도 활성화될 것입니다. 또한 보편적 복지로서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불러오며 조세 정의의 실현과 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성과들을 내어놓고, 생태적인 삶의 실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불황, 생태문제까지 해결한다니, 아무래도 사기 아닐까? 솔직히 그렇다, 반쯤은. 위의 예를 돌아보자면, 시장을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기본소득은,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상충한다. 더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충돌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반만 사기인 까닭은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 각각에 결합하여 강력한 힘을 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없이’라는 기본소득의 성격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주체인 모든 ‘개인’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행위자들에게 자원을 지급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주체들에게 자원이 지급된다면, 문제는 ‘어떤 욕망을 따라 그 자원들이 흘러가고, 또 어떤 문제를 구심점 삼아 재편될 것인가’이다. 일단 모르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각자 어떤 욕망과 임무들을 발견하게 될까? 지금 기본소득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사고, 질병, 분쟁, 불황 등 만성적인 위기감과 반복되는 절망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문제 해결력이 요구되는 시대상황 앞에 우리 대부분이 문제를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무력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80년대 생 이후 청년들은 그렇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통계 지표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무력감의 덫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준다.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허튼 꿈이나마 꿔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로소 당면한 리스크들을 바라 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이 지면은 앞으로 다양한 주체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대표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소득 이야기를 수집함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이 ‘기본소득 뷰’를 통해 검토해 볼 예정이다. 이 시도는 기본소득의 문제 해결력을 입증해 당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본소득을 통해 미션들을 발굴해내고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지도를 그리기 위한 사전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소규모의 이야기들이 모여 다양성의 미학을 성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합적인 사회적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 실마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우선은 가볍게 이야기들을 늘어놓아 보기로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 전방위이종문화리뷰지 <나불나불 9호: 골병>에 게재되었습니다.



0. 골병

  “속으로 깊이 든 병”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가보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1. 이야기라는 세계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지 못한다. 대신 그 작고 유연한 몸을 숙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덕분에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혹은 시청각체험)은 다시 못 겪을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슬픔이 솟아나기 이전에 고통 그 자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울 겨를도 없었다. 고통의 장면들은 책을 덮거나, 화면을 끄고 나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꼭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무렵 학교에서 본 유니세프의 엽서 캠페인 영상은 나의 유년기를 지배한 이미지였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오갈 데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 가느다랗고 늘어진 검은 팔다리, 불뚝 튀어나온 배. 그 주위를 웅웅 맴도는 검은 파리들. 캠페인에 참여하고 따뜻한 버터밀크 같은 일러스트 엽서도 받았지만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종종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건너편 빈 벽을 마음의 스크린 삼아 몇 시간이고 어린이들을 떠올려 보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그러면 눈에 선했다.


2. 학급문고 경향

  문제는 내가 내성적인 어린이었고, 매 학기 초의 단짝은 교실 맨 뒤에 놓여있는 학급 문고였으며, 낡은 신발장 같았던 그 빈약한 책장은 각종 한국창작동화, 학습만화, 위인전 전집들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습만화는 비교적 인기가 좋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인전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에 죽기 때문에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리하여 읽게 되는 한국창작동화들은 대개 ‘운수 좋은 날’과 ‘소나기’의 변형으로 분류될 법한 우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단 한 편이라도 행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를 바라며 그 동화집들을 도리 없이 읽어 나가곤 했다.

  그건 정말 조금도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경험은 ‘상계동 아이들’(노경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바로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던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속의 상계동은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주공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비탈진 달동네로,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이들의 진열장이었다. 알콜 중독자 아빠를 둔 아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 맞아 죽는 병든 어머니를 둔 아이 등등. 작가는 곤계란 같은 음식을 무척 열심히 다루었는데, 거의 민속지 같았다. 2004년 재출간 되면서 나온 출판사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힘겹고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편안한 문장에 꼼꼼히 담아 놓았고, 슬픈 현실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 같다“

  다 큰 머리로 보니 가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이라는 명실상부한 죄책감 해소용 자위행위를 왜 어린이들을 향해 한단 말인가? 어린이들은 거기 동참할 줄도 모르는데 뭘 어떡하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이 책을 비롯해 ‘불우한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한국 어린이책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당시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랐던 것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디어 산업이 감추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계몽?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 고난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건 설마 아니겠지.


3. 죄책감

  그들이 뭘 의도했건 간에 여기에 진입한 어린이 독자가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통스러운 삶’ 뿐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경우, 이야기를 통과한 상처투성이 마음에는 한 가지 전리품만이 남아있었다. 죄책감. 우습게도 나는 자신이 가난하지도 않고 고아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점에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곤계란 같은 걸 먹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나는 켄터키 후라이드 오리지널 치킨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 옆에서 위축되는 현상과 사소한 욕망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죄책감의 기원을 불우한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통해 찾아보자. 책장을 열면 무력한 인물과, 제한된 공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시간에 따라 닥쳐오는 단선적인 세계가 있다. 수동적인 인물에게서는 능동적 욕망이나 영향력이 읽히지 않고, 이 단선적인 삶은 대안으로서의 다른 지평도 미래도 보여주지 않는다. 타개해야 할 악은 건드릴 수 없이 멀거나 막강하다. 지도를 그려볼 수 없는 세계는 개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는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공간의 제한(다른 길의 부재)이 비전을 차단함으로써, 독자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볼 때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도 차단당하게 된다. 이때, 가로막힌 시선이 돌아와 결국 향하는 곳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어린이는 백기를 든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미완의 내면을 손쉽게 장악해버린 죄책감이 죄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제인식 -> 문제해결”의 프로세스가 아닌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를 설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선함과 정의로움이 공통의 속성으로 취급되는 세계관을 그린다. 고통을 택하는 만큼 책임이 해소되는 것이 이 세계의 계산법이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병들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는 것으로 발전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다. 만사를 눈물의 알리바이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냥 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으로 기꺼이 벌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선한 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 이러한 욕망을 놀려대는 마음도 함께 자라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불행과 연민의 치킨게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의심과 추측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 한 심약한 어린이가 방어기제 없이 불행한 이야기를 거듭 통과했을 때 내면이 어떻게 병드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거듭 통과해야 했던 걸까. 이것을 어떤 의도의 결과로서 현상의 위치에 두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계동 아이들’은 독후감용 권장도서 목록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몽실 언니’, ‘아홉 살 인생’같은, 불우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주말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바 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에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학습시키고자 했던 어떤 선량함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불우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장애인이나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다.’ 장담컨대 수많은 방학숙제용 독후감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과 순응이란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선이라는, 신분 위계를 내포한 너그러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죄책감은 책을 덮은 뒤 문제의 원인, 즉 책임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가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스스로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경우의 수를 추가해 “문제인식 -> 책임묻기 -> 응징 혹은 반성을 통한 속죄”정도로 수정해보자. 이것이 유효한 사회라면, 공적인 문제도 사적인 차원의 속죄와 응징의 문제로 변환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즉, 개인들은 책임을 공통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강한 권위(보통은 국가일 것이다)가 누군가를 처절히 응징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책임을 느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서 출발해 자책이나 냉소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제 몫의 분노나 슬픔을 비개방적인 사적 네트워크나 지나치게 광대한 군증 속에서 군불 떼듯 연소시키는 사회에는 공공성을 구성하기 위한 언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담론의 자리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효과를 결합해보니 아주 불행한 처지는 피했다는 안도감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장착한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 그려진다. 문제없는 사람들이 세계의 복판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제 자리에서 바라만 보는 심상도. 최근에 현실에서 무게중심이 비어있었던 배, 씽크홀과 같은 진짜 구멍들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처참할 정도로 무능한 사회라는 구멍도.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요즘에는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안도감 보다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더 우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불우한 이야기는 효용을 잃었을텐데,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권장되고 있을까. 일단 오늘의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는 ‘마법 천자문’이다.


5. 모험의 세계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시대를 불문하고 어린이가 피해야 할 이야기, 어린이책의 탈을 쓰고 출판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독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들.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내면형성에 해롭다. 통상 죄책감이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은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면, 불우한 이야기들은 가타부타 욕망을 터부시 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조절기능을 발달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온오프 버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욕망 오프 상태에 맞춰 착한 아이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연민이나 위선, 피해의식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문제가 된다.
어린이 책이 그 대상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건 단속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세계라는 놀이터다. 아시다시피 열길 사람 속에 대한 성찰과 탐구는 이미 수많은 고전들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건 슬기로운 주인공과 그가 극복하고 고쳐나가야 할 엉망진창인 세계, 그리고 열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책 표지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어린이들은 비로소 세계 속에서 욕망과 임무를 일치시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다행히 나에게도 학급문고 외의 탈출구들이 있었다. 시공사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출판 된 양장본의 ‘로테와 루이제’(에리히 캐스트너)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라 잊지 못할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쌍둥이 소녀의 운명 같은 만남과 깜찍한 사랑공작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생애 최초로 ‘최애 작가님’의 자리에 등극했다. 독일인이었던 캐스트너는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부모를 잃거나 소외당해야 했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바로잡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경로를 선사했다. 그것은 90년대의 한국 어린이였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유머와 통쾌함, 그리고 용기였다.


6. 차라리 우스운 세계를

  이 무렵의 나에게는 아프리카 어린이와 곤계란 외에도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상이나 책이 아니라 실제사건인데, 어느 날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아저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가 그 혼자만의 사정(射精)을 구경한 일이다. 그 장면은 진짜 우스꽝스러웠고, 나는 집에 뛰어 들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엄마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었다. “엄마! 모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오줌 쌌어. 그거 부끄러운 거지?” 물론 엄마는 신속히 연락을 취해 사건을 처리했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추행은 내 마음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않았다. 생뚱맞게 글을 마치게 되었는데, 성범죄자들을 덜 경계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요는 이렇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우리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방법이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기본소득이 그리는 미래


*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의 토론문으로 발표된 글 입니다.

0. 소개

  이 발제문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어떠한 사회를 꿈꾸며 활동을 해나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 미래까지 책임져야 할 청년(youth)으로서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결책을 바랍니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동등하게 배치될 수 있는 큰 사회상은 아닙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금액을 매 달 현금으로 지급하자”는 명료한 한 가지 아이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문제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 스위치와도 같고 따라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래사회와 관련된 몇 가지 결정적인 이슈들과 기본소득을 연결 지을 때 그려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미래: 기후변화, 인구고령화, 기술의 발전

  21세기를 변화시킬 국가적 단위의 정책제안이라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기후변화 및 에너지자원 고갈이라는 생태문제와 인구고령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피크오일’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의 고갈은 대량생산의 비전을 꺼버렸고,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되어 이미 특정 지역에서는 높아진 해수면 높이에 주거를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인구고령화는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기대수명의 연장과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출산률 저하로 인해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노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확실하지 않은 채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고,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며 낮은 고용률까지 계속되면서 청년세대의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미래를 구원할 수는 없을까요? 전문가들은 기술발전이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대체할만한 생산력과 정밀함을 제공하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 및 정보화의 추세가 ‘공유’를 활성화 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자원의 절약이며 인류의 발전이지만, 우리의 생계가 임금노동에 저당 잡혀 있는 이상, 이는 일자리와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양날의 칼로 다가옵니다. 최근 적법성을 갖고 이슈가 되고 있는 우버나, 기존 시장을 위협할 만큼 커진 에어비앤비 같은 서비스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에 기술한 경향들은 확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 역량의 증진

  너무 큰 문제의식은 무기력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개개인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의 역량을 키워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은 다양하고, 그만큼 불확실하지만,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개인은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에 대해 기본적인 협상력을 갖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방종’이 우려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유의 권리와 책임이라는 양면을 지닌 ‘자율성’의 강화와 그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2.1 노동의 자유

  기본소득은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지급함으로서 노동과 소득 간의 고리를 끊습니다. 즉, 생계를 위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에 매달릴 필요가 사라집니다. 이 말은 평생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쉴 때는 쉬면서 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긴 동시에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이제는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휴식의 생산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영학자 린다 그래튼은 일의 미래가 유연한 전문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교육이고, 유연성을 위한 전제조건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1년 이상의 장기 휴식입니다. 기본소득은 이처럼 배움과 휴식이 평생 보장되는 삶의 꼴에 잘 부합하는 정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 인증 받지 않고도 예술작업과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 있으며, 돈이 되지 않는 연구사업을 진행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꺼려하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3D 업종에는 지금보다 높은 임금이 책정되는 공정함이 구현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십대 때부터 무의미한 스펙경쟁에 뛰어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다른 부문에서 더 생산적인 경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많은 도전과 실패가 가능한 산업 생태계에서 더 자주 진정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2 소비로부터의 자유와 생태사회로의 전환

  생태문제의 해결은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는 엘리트 집단의 연구를 통해서만은 불가능합니다. 에너지의 소비자이자, 수요중심 에너지 정책의 알리바이인 개인들의 패러다임 변화와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 것은 곧, 노동과 소비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외주화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로 완성시키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대량생산(완전고용)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이 만들어낸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을 돈을 벌고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초국적 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더 값 싼 노동력 착취로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며 막대한 양의 탄소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현금지급형 복지가 이러한 소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생깁니다. 이제 시간을 들여 소비와는 다른, 생산적인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시간, 새로운 제작문화를 익히고 즐길 시간, 직접 먹거리를 길러 볼 시간이 생깁니다. 소비의 즐거움은 반복되면 될 수록 결핍이 커지고 쾌락의 역치가 높아지지만 생산적인 즐거움은 하면 할 수록 더 깊은 몰입과 새로운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또한 기본적인 자립 기술을 익힘으로서 외부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높여줍니다.


3. 전제조건

  ‘돈’은 매개체 입니다. 돈의 가치는 그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서비스와 재화 간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기본소득은 ‘존재 그 자체를 위한 돈’을 모두에게 지급합니다. 이때 이 ‘돈’이 모두의 존재를 긍정하며 어떤 관계의 흐름으로 흘러들어갈 것인지가 이 정책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극단적 상황을 가정하여,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이 모두 초국적 기업의 값싼 제품들과 대형마트로, 투기와 임대료로 흘러들어간다면 사회에 더 큰 격차와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유통될 필드를 교정하고 새롭게 제시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서 사회 전반의 역량이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국가와 지역사회라는 두 주체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1 공공서비스가 보장된 사회

  몇 가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았지만 의료에 드는 돈이 천정부지로 높다면? 지금처럼 주거 임대비가 1인 가구 소득의 수채구멍인 상황에서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인해 월세가 함께 큰 폭으로 오른다면? 가족 및 지인과 교류할 시간을 얻었지만 통신비와 교통비가 오른다면?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데 고등교육기관의 질이 형편없다면?
기본소득이 강조하는 자유는 ‘모두에게’, ‘조건없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는 점에서 ‘평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소득만으로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충분히 빈곤을 해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서비스 정책 패키지가 함께 논의되고 도입되어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공공서비스는 현실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3.2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부상

  또한 미래에는 지역사회의 존재감이 더 커져야 합니다.
우선 기본소득의 가장 바람직한 사용처는 지역입니다. 지역상권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대기업 유보금이 아닌 이웃의 소득으로 유입되며 실물경제를 활성화 시킵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생산적 활동의 무대 역시 지역에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머리를 맞댄다면, 에너지 자립 마을과 같은 전망도 세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존 복지담론의 주체는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통제하는 큰 정부, 타협의 대상인 민간 기업들과, 납세자이자 수혜자로서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납세자의 역할을 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수혜자인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중앙정부 대신 지방정부 및 시민사회라는 주체를 좀 더 수월히 불러옵니다. 공공서비스의 집행자로서 중앙정부는 너무 멀고 큰 존재입니다. 시민과 소통하며 지역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당합니다. 또한 그 비용부담을 모두 국가재정이 부담하는 것도 갈 수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고통받는 한국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현실이 부족한 재정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다행히 보육, 교육, 노인 돌봄 등 복지서비스 산업은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 산업들입니다. 다만 급여가 높지 않고, 이윤 중심의 수입사업이 될 경우 서비스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동반 제안된다면 이러한 단점을 상쇄될 것입니다. 동시에 일자리의 매개 및 공급처로서의 지역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여성과 노인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청년세대의 부담을 덜며 고령화가 불러일으키는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같은 제 3섹터의 주체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사업체인 동시에 결사체적 사명을 띠고 있는 이 같은 조직들의 이중의 부담을 한 결 덜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9세기는 노예해방, 20세기는 보통선거권, 21세기는 기본소득”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합니다.(한국의 근대사에는 맥락이 맞지 않지만) 매 번의 자유가 획득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학습과정입니다. 지역정치의 활성화와 함께할 때, 기본소득은 분명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 될 것입니다.


4.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입니다. 기본소득은 분명 급진적인 발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도입과정까지 급진적이리란 것은 아닙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이란 질문을 통해 자신이 현 사회의 이해관계망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 할 때 다양한 문제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통해 재의미화 되며 사회를 앞으로 추동할 것입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다양한 문제들이 집중될 수 있는 효율적인 아젠다입니다. 우리가 기본소득에 동의할 때, 당위에 머무르던 몇몇 아젠다들이 필요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효율적으로,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우리는 공통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참고]
<일의 미래>(2012) / 린다 그래튼 / 생각연구소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2010) / 조지 매그너스 / 부키
<조건없이 기본소득>(2014) / 바티스트 밀롱도 / 바다출판사
<사회혁신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추진하는가>(2011) / 제프 멀건 / 시대의 창
"사회복지 공무원 39% ‘고위험 스트레스군’" 2013.10.17, 시사in 3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