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 전방위이종문화리뷰지 <나불나불 9호: 골병>에 게재되었습니다.



0. 골병

  “속으로 깊이 든 병”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가보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1. 이야기라는 세계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지 못한다. 대신 그 작고 유연한 몸을 숙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덕분에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혹은 시청각체험)은 다시 못 겪을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슬픔이 솟아나기 이전에 고통 그 자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울 겨를도 없었다. 고통의 장면들은 책을 덮거나, 화면을 끄고 나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꼭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무렵 학교에서 본 유니세프의 엽서 캠페인 영상은 나의 유년기를 지배한 이미지였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오갈 데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 가느다랗고 늘어진 검은 팔다리, 불뚝 튀어나온 배. 그 주위를 웅웅 맴도는 검은 파리들. 캠페인에 참여하고 따뜻한 버터밀크 같은 일러스트 엽서도 받았지만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종종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건너편 빈 벽을 마음의 스크린 삼아 몇 시간이고 어린이들을 떠올려 보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그러면 눈에 선했다.


2. 학급문고 경향

  문제는 내가 내성적인 어린이었고, 매 학기 초의 단짝은 교실 맨 뒤에 놓여있는 학급 문고였으며, 낡은 신발장 같았던 그 빈약한 책장은 각종 한국창작동화, 학습만화, 위인전 전집들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습만화는 비교적 인기가 좋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인전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에 죽기 때문에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리하여 읽게 되는 한국창작동화들은 대개 ‘운수 좋은 날’과 ‘소나기’의 변형으로 분류될 법한 우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단 한 편이라도 행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를 바라며 그 동화집들을 도리 없이 읽어 나가곤 했다.

  그건 정말 조금도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경험은 ‘상계동 아이들’(노경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바로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던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속의 상계동은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주공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비탈진 달동네로,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이들의 진열장이었다. 알콜 중독자 아빠를 둔 아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 맞아 죽는 병든 어머니를 둔 아이 등등. 작가는 곤계란 같은 음식을 무척 열심히 다루었는데, 거의 민속지 같았다. 2004년 재출간 되면서 나온 출판사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힘겹고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편안한 문장에 꼼꼼히 담아 놓았고, 슬픈 현실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 같다“

  다 큰 머리로 보니 가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이라는 명실상부한 죄책감 해소용 자위행위를 왜 어린이들을 향해 한단 말인가? 어린이들은 거기 동참할 줄도 모르는데 뭘 어떡하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이 책을 비롯해 ‘불우한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한국 어린이책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당시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랐던 것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디어 산업이 감추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계몽?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 고난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건 설마 아니겠지.


3. 죄책감

  그들이 뭘 의도했건 간에 여기에 진입한 어린이 독자가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통스러운 삶’ 뿐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경우, 이야기를 통과한 상처투성이 마음에는 한 가지 전리품만이 남아있었다. 죄책감. 우습게도 나는 자신이 가난하지도 않고 고아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점에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곤계란 같은 걸 먹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나는 켄터키 후라이드 오리지널 치킨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 옆에서 위축되는 현상과 사소한 욕망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죄책감의 기원을 불우한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통해 찾아보자. 책장을 열면 무력한 인물과, 제한된 공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시간에 따라 닥쳐오는 단선적인 세계가 있다. 수동적인 인물에게서는 능동적 욕망이나 영향력이 읽히지 않고, 이 단선적인 삶은 대안으로서의 다른 지평도 미래도 보여주지 않는다. 타개해야 할 악은 건드릴 수 없이 멀거나 막강하다. 지도를 그려볼 수 없는 세계는 개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는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공간의 제한(다른 길의 부재)이 비전을 차단함으로써, 독자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볼 때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도 차단당하게 된다. 이때, 가로막힌 시선이 돌아와 결국 향하는 곳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어린이는 백기를 든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미완의 내면을 손쉽게 장악해버린 죄책감이 죄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제인식 -> 문제해결”의 프로세스가 아닌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를 설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선함과 정의로움이 공통의 속성으로 취급되는 세계관을 그린다. 고통을 택하는 만큼 책임이 해소되는 것이 이 세계의 계산법이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병들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는 것으로 발전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다. 만사를 눈물의 알리바이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냥 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으로 기꺼이 벌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선한 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 이러한 욕망을 놀려대는 마음도 함께 자라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불행과 연민의 치킨게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의심과 추측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 한 심약한 어린이가 방어기제 없이 불행한 이야기를 거듭 통과했을 때 내면이 어떻게 병드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거듭 통과해야 했던 걸까. 이것을 어떤 의도의 결과로서 현상의 위치에 두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계동 아이들’은 독후감용 권장도서 목록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몽실 언니’, ‘아홉 살 인생’같은, 불우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주말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바 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에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학습시키고자 했던 어떤 선량함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불우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장애인이나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다.’ 장담컨대 수많은 방학숙제용 독후감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과 순응이란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선이라는, 신분 위계를 내포한 너그러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죄책감은 책을 덮은 뒤 문제의 원인, 즉 책임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가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스스로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경우의 수를 추가해 “문제인식 -> 책임묻기 -> 응징 혹은 반성을 통한 속죄”정도로 수정해보자. 이것이 유효한 사회라면, 공적인 문제도 사적인 차원의 속죄와 응징의 문제로 변환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즉, 개인들은 책임을 공통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강한 권위(보통은 국가일 것이다)가 누군가를 처절히 응징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책임을 느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서 출발해 자책이나 냉소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제 몫의 분노나 슬픔을 비개방적인 사적 네트워크나 지나치게 광대한 군증 속에서 군불 떼듯 연소시키는 사회에는 공공성을 구성하기 위한 언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담론의 자리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효과를 결합해보니 아주 불행한 처지는 피했다는 안도감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장착한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 그려진다. 문제없는 사람들이 세계의 복판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제 자리에서 바라만 보는 심상도. 최근에 현실에서 무게중심이 비어있었던 배, 씽크홀과 같은 진짜 구멍들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처참할 정도로 무능한 사회라는 구멍도.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요즘에는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안도감 보다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더 우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불우한 이야기는 효용을 잃었을텐데,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권장되고 있을까. 일단 오늘의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는 ‘마법 천자문’이다.


5. 모험의 세계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시대를 불문하고 어린이가 피해야 할 이야기, 어린이책의 탈을 쓰고 출판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독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들.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내면형성에 해롭다. 통상 죄책감이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은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면, 불우한 이야기들은 가타부타 욕망을 터부시 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조절기능을 발달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온오프 버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욕망 오프 상태에 맞춰 착한 아이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연민이나 위선, 피해의식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문제가 된다.
어린이 책이 그 대상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건 단속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세계라는 놀이터다. 아시다시피 열길 사람 속에 대한 성찰과 탐구는 이미 수많은 고전들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건 슬기로운 주인공과 그가 극복하고 고쳐나가야 할 엉망진창인 세계, 그리고 열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책 표지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어린이들은 비로소 세계 속에서 욕망과 임무를 일치시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다행히 나에게도 학급문고 외의 탈출구들이 있었다. 시공사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출판 된 양장본의 ‘로테와 루이제’(에리히 캐스트너)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라 잊지 못할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쌍둥이 소녀의 운명 같은 만남과 깜찍한 사랑공작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생애 최초로 ‘최애 작가님’의 자리에 등극했다. 독일인이었던 캐스트너는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부모를 잃거나 소외당해야 했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바로잡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경로를 선사했다. 그것은 90년대의 한국 어린이였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유머와 통쾌함, 그리고 용기였다.


6. 차라리 우스운 세계를

  이 무렵의 나에게는 아프리카 어린이와 곤계란 외에도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상이나 책이 아니라 실제사건인데, 어느 날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아저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가 그 혼자만의 사정(射精)을 구경한 일이다. 그 장면은 진짜 우스꽝스러웠고, 나는 집에 뛰어 들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엄마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었다. “엄마! 모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오줌 쌌어. 그거 부끄러운 거지?” 물론 엄마는 신속히 연락을 취해 사건을 처리했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추행은 내 마음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않았다. 생뚱맞게 글을 마치게 되었는데, 성범죄자들을 덜 경계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요는 이렇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우리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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