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2일 화요일

20세기 팝업북, 21세기 서사의 배치(mis-en-scène)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 웨스 앤더슨) 리뷰

* 영화잡지 [아노]. 3호 미장센에 실린 글 입니다.


1. 웨스 앤더슨 콜렉션

웨스 앤더슨의 출세작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1998)의 주인공 맥스 피셔(제이슨 슈왈츠먼)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다. 그는 체스 클럽, 천문학 클럽, 펜싱 클럽, 프랑스 클럽, 양봉 클럽 등 다수의 클럽 회장이자 연극 연출가이며 교지 편집장 등등을 역임하고 있다. 사업가 블럼(빌 머레이)은 이런 맥스를 야망 있는 소년이라며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실 맥스는 비전과 야망을 갖고 맹렬하게 스펙을 쌓는 청년이라기보다는 학교에 틀어박혀 각종 교내 활동을 수집하는 데 몰입하는 유아적인 인물일 뿐이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닮아있기도 하다. 무표정한 인물들, 강박적인 대칭 화면과 연극적 구성 등, 직선적이고 각 잡힌 형식의 화면들은 앤더슨이 수집해온 컬러풀한 사물들을 정연하게 전시하기에 딱 알 맞는 진열장이다. 그 뒤로는 역시 취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선곡이 흐른다. 인물들의 옷 스타일을 비롯한 각각의 소품들은 영화 전체를 대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완성도 높은 아트워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그리고 많은 경우 영화 밖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르누아르, 오퓔스, 고다르, 트뤼포, 루비치, 스콜세지 등 웨스 앤더슨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리스트는 길고 화려하다. 그러나 앤더슨이 이들 중 누군가를 계승한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원색, 트래킹 샷, 롱테이크, 화려함, 소동극. 60년대 음악 등 그의 영화에 들어있는 기호들이 순간순간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 역시 취향에 맞게 수집된 기호들일 뿐, 감독의 방법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오직 앤더슨이다. 처음 보는 스틸 샷 한 장 만으로도 우리는 그 장면이 그의 영화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개성의 증명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다 엇비슷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장센 뿐 아니라, 제 나름의 결핍을 지닌 미숙한 인물들이 소동극을 벌이다 결국 저마다의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성장의 스토리 역시 반복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앤더슨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반복은 비판받아야 할 매너리즘이라기보다 일련의 시리즈가 제공하는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다. 앤더슨이 자신이 수집해온 기호들로 미장센과 O.S.T를 채우면, 그의 팬들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차곡차곡 수집한다. 학교와, 저택과, 기차와, 바다를 마치 레고 시리즈처럼 차곡차곡. 데뷔 이후 줄곧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웨스 앤더슨이 특유의 높은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지지보다는 선호를 받는, 취향의 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2012) 이후에는 지난 작품들을 망라한 콜렉션 북이 출간된 바 있다. 과장을 약간 섞어 ‘취존’이라는 표현은 그와 그의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키덜트 무비’, ‘힙스터 무비’라는 수식은 앤더슨의 영화들이 그간 어떤 맥락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훈장을 달고 올해 초 국내 개봉한 근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은 그의 지위를 취향의 층위 너머로 끌어올릴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팬시한 외양의 호텔은 그 나름 대작의 아우라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일까? 먼저 웨스 앤더슨 월드의 윤곽을 그려본 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 세계의 경계선을 어떻게 변경시켰는지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2. 사각형의 세계

웨스 앤더슨은 곧잘 연극(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혹은 책(로얄 테넌바움)을 모방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막이 오르고, 장이 나눠지고, 삽화가 등장하고, 타이포그래피가 삽입된다. 눈이 즐거운 동시에 의문이 든다. 이 사람은 왜 연극 연출가나 작가가 되지 않고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스크린도 사각형이기 때문이 아닐까? 앤더슨의 창작동기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현실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하려는 종류의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가능하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과 명료하게 구분되는 사각형 안의 통제 가능한 세계이다. 책과 무대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선호는 앤더슨의 치밀하게 짜여 진 완벽주의적 미장센에서부터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트래킹 샷은 정연하게 수평을 그리고 인물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연극적으로 움직인다. 실제로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전에 결정한 뒤 촬영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완벽한 틀에 대한 집착은 이야기의 완결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코미디, 멜로, 서스펜스 중 어떤 장르로 불러줘야 할지 애매한 앤더슨의 영화들은 성장물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한 데 묶일 수 있다. 이야기들은 교훈을 남기며 인생의 한 시기가 마무리 되는 것으로, 때로 누군가의 죽음을 매듭삼아 완결된다. 이는 무대에서 막이 내리는 것 같은, 책의 뒤표지를 덮는 것 같은 완벽한 종결의 인상을 준다. 그것이 소위 열린 결말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 현실적인 시각적 완결성이 이러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로얄 테넌바움> 같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테넌바움 가와 그 주변의 기이한 인물들이 관객과 같은 현실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리란 상상을 실감나게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 복장과 표정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현실에 없다.


3. 진짜 같은

그런데 <문라이즈 킹덤>은 조금 다르다. 전작들과 달리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니라 그냥 소년 소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아마 웨스 앤더슨의 가장 어른스러운 드라마일 것이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다 자란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마무리 한 후에도 딱히 인물들의 내적 변화나 반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장물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애정관계를 허들로 삼는 성장물이었던 전작들을 역전시킨 듯 오히려 성장물의 외피를 쓴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사랑(혹은 우정)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이 이야기의 목적지이자 핵심이다. 세계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두 소년 소녀가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편지를 통해 감정을 교환하며 둘 만의 낙원에 함께 있으려 한다는 줄거리는 관객들로부터 익숙하게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그 만큼 이 작품의 사랑은 전에 없이 진짜 같은 것이 된다. 앤더슨의 영화에 잔혹한 장면들은 제법 자주 등장하지만, 샘(자레드 길먼)이 낚시 바늘로 수지(사라 헤이워드)의 귀를 뚫어주는 장면만큼 고통이 생생하고 아찔하게 와 닿는 장면은 없다.

진짜 같아진 것은 인물과 감정만이 아니다. 배경의 인공적 느낌도 한 결 덜어졌다. <문라이즈 킹덤>의 모험은 초원과 숲, 해변과 바다에서 진행된다. 이는 앤더슨이 무대, 혹은 동화책을 벗어나 어느 정도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단 이 모든 변화는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앤더슨에게 섬이란 자연까지 세트로 삼을 수 있는, 확장된 버전의 무대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와 숲을 포함한 무대 위에서, 뉴욕이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보다 마음 놓고 넓은 공간감을 즐긴다. 이전 작품들이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완성되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은 이 섬의 지도를 그려내며 완성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딘지 쓸쓸한 정조를 풍기는 삶의 지속이 남아있다. 앤더슨의 1960년대는 그가 그려내는 동시대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노스탤지어만이 과거의 유물을 끊임없이 수집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진짜 같은 감정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4. 1점 투시의 3차원 서사

<문라이즈 킹덤>이 한정 된 공간 속의 모험담이었던 데 반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차 대전 전의 유럽이라는 광활한 공간으로 돌아가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세운다. 대신 이번에 한정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점점 먼 과거로 향해야 한다. 첫째로 묘지의 소녀가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작가(톰 윌킨슨)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 든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난 젊은 시절의 작가(주드 로)를 거친 뒤에야 마침내 무스타파가 구스타브의 로비보이였던 어린 시절(이하 제로)의 '이야기'로 진입 할 수 있다. 한 명의 독자(소녀)와, 한 명의 청자(작가), 그리고 한 명의 화자이자 목격자(무스타파)를 거치며, 이미 세 차례 종결된 이야기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 한정된 시간 구성 속에서 전에 없이 스케일 큰 서사를 펼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뿐이다. 틸다 스윈튼, F 머레이 아브라함, 하비 케이틀, 마티유 아말릭, 레아 세이두, 주드 로, 윌렘 대포(그리고 조지 클루니)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캐스트를 채운 배우들은 이야기의 안내자나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신속하고 말끔하게 수행한 뒤 잔상 없이 퇴장한다. 조연들에게 따로 허락된 사연이 없다는 점 또한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시간대에 따라 화면비를 바꾸는 수고이다. (30년대 - 1.37:1, 60년대 - 1.85:1, 80년대 - 2.35:1) 이는 이야기의 중층적 시간 구성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면서 관객이 점점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3차원 적 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에 이야기의 초점이 단 한 명의 인물, 구스타브에 맞춰지면서 그 자체가 소실점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이에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쳐인 1점 투시 촬영과 인물을 중앙에 두고 움직이는 트래킹샷이 서사적으로 구현된다. 전작들이 이야기책이라는 병렬적이고 평면적인 심상을 완성한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확실히 입체로서 완성된다.


5. 20세기 유럽이라는 팝업북

한편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간 구성과는 달리 공간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구스타브와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마치 보드게임 위의 말처럼 호텔, 마담 D.의 저택, 수도원과 감옥, 이 점에서 저 점으로 동선 없이 이동한다. 다시 인공의 세계로 돌아온 웨스 앤더슨이 만든 유럽에 진짜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예쁜 마분지 같은 알프스는 귀엽고, 국경을 지나는 기차는 아무래도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유럽이 당시 유럽의 실제 모습보다는 30년대 헐리웃에서 활동한 동유럽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세트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재현이 아니라 수집과 조립과 상상의 작가라는 걸 관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품 제작을 위한 집요한 고증 따위와는 별개로, 지난 시절을 설득력 있게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그가 성취하려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중층적 시간 구성의 서사가 만들어낸 입체적 공간은 섬세하고 평면적인 미장센으로 채워지게 되고, 결국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한권의 ‘팝업북’으로 완성된다.

이 팝업북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예쁜 그림들과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과 파시즘이라는, 20세기를 양분하는 역사를 담고도 이렇게 팬시한 제품을 내놓아도 되는 걸까? 파스텔톤의 멘들스 케이크 박스가 정의의 중심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파시스트들의 깃발이 내걸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마침내 드미트리 일당과 구스타브 일행이 맞닥뜨리고 총격전이 오갈 때, 멘들스 박스는 총알을 막아주고, 난간에서 떨어지는 제로와 아가사를 받아준다. 역사 속의 거악을 불러내 대처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작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다채롭고 입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도 그 사이즈는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녀의 무릎 위를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까닭에 감탄과 질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말 뛰어난 팝업북이다! 하지만 고작 팝업북을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원: 기억의 재현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기는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독자인 소녀와, 청자인 작가를 지나 관객이 실질적으로 접속하는 시점은 제로, 무스타파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구스타브라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두 말할 것 없이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일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빛을 발한다.

아가사의 첫 등장 장면과 데이트 씬은 앤더슨의 그림들 사이에서 돌출적인 인상을 남긴다. 첫 등장 장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 구시가지의 평범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장면에는 앤더슨 특유의 인공적인 분위기가 전혀 더해져 있지 않다, 대칭도, 평면적이고 회화적인 느낌도 없이 평범한 새벽녘의 차갑고 낮은 채도 속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차가운 공기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겨울의 설산이 배경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찬 공기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이 지나갈 때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무스타파는 아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즉 이 장면은 책 속의 이야기도, 작가에게 전달된 말도 아니라 무스타파의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다.

회전목마에서의 데이트 씬 역시 예외적이다. 화면구성이나 카메라의 동선이나 각을 무척 잘 잡는 앤더슨의 영화에서 동선이 원을 그린다. 그리고 제로에게 낭만 시 선집을 선물 받은 뒤 클로즈업 된 아가사의 얼굴 위로 동그란 색색의 조명들이 둥글게 움직인다.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이 장면들은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시간의 재현을 실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인 순간이다. 제로와 아가사의 사랑에 대한 예외적 취급은 팝업북의 삽화가 묘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퇴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묘지와 대비를 이루며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마분지 세계의 이야기에 일말의 ‘진정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굉장히 완성도 높은 마분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효과이다.


7. 21세기의 걸작?

자, 그래서 잘 만든 팝업북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으로 아름답게 감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인가? 웨스 앤더슨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을까? 촌스러운 질문에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는 진부한 대답만이 기다릴 뿐이다. 다만 지지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 앤더슨이 21세기 초반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21세기 초라는 동시대를 투명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인류는 달에 인간을 보냈지만 오늘 날 인류는 인간을 달에 보낸 컴퓨터보다 수 배 뛰어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보이저 1호가 36년 만에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뉴스를 리트윗하고 잊어버린다. 21세기 대도시의 시민에게는 우주도 감동과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영화는 오죽할까. 극장용 영화 산업은 사실상 100년 전에 발명된 기술인 3D에서 스펙터클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3D 영화야말로 진짜 입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팝업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전까지는 그의 영화제작 방식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동시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으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부터 눈을 돌려 자꾸 과거로 향하는 동시대의 퇴행적 관점 자체를 액자 서사 구조 안에 내재화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미장센과 서사의 구조를 결합함으로서 취향의 영역 바깥에 생성시키는 의미이며,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일 것이다. 소녀가 스킨헤드 풍의 청년이 서있는 무덤 입구를 지나 살풍경한 작가의 묘 옆에서 책을 펼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도입부는 이러한 시대의 적나라한 거울 같은 장면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그것이 기대한 만큼 숭고하거나 충분히 아름답지 않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팝업북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이 그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만큼 위대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가 가장 ‘21세기 적인 방식의 진정성’을 개척해내기를 바란다. 그 역시 난이도로 따져보자면 전에 없이 위대한 과제일 것이다.


* P.S

이제 빛바랜 향수와 함께 무릎 위의 책을 덮고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비석 같은 질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20세기라는 노스탤지어, 혹은 테러나 재해, 불황을 바라보는 생존자의 ‘윤리적 시선’ 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전쟁뿐일까? 중동과 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 영화가 영화제를 점령하게 될 때는 언제쯤 올까? 과연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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