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핀볼 속의 공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는 핀볼 그 자체 같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내지 않는다. 나는 외부의 힘에 반응하며 점수를 쌓아올리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리저리 굴리고 튕기기 위해 상황에 던져버린다. 임의성을 즐긴다고도, 임의성에 의존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보루는 선택의 주체가 나라는 것, 이 게임에 참여하기를 선택하고 이야기를 해석하는 주체가 나라는 것이다.
요즘엔 핀볼 게임의 진행시간이 짧아진 것 같고, 그건 그냥 공으로서의 내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이 연결되고 영감을 받는 순간의 아드레날린의 시효가 짧아졌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해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조정하고 통제하고 관망하는 일이 지겹다. 외부의 욕망과 제약들, 자신의 한계를 이해한 채로 최선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 지겹다. 이제는 무언가를 뚫고 가고 싶다. 정확히 겨눈 말을 내 뱉을 때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들을 나열할 때처럼. 쭉 뻗은 길을 달릴 때처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처럼.
한편, 이런 생각을 할 때 더 이상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구나. 부모님과 따로 살며 월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내게 짐이기만 한 게 아니니까.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애드보커시 특강에서.
그러니까 나는 우리 세대의 공론장의 역동을 생태학적, 진화론적으로 보는 것 같다. 즉 공론장을 소비시장으로 본다는 뜻이다. 정보를 소비, 재생산하는 점들의 네트워크. 좋아요와 해시태그. 나는 이 자기표현/의사표현의 방식이 신좌파나 정체성 정치 같은 것과는 정말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호작용(점수를 올리는 게임과 유사한)에서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공론장은? 정보는 어떻게 조직화되는가.
이 시대에도 리더십과, 퇴보하지 않는 윤리적 규범이 필요할텐데. 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뉴미디어 시대의 교육학 같은 것인 것 같다 ㅠㅠ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다. 준비가 안된 사람에겐 '문제해결'이라는 프레임도 유효하지 않다.
시스템, 제도와 함께 성장한 사람. 그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시장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성장한 사람. 내가 느끼는 세대 격차란 이런 것.
이 시대에도 리더십과, 퇴보하지 않는 윤리적 규범이 필요할텐데. 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뉴미디어 시대의 교육학 같은 것인 것 같다 ㅠㅠ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다. 준비가 안된 사람에겐 '문제해결'이라는 프레임도 유효하지 않다.
시스템, 제도와 함께 성장한 사람. 그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시장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성장한 사람. 내가 느끼는 세대 격차란 이런 것.
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 : 가족, 공간, 세대
온라인 출판 플랫폼 퍼블리에서 글로벌 기본소득 리포트 프로젝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7일까지 진행되는 펀딩에 참여하시면 리포트 본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북미, 유럽, 인도와 나미비아 등 전세계의 기본소득 동향을 살펴보는 글이고 BIYN 운영위원회가 공동집필합니다. 정부, 시민사회, 시장, 국제구호조직 등 다양한 주체의 관점에서 보는 기본소득을 총정리한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아래는 사전에 공개되는 저자소개 글을 위해 제가 쓴 초안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기본소득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아예 다른 주제로 새로 썼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나름대로 제게 의미있게 쓰여져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퍼블리와 함께 쓴 저자소개 글은 프로젝트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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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올해 초 몇 해 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넌 그렇게 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산다”는 게 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대기업에서 일하며 결혼을 곧 앞두고 있었던 친구가 보기에 어딘가 특이해 보이는 삶인 모양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줄 정말 몰랐는데, 남의 눈에는 십 년 전부터 기본소득 같은 의제를 주장하며 NPO에서 일하는 어른이 될 것 같았다니. 하긴 대학 때 거리에서 리플렛 배포하다 만난 다른 동창도 “잘 어울린다! 화이팅!”이라고 응원해 준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체 어떤 애였기에 이런 대답을 듣게 된 것일까. 어느 반에나 한 명씩은 꼭 있고 인터넷에는 바글바글한, 토론수업을 좋아하고 유난스럽게 음악을 듣는 십대였을 뿐이다. 그런 애가 대학에 들어간 뒤 투쟁 현장 언저리를 맴돌거나 화제의 시집을 구입하거나, 고전영화들을 보러 다니는 것은 분명 자연의 섭리보다 강력한 사회의 섭리다.
하지만 졸업 후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경영학을 공부하고, NPO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당사자로서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었다. 매 번 나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 지 하나의 줄거리로 통합하려고 스스로를 위한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때문에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 반갑다. 나는 왜 위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게 되었고, 2016년 추석에 기본소득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한 자기소개를 쓰고 있게 되었을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공동집필 할 리포트에서 우리는 의견보다 사실에 집중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반대로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음껏 써보려 한다.
돌이켜 보면 이후 벌어진 일들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해도, 내가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활에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게 된 것만큼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싱겁게도 역시 친구의 말이 맞다. 조금 호들갑을 떨자면 2005년에 세상의 좋은 음악, 좋은 서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며 고3을 보내고 있을 때부터 2016년 추석에 이런 글을 쓰게 될 운명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1.
내 아버지는 정년을 1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데, 지난 4월 수업을 하던 중 혀의 느낌이 이상해서 곧장 병원 응급실을 찾았더니 뇌에 종양이 있었다. 검사를 더 해본 결과 이 종양은 혈액암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쁜 소식에 여러 감정들이 밀려오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돈 문제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모든 교사들이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으로 재직 중엔 의료비의 80%까지 보장된다고 했다. 긴 직장생활 동안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병가를 낸 채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나, 동생은 큰 걱정 하나를 내려두고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걱정이 컸던 만큼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대단한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것이 혜택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누구라도 일하다 아프면 생계 위험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큰 병으로 인해 빈곤에 빠지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이 정도는 누구나 누리는 게 당연하지”와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경험은 자주 있는 일이다. 대학 때 만난 지방출신 친구들 몇은 서울에 사는 내게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같은 시기 한편에서는 “너는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에 서울이 아니라 “압구정”이나 “도곡동”이라고 답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대화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에 상계동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서울애인 나는 이런 저런 상대평가의 격차를 느낄 때마다, 내가 누리는 삶의 수준에 대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 두 가지는 우리 가족에게 20년 넘게 살아 온 집이 있다는 것과 은퇴 후 교사인 아버지의 연금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 후 자립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이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부모 부양의 부담을 차치하고 일단은 스스로의 삶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 아닌 가정,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면 되는 인생. 엎드려 절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 바랄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중요한 점은 ‘충분한 삶’은 특권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했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나와 달리 제 인생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또래들도 아주 아주 많이 있었다.(두 번의 강조도 모자라다)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내 생각에 이 정도 삶의 조건이 행운의 영역에 있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였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더 짧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했다. 완전한 자유는 어불성설이더라도, 협상의 여지 정도는 있어야 했다.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 첫 번째가 여기에 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우리가정에 가져다 준 혜택을 체감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알았으며, 이 정도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은퇴자에게 연금을 보장하고 모든 가구에 집을 주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가정 사정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생계유지 이상의 목적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생활기반의 최저선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 정책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달성할 수 있다. 왜 국민연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사회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장이 아니라 굳이 기본소득인지는 아래 차차 더 드러나게 써 볼 예정이다.
2.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상대평가적인 표현을 쓸 때면 어색하다. 기준이 하나이고, 그 기준으로 상하 위계를 만드는 것이 이상하고, 종종 정보를 단순하게 왜곡하며, 그것이 사회에서 권력 기제로 작동하기까지 하면 옳지 못한 것이 된다. 특히 누가 돈이 더 많고 적다거나, 일을 (질과 상관없이) 더 싼 값에 빠르게 끝낸다거나, 어떤 여자가 더 날씬해서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평가는 매일 들어도 매일 이상하다.
최근 든 생각인데, 위와 같은 공정성에 대한 기준은 (가족과 성격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정도 내가 자라온 공간에 의해 형성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 살 때부터 노원구에 있는 상계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총 4만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지하철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가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동네에선 다른 종류의 집을 볼 일이 없다. 집뿐이 아니다. 상가도 학교도, 공원도 대칭 구조로 비슷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현관문 안쪽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사정이 다 달랐을 테고, 실제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좀 더 ‘의미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성장기에는 방이 두 칸이건 세 칸이건 화장실은 한 개인 집에 살고 같은 놀이터에 모여 노는 비슷비슷 형편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마포로 놀러 다니고, 강남으로 출근해보기도 하고, 산도 있고 강도 있는 용산에 4년 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서로 빈부격차를 느낄 일 없는 또래들이 함께 사는 평범한 환경이 보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상계동 아파트단지는 내게 생활공간의 준거점이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하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 말한 것처럼 상대평가에 어색함을 느끼는 감각. 미색의 페인트가 칠해 진 큰 벽을 보면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격차와 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두 번째 까닭은 이것이다. 공감할 수 없는 가치체계와 별개의 가치체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게 기본소득과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회안전망 정책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질 것 같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부합하는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피고용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이 보장받는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육아수당 같은 현금지급정책들은 특정한 생애주기나 가구형태를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질적인 가치의 추구는 아무리 보편성을 추구한다 해도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에는 수급 조건이 없고 사용처에 제한도 없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소비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국가나 시장이 요구하는 가치체계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들이 신념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개인에게는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5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환경의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 적합한 ‘유연한 사회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더 설명하겠지만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사회안전망은 한국에 꼭 필요한 것이다.
3.
나는 87년생이다. 2010년대의 어린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90년대의 어린이들은 한 국역사 가장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했다. 6, 7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흰 쌀 밥이 없어서 보리밥을 먹고, 바나나가 너무 비싸서 못 사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2010년대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때는 시판 샐러드 드레싱이 없어서 마요네즈 묻힌 사라다를 먹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8,9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또 나와 같은 2000년대의 청년들은 8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억압적인 독재정권에 항거해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2006년에 00학번의 입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친미 정서와 통일문제라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요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가 파산해서 미처 복지제도는 못만들고 대신 대학생들에게 신용카드를 뿌린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서 ‘잉여’니 ‘삼포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말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헬조선’같은 단어가 없던 때에도 한국은 항상 어딘가 좀 모자란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의무적으로 구독하던 소년조선일보 1면에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 어린이들의 체험수기 연재가 있었다. 한국인 부모와 달리 미국인 부모는 극장 요금을 적게 내기 위해 자녀의 나이를 속이지 않는다거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은데도) 양말을 기워 신더라는 소소한 교훈들이 실리곤 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외관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선진국의 시민의식과 혁신과 복지 등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이런 결핍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정부복지지출액과 노조가입율과, 시민들의 정치참여율과, 청년 창업율과, 학술서 번역과 아무튼 끝도 없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해외연수는 제일 많이 가는 나라 아닐까? 빠르게 해외 레퍼런스를 카피하는 능력은 여러 부작용을 낳지만 한국의 경쟁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정량적 지표에 대한 목표를 달성함으로서, 눈에 보이는 부유함을 카피하려 노력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었다 해도 복지는 그렇지 않다. ‘삶의 질’이나 안정성, 행복 등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더러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복지의 역사가 빈민 구제부터 시작하면 길게는 2세기에 이르고 적어도 1950년대부터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의 한국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한국의 복지는 정부의 발전주의적 기조에 따라 경제성장을 위해 투자하고 남은 예산을 빈곤층에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잔여적 복지체제이고, 그나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도 채 20년이 못된다.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정책가들은 있지만, 이를 실행 하기위한 정치적 지지 세력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복지모델을 카피하는 것은 어렵고, 적합하지도 않다. 기본소득은 실행까지 정치적 비용이 필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장 간단한 복지정책이다.(특히 한국처럼 주민번호등록이 잘 되어있고 빠르고 통합적인 전산화를 구축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 방법이나 다른 정책과의 연결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대안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에 나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사회안전망을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리포트에서 살펴보겠지만 각 국가의 기본소득에 대한 접근 방식은 모두 다르며, 이를 비교해보는 작업은 국내에서의 접근법을 개발하기 위한 의미있는 내용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 세대로서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이다. 앞서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에 대응하는 미션이 있다면 바로 가정을 넘어 사회적 보호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핵심 의제가 될 수 있다.
0.
나 개인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쩐지 직업병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청년으로서 청년 세대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내가,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지난 4년 간의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오늘 날 청년들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존재로서, 사회의 잉여나, 무엇을 포기한 존재로 스스로를 주변화 시키는 데 익숙하고, 부정의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모순에 빠져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취약화 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나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안전하고 유연한 사회를 위한 ‘충분한 기본소득’을 요구함으로서 이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청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제시함으로서 자원을 집중시키려 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목표를 가진 주체로서 자원을 요구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나 '흙수저'같이 빠르게 유통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이상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동력이 내가 가진 것들, 소중한 개인적인 기억들, 그리고 약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내가 그러했듯 누구나 개인적인 의미에서부터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공통의 목표를 갖게 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게 기본소득 운동의 멋진 점이다. 읽고 나면 향후 몇 년 간 진행 될 이 멋진 과정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들 만한 ‘팩트 중심의 리포트’를 약속하며 글을 마친다.
북미, 유럽, 인도와 나미비아 등 전세계의 기본소득 동향을 살펴보는 글이고 BIYN 운영위원회가 공동집필합니다. 정부, 시민사회, 시장, 국제구호조직 등 다양한 주체의 관점에서 보는 기본소득을 총정리한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아래는 사전에 공개되는 저자소개 글을 위해 제가 쓴 초안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기본소득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아예 다른 주제로 새로 썼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나름대로 제게 의미있게 쓰여져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퍼블리와 함께 쓴 저자소개 글은 프로젝트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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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몇 해 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넌 그렇게 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산다”는 게 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대기업에서 일하며 결혼을 곧 앞두고 있었던 친구가 보기에 어딘가 특이해 보이는 삶인 모양이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 줄 정말 몰랐는데, 남의 눈에는 십 년 전부터 기본소득 같은 의제를 주장하며 NPO에서 일하는 어른이 될 것 같았다니. 하긴 대학 때 거리에서 리플렛 배포하다 만난 다른 동창도 “잘 어울린다! 화이팅!”이라고 응원해 준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체 어떤 애였기에 이런 대답을 듣게 된 것일까. 어느 반에나 한 명씩은 꼭 있고 인터넷에는 바글바글한, 토론수업을 좋아하고 유난스럽게 음악을 듣는 십대였을 뿐이다. 그런 애가 대학에 들어간 뒤 투쟁 현장 언저리를 맴돌거나 화제의 시집을 구입하거나, 고전영화들을 보러 다니는 것은 분명 자연의 섭리보다 강력한 사회의 섭리다.
하지만 졸업 후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경영학을 공부하고, NPO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당사자로서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이었다. 매 번 나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 지 하나의 줄거리로 통합하려고 스스로를 위한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때문에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주어져 반갑다. 나는 왜 위와 같은 과정들을 거치게 되었고, 2016년 추석에 기본소득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한 자기소개를 쓰고 있게 되었을까?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공동집필 할 리포트에서 우리는 의견보다 사실에 집중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반대로 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음껏 써보려 한다.
돌이켜 보면 이후 벌어진 일들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해도, 내가 모두에게 조건 없이 생활에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게 된 것만큼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싱겁게도 역시 친구의 말이 맞다. 조금 호들갑을 떨자면 2005년에 세상의 좋은 음악, 좋은 서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며 고3을 보내고 있을 때부터 2016년 추석에 이런 글을 쓰게 될 운명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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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정년을 1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데, 지난 4월 수업을 하던 중 혀의 느낌이 이상해서 곧장 병원 응급실을 찾았더니 뇌에 종양이 있었다. 검사를 더 해본 결과 이 종양은 혈액암에서 전이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쁜 소식에 여러 감정들이 밀려오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돈 문제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모든 교사들이 자동으로 가입되는 보험으로 재직 중엔 의료비의 80%까지 보장된다고 했다. 긴 직장생활 동안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병가를 낸 채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나, 동생은 큰 걱정 하나를 내려두고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걱정이 컸던 만큼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대단한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것이 혜택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누구라도 일하다 아프면 생계 위험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큰 병으로 인해 빈곤에 빠지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이 정도는 누구나 누리는 게 당연하지”와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경험은 자주 있는 일이다. 대학 때 만난 지방출신 친구들 몇은 서울에 사는 내게 부모님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같은 시기 한편에서는 “너는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에 서울이 아니라 “압구정”이나 “도곡동”이라고 답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대화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에 상계동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서울애인 나는 이런 저런 상대평가의 격차를 느낄 때마다, 내가 누리는 삶의 수준에 대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 두 가지는 우리 가족에게 20년 넘게 살아 온 집이 있다는 것과 은퇴 후 교사인 아버지의 연금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 후 자립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이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부모 부양의 부담을 차치하고 일단은 스스로의 삶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 아닌 가정,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면 되는 인생. 엎드려 절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 바랄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중요한 점은 ‘충분한 삶’은 특권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했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나와 달리 제 인생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또래들도 아주 아주 많이 있었다.(두 번의 강조도 모자라다)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내 생각에 이 정도 삶의 조건이 행운의 영역에 있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였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더 짧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했다. 완전한 자유는 어불성설이더라도, 협상의 여지 정도는 있어야 했다.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 첫 번째가 여기에 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우리가정에 가져다 준 혜택을 체감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알았으며, 이 정도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은퇴자에게 연금을 보장하고 모든 가구에 집을 주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가정 사정이 어떻든 간에 누구나 생계유지 이상의 목적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생활기반의 최저선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 정책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달성할 수 있다. 왜 국민연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사회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장이 아니라 굳이 기본소득인지는 아래 차차 더 드러나게 써 볼 예정이다.
2.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상대평가적인 표현을 쓸 때면 어색하다. 기준이 하나이고, 그 기준으로 상하 위계를 만드는 것이 이상하고, 종종 정보를 단순하게 왜곡하며, 그것이 사회에서 권력 기제로 작동하기까지 하면 옳지 못한 것이 된다. 특히 누가 돈이 더 많고 적다거나, 일을 (질과 상관없이) 더 싼 값에 빠르게 끝낸다거나, 어떤 여자가 더 날씬해서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평가는 매일 들어도 매일 이상하다.
최근 든 생각인데, 위와 같은 공정성에 대한 기준은 (가족과 성격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정도 내가 자라온 공간에 의해 형성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 살 때부터 노원구에 있는 상계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총 4만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지하철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가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동네에선 다른 종류의 집을 볼 일이 없다. 집뿐이 아니다. 상가도 학교도, 공원도 대칭 구조로 비슷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현관문 안쪽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사정이 다 달랐을 테고, 실제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좀 더 ‘의미 있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성장기에는 방이 두 칸이건 세 칸이건 화장실은 한 개인 집에 살고 같은 놀이터에 모여 노는 비슷비슷 형편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마포로 놀러 다니고, 강남으로 출근해보기도 하고, 산도 있고 강도 있는 용산에 4년 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서로 빈부격차를 느낄 일 없는 또래들이 함께 사는 평범한 환경이 보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상계동 아파트단지는 내게 생활공간의 준거점이지만 이러한 특수성이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하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 말한 것처럼 상대평가에 어색함을 느끼는 감각. 미색의 페인트가 칠해 진 큰 벽을 보면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격차와 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
내가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두 번째 까닭은 이것이다. 공감할 수 없는 가치체계와 별개의 가치체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게 기본소득과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회안전망 정책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질 것 같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부합하는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피고용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이 보장받는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육아수당 같은 현금지급정책들은 특정한 생애주기나 가구형태를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질적인 가치의 추구는 아무리 보편성을 추구한다 해도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에는 수급 조건이 없고 사용처에 제한도 없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소비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국가나 시장이 요구하는 가치체계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들이 신념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개인에게는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5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환경의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 적합한 ‘유연한 사회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더 설명하겠지만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사회안전망은 한국에 꼭 필요한 것이다.
3.
나는 87년생이다. 2010년대의 어린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90년대의 어린이들은 한 국역사 가장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했다. 6, 7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흰 쌀 밥이 없어서 보리밥을 먹고, 바나나가 너무 비싸서 못 사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2010년대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때는 시판 샐러드 드레싱이 없어서 마요네즈 묻힌 사라다를 먹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8,90년대 어린이었던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또 나와 같은 2000년대의 청년들은 80년대에 청년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는 억압적인 독재정권에 항거해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에서 피흘리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2006년에 00학번의 입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친미 정서와 통일문제라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요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가 파산해서 미처 복지제도는 못만들고 대신 대학생들에게 신용카드를 뿌린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서 ‘잉여’니 ‘삼포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말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헬조선’같은 단어가 없던 때에도 한국은 항상 어딘가 좀 모자란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의무적으로 구독하던 소년조선일보 1면에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 어린이들의 체험수기 연재가 있었다. 한국인 부모와 달리 미국인 부모는 극장 요금을 적게 내기 위해 자녀의 나이를 속이지 않는다거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은데도) 양말을 기워 신더라는 소소한 교훈들이 실리곤 했다. 한국은 어느 정도 선진국의 외관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선진국의 시민의식과 혁신과 복지 등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이런 결핍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정부복지지출액과 노조가입율과, 시민들의 정치참여율과, 청년 창업율과, 학술서 번역과 아무튼 끝도 없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해외연수는 제일 많이 가는 나라 아닐까? 빠르게 해외 레퍼런스를 카피하는 능력은 여러 부작용을 낳지만 한국의 경쟁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정량적 지표에 대한 목표를 달성함으로서, 눈에 보이는 부유함을 카피하려 노력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었다 해도 복지는 그렇지 않다. ‘삶의 질’이나 안정성, 행복 등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더러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복지의 역사가 빈민 구제부터 시작하면 길게는 2세기에 이르고 적어도 1950년대부터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의 한국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한국의 복지는 정부의 발전주의적 기조에 따라 경제성장을 위해 투자하고 남은 예산을 빈곤층에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잔여적 복지체제이고, 그나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것도 채 20년이 못된다.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정책가들은 있지만, 이를 실행 하기위한 정치적 지지 세력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복지모델을 카피하는 것은 어렵고, 적합하지도 않다. 기본소득은 실행까지 정치적 비용이 필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가장 간단한 복지정책이다.(특히 한국처럼 주민번호등록이 잘 되어있고 빠르고 통합적인 전산화를 구축한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재원 조달 방법이나 다른 정책과의 연결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대안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에 나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사회안전망을 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리포트에서 살펴보겠지만 각 국가의 기본소득에 대한 접근 방식은 모두 다르며, 이를 비교해보는 작업은 국내에서의 접근법을 개발하기 위한 의미있는 내용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우리 세대로서 필연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까닭이다. 앞서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에 대응하는 미션이 있다면 바로 가정을 넘어 사회적 보호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핵심 의제가 될 수 있다.
0.
나 개인에 대한 글을 써보겠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쩐지 직업병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청년으로서 청년 세대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내가,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지난 4년 간의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오늘 날 청년들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존재로서, 사회의 잉여나, 무엇을 포기한 존재로 스스로를 주변화 시키는 데 익숙하고, 부정의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모순에 빠져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취약화 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나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안전하고 유연한 사회를 위한 ‘충분한 기본소득’을 요구함으로서 이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청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제시함으로서 자원을 집중시키려 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목표를 가진 주체로서 자원을 요구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나 '흙수저'같이 빠르게 유통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이상 ‘나의 기본소득 운동’의 동력이 내가 가진 것들, 소중한 개인적인 기억들, 그리고 약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내가 그러했듯 누구나 개인적인 의미에서부터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공통의 목표를 갖게 되고, 각자 자기 자신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게 기본소득 운동의 멋진 점이다. 읽고 나면 향후 몇 년 간 진행 될 이 멋진 과정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들 만한 ‘팩트 중심의 리포트’를 약속하며 글을 마친다.
라벨:
기록,
기본소득,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백희원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중2는 기본권
요즘 나 자신에 대해서 내 좋을대로 설명하고 싶은 욕구가 되게 크다. 나 자신에 대해 설명이 요구되는 순간에 그러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 대한 말이 계속 생산된다는 얘기임.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오류만큼이나 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오류도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반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이루어진 윤리는 약간 존재를 위협함.
남들이 그러는 걸 보는 게 좀 불편해서 나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남사스럽게 여기고 꺼려왔는데 최근에는 그냥 이건 좀... 일종의 기본권처럼 느껴짐.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자신에 대해 스스로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설명하고 싶다면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내 뜻대로 설명하고자 시간을 들이는 게 죄악이 아니야. 타인들을 부정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오류만큼이나 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오류도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반면교사와 반면교사로 이루어진 윤리는 약간 존재를 위협함.
남들이 그러는 걸 보는 게 좀 불편해서 나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남사스럽게 여기고 꺼려왔는데 최근에는 그냥 이건 좀... 일종의 기본권처럼 느껴짐.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자신에 대해 스스로 규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설명하고 싶다면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내 뜻대로 설명하고자 시간을 들이는 게 죄악이 아니야. 타인들을 부정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트위터에 성폭력 경험에 대한 용기있는 진술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일련의, 유사한 패턴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지난 경험들 몇 가지가 성폭력이거나 그럴 위험에 처했던 '사건'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들을 말하는 데 나에겐 별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인지한 뒤에도 별 일 아닌 사건들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운 좋게도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심각한 물리적 폭력은 동반되지 않았고, 그들이 내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일들이어서 그런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달은 것이다.
늘 나오는 얘기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고 친구거나 동료였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는 이상함을 분명히 감지했음에도 모르는 채 넘어갔다.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서서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약자이지만,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잘못을 알려주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이유로 어렸던 나의 유연함과 관용, 사람에 대한 신뢰를 후회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잘 지켰던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여기고 지내왔던 사람에게 (사람을 그 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만져보거나, 찔러보거나, 지배하기 위한 여체로 대상화되는 순간의 기분은 형언하기 어렵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잊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름도, 의미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 경험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사실은 그때 더럽다고 느꼈다. 사실은 그때 눈 앞의 사람이 어쩌면 나쁜 사람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나는 제대로 판단하고, 나를 지지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번에 나와 나의 동료 여성들에게 유사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빠르게 인식하고 단호함으로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말 신기하다.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눈치없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아마 2,3년 전에만 깨달았어도 자책이 심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바보같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도. 지금은 앞에 적었듯, 나의 좋음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내가 여성 시민들의 연대를 실감하고, 내 안에도 피해자/생존자를 지지하는 마음이 뚜렷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시적 의미의 공동체가 아닌) 사회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식으로 개인을 지지해주는 거구나, 정말 처음으로 실감해보는 것 같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 우리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사건들을 말하는 데 나에겐 별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인지한 뒤에도 별 일 아닌 사건들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운 좋게도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심각한 물리적 폭력은 동반되지 않았고, 그들이 내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일들이어서 그런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달은 것이다.
늘 나오는 얘기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고 친구거나 동료였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는 이상함을 분명히 감지했음에도 모르는 채 넘어갔다.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서서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약자이지만,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잘못을 알려주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이유로 어렸던 나의 유연함과 관용, 사람에 대한 신뢰를 후회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잘 지켰던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여기고 지내왔던 사람에게 (사람을 그 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만져보거나, 찔러보거나, 지배하기 위한 여체로 대상화되는 순간의 기분은 형언하기 어렵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잊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름도, 의미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 경험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사실은 그때 더럽다고 느꼈다. 사실은 그때 눈 앞의 사람이 어쩌면 나쁜 사람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나는 제대로 판단하고, 나를 지지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번에 나와 나의 동료 여성들에게 유사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빠르게 인식하고 단호함으로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말 신기하다.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눈치없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아마 2,3년 전에만 깨달았어도 자책이 심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바보같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도. 지금은 앞에 적었듯, 나의 좋음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내가 여성 시민들의 연대를 실감하고, 내 안에도 피해자/생존자를 지지하는 마음이 뚜렷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시적 의미의 공동체가 아닌) 사회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식으로 개인을 지지해주는 거구나, 정말 처음으로 실감해보는 것 같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 우리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7/15 올라온 조성주씨의 기본소득 반대 글을 빌미로, 진보진영에서 자주 보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폄하적 레토릭에 대해
정의당 조성주 씨가 당 내에서 기본소득을 검토중이라며 자신은 이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페북에 밝혔다.
스위스 국민투표, 이재명 성남시장, 김종인 더불어 민주당 대표를 거치며 기본소득이 "유행"(언젠가 버려질 거란 뜻이다)의 길을 걷기 시작한 듯한 지금, 솔직히 좀 반가운 말이다.
예컨대 올해 초 토론 자리에서 서로 다른 입장으로 만난 한 청년 활동가는 자신이 정책설계과정에 참여한 서울시 청년수당이 기본소득을 지향하고, 자신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말을 해서 현장의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환영 받았는데(당연히 그 뒤에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딱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기 보단...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유보처럼 보였는데), 솔직히 논의를 무척 비생산적인 프레임 땅따먹기로 만들어버려서 좀 실망스러웠다. 그 기저에 있는 심리는 조성주 씨의 글에 너무 잘 묘사되어 있다.
<<내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의 설계자체에 큰 이견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게 된 배경에 의구심이 더 강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의당이 기본소득을 검토하게 된 이유도, 서로가 더 진보적이라고 경쟁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진보진영 내부가 언제부턴가 기본소득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도 결국은 선명성 경쟁이나 이슈선점의 의도가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보수정당들을 말하지 못하는(때로는 다른 진보정당은 말하지 못하는)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강박.">> (이하 인용 <<>>표시)
동의한다. 제발 하겠다고 한 거나 잘 했으면. 정책 좀 이슈메이킹 불쏘시개로 갖다 쓰고 버리는 짓 좀 그만했으면.
그리고 이 외에는 의문이다.
1.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다른 복지정책 도입을 방해하는가?
조성주 씨는 기본소득보다 사회안전망의 획기적인 강화, 노동시장 내의 불평등의 완화, 복지체제의 확충 등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납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음의 의문이 든다.
한국의 복지담론 지형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은 기존의 사회보험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미국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복지정책의 양적 수준이 턱 없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다른 복지정책을 위협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가장 큰 효과는 공공부조의 획기적인 확대와 정규직 비정규직 간 소득격차 및 사회안전망 격차의 완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찬반을 구하지 않고 사회안전판을 구성하는 좋은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낙관적 가능성으로 인해, 여타 "시급한" 복지정책이 도입 될 순서(?)를 새치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음 글쎄. 북유럽 '강소국가'가 참여정부에 의해 롤 모델로 상정되고 복지국가 담론이 개진된 지도 어언 10년이고, 무상(보편)급식 논의 이후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었지만, 획기적인 강화와 확충은 없었다. 증세에 대한 논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순서는 증세가 우선이라고 생각된다.
현 시점에서 나는 기본소득이 증세논의의 트리거로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40만원? 5,000만명이면 1년 재원 240조? 계산이 쉽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처럼 모른 척 넘어갈래야 못 넘어간다. 김종인 같은 정치인이 기본소득 얘기를 해서 반가운 거 딱 하나다. 그 정도 권력자에겐 증세의 책임도 끝까지 물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기본소득이 국가 주체의 공공서비스 및 복지를 현금 지급으로 대체함으로서 시장을 강화한다는 사고는, "정부"와 "시장"이라는 주체 중심의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복지 영역에서 한국정부는 적게 지급하면서 (시민을) 많이 통제하는, 서구중심의 이론으로 보면 기이한,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친숙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사고틀이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한국에서 공공서비스와 복지정책이 강화될 경우 그만큼 시민을 보호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적 상황을 인정한다면 "기본소득"처럼 국가가 시민에게 충분히 지급하면서 시민을 적게 통제하는 정책은 "공공을 시장화"하는 것과 또 다른 효과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장 혹은 노, 사, 정 구조에 대한 메타포 외에 정책이 "현장"에 적용될 때 개인, 조직, 지역, 시장, 국가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인데, 경험 상 (특정 부류의)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를 더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2.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고민이 낭만적인 고민인가?
<<4.13총선 당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들과 한 토론회에 나간적이 있다. 상호질문 시간이었는데 한 진보정당의 후보가 내가 주장하는 특수고용직 및 실업자까지 포함하는 고용보험의 획기적인 확대 등을 두고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고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솔직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 사람들에게 <실업>이란 것은 '꿈을 키우며 살고 싶어요',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따위로 이야기 될 만큼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실업에 대한 대책도 결코 아름답거나 예쁘지 않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한 정당의 대표로 토론회에 나온 상대 후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은 그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에 대한 예의다"라고 한 한 후배의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배 때문에 정치하면서 조만간 화병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실업안전망의 확대를 주장하면 선별복지가 되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현금'으로 주는 것이 '보편적 복지'라는 것인가? 아직 진보진영의 복지관련 논의가 고작 이정도 수준에 머물러있다. 아니 돌아보면 선별복지/보편복지라는 프레임 자체가 진보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 부분에 등장하는 '선별적 복지'라는 워딩은 내가 봐도 별로 적절치 않다. 몇 가지 변호할 거리가 좀 있긴 한데 각설하고, 실업문제랑 일에서의 자아실현의 문제가 왜 충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얘기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지도 모르겠다. 서로서로 별 관련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실업 문제는 심각하다. 자기돌봄 없는 노동환경도 심각하다. 무식하게 구분하면 전자는 경제적 문제고 후자는 문화적 문제다. 이 둘의 해결 방법은 별개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어야 할텐데,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공급과잉의 노동시장에서 하고싶은 일을 찾아 직장을 때려치기의 리스크가 크다고 하기는 힘드니까.
그런데 왜 이 두 문제가 충돌하지? 차라리 상호보완적이지 않나? 억지로 끼워맞춰 보건대, "해고는 살인"인 구조조정 현장의 노동자들, 하청업체 파견직 노동자들과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어요"라고 폼재며 일을 때려치는 3%의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이미지로 "현장"(당사자라는 단어로 대체 가능할 듯)을 구분하고 계시나? 전자의 냉혹한 현실은 모르면서 "꿈"이라는 한가한 얘기나 한다고? "실업안전망 확충"보다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분연히 화를 참으신 걸까?
'생존'과 '자아실현' 중 뭐가 중요하냐고 하면 아무래도 전자인데, 그렇다고 후자는 감히 전자와 나란히 논의되어서는 안되는 건가 하면 좀 애매하다. 그리고 애초에 남의 티끌만한 고통이라도 "낭만적"인 것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은 자유지만 말로 뱉은 이상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일을 하면서 "갑질"을 요구받는 게 너무 괴로워서, 조직문화가 힘들어서, 야근 때문에 매일 울고, 면역체계가 망가져서 여기저기 아프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지속한다. 이 문제는 "현장"이 아닌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말할 것도 없이 실업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지지자들로부터 "꿈"처럼 "아름답고 예쁜"(나는 이 한정사가 어느 정도 "윤리적으로 옳은"으로 등치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에는 든다. 역설법의 용법으로 쓰는 건 이해가 안가지만) 욕망이 생존, 노동권과 같은 당위보다 먼저 나온 것은 이에 대한 욕망이 "현장"에 많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치적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에 대한 바람으로 실업안전장치를 사회에 도입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왜 이것이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고민이라고 이상하게 폄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족 - 개인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요인을 모처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전교조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행동해야 할 시민의 의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친구가 북한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부생 시절 죄책감 반 책임감 반으로 이런 저런 투쟁현장에 뜨내기처럼 참여했지만 연대에 충분은 없었고, 공권력의 폭력 앞에 무력감을 느꼈고, 당사자들에게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무엇이 되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의식과잉이라 그런 게 맞지만 아무튼간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당신의 고통을 이해해?'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는 나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고, 그는 그의 처지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 분들과 대화했을 때 나는 내가 나를 위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힘이 기초생활수급자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았고 더불어 그들에게도 자기 자신만이 아는, 생존 이상의 다양한 욕구가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청년, 노인, 실업자, 노동자, 장애인, 비장애인, 여성, 부모, 자녀 etc 각자가 최선의 삶을 지향하며 기본소득에 합의할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현장에서 "낮은 곳에 임한 나" 뽕에 취한 사람들도 너무 많이 봤다. 나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고 이 편이 내게는 훨씬 윤리적인 선택이었다.)
3.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정의당은 천호선 전 대표 시절에 '복지국가 선도정당', '비정규직 정당'이라는 당의 노선을 정립한 바 있다. 좀 투박하고 별로 세련되지도 또 급진적이거나 상상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노선은 여전히 저 두 슬로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소 투박하고 재미없어도 된다. 우리가 대변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지루하고 투박하고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
복지국가는 "투박하고 재미없"으면 기본소득은 세련되고 재미있나? 뭐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기본소득 활동 4년 하면서 진영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받는 멸시가 바로 이것이다. 뭐랄까. 팬시해보인다는? 심지어 기본소득 지지자들 안에서도 이런 종류의 멸시를 받는다. 주로 "힙스터"라는 비아냥을 자주 들었는데, 뭐... 정말로 딱히 할 말이 없다. 힙스터가 아니기도 하고... 힙스터가 욕도 아니고... 안 투박하고 안 재미없다는 데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대문자 진정성...안 아쉬워... 안 사요...
다만 내가 기본소득 강의 할 때 마다 꼭 하는 말은 "기본소득은 쉽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한 마디로 모두에게 조건없이 매달 돈을 준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이고, 사실 이것만 알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바로 이 논의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 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전염성이 높은 아이디어이고, 그래서 국가개조, 정책설계 어쩌고보다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이 재미에서부터 말 걸기를 시도해왔다. 효과적인 캠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 오프 상시 진행해 온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캠페인이 있다. 청소년은 저축을 하고, 엄마는 이혼하고, 알바노동자는 롯데리아를 그만둔다고 했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가정해보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잘 인지 못하는 욕망 아닌지. (특히 2번째) 재미있다.
하지만 좌파, 생태, 급진 언저리에서 재미를 고려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기만 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 전 열린 국제대회에 독일 마인 그룬트아인코멘 프로젝트 담당자 아미라 예히아(http://h21.hani.co.kr/ar…/special/special_general/42038.html)를 초청하는 데도 그것이 재밌는 이벤트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이유로 수 차례 반대에 부딪혔다. 우리의 입장은 사실 재미있다기보단 진지하고 간단했는데, 기술을 적극 사용하는 방법론이 참조할만하고, 국가 차원, 지역 차원의 기본소득 실험이 중요한만큼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실험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미라는 기대대로 다양한 사례를 이야기해주었고 한겨레에서 기사로 발행되어 많은 공감을 얻었다.
4. 그 외 이상한 인과관계를 전제하는 표현들에 대해.
- 사는 게 쉽고 생각이 없어서 "재미있고" 낙관적인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악에 있다고 차악을 지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
- 단순한 게 꼭 오류가 많다고 할 수 없고, 지름길이 틀린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점진적인 로드맵이 더 실현가능성 높은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그냥 잘못된 시각화인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투박함"과 "재미없음"은 당위와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글쓴이의 미감이 좀 별로라는 것만 누설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약간은 인신공격이지만... 취향 따위 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 단순한 게 꼭 오류가 많다고 할 수 없고, 지름길이 틀린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점진적인 로드맵이 더 실현가능성 높은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그냥 잘못된 시각화인 것 같다.
- 마지막으로 "투박함"과 "재미없음"은 당위와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글쓴이의 미감이 좀 별로라는 것만 누설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약간은 인신공격이지만... 취향 따위 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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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좀 처럼 할 기회가 없던 내용을 담아 기본소득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리고 진보진영 내의 이러한 반대가 기본소득을 실현가능하도록 벼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일찍 자야하는데. 망원동 동경 커피 카페인 효과 최상급...
<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심포지엄 토론문
올해 3월 시립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가하여 발제한 글입니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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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토론문
1. 문제적 주체 :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의 정치적 한계와 가능성
청년세대를 지시해 온 단어들은 오늘 날 청년들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잘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문제들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돈이 없지만(88만원 세대),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그들의 부모세대에 종속되어있으며(에코세대), 부모세대와 같은 ‘정상적 4인가족’의 생애주기를 포기해야 하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욕망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삼포세대)
최근 JTBC에서 보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22.6%), 2위는 건물주와 임대업자(16.1%)였다. 명문대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는 얘기는 신기한 뉴스도 아니다. 청년기, 청소년기는 보통 가장 도전적인 시기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오늘 날 이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안정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소득 불안정성, 낮은 취업률, 노동시장 이중화의 심화와 계층이동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높은 주거비용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맥락을 더하고 싶다. 청년 세대가 한국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증언컨대, 우리 세대의 성장기는 사회가 퇴보하는 역행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이후 태어나 IMF 이후의 사회에서 자립해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단 맛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시기는 짧았다. IMF의 개입으로 정규직 일자리 시스템이 깨지면서 가정의 붕괴도 함께 경험해야 했다. 삶의 회복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사회는 새로운 규칙에 맞춰 빠르게 재조직화 된 결과 밀레니엄을 지나며 위기는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눈에 드러나면서 통일의 대업도 사반세기 내에 이루어질 것 같았다. 한일 월드컵이라는 대형 이벤트는 폭발적으로 사기를 드높이며 ‘광장’을 호출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에 진출했다. 정권 교체 후 광장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0년이 되었을 때, 천안함 사건과 전례 없는 연평도 포격이 있었다. 머리 크고 처음으로 당선을 지켜 본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진보정당은 분열했고 통합진보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경제발전, 민주주의, 평화. 어떤 가치도 성공하는 걸 경험하지 못한 채, 또래들과 조직화 할 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세대의 내면이 냉소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희망은 세계화의 흐름과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빠른 확장 덕분에 문화적 다양성을 누린 세대라는 것이다. 적어도 컨텐츠 소비의 측면에서는 선진국과 시간 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시대이다. 또한 한국의 청년세대는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데 아무튼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목적보다는 수단으로서의 배움이었고, 시험에서 얕게 활용되고 말 뿐 실질적으로 축적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은 청년 세대 일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직장과 가정에만 충성하기 보다는 자아실현을 꿈꾸고, 동질한 사회구성원이 되기를 요구하는 집단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체들이 등장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에도 평생직장을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삼포세대’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이나 직장보다 자아실현의 권리에 집중하는 욕망이 정치적 동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여태까지 정치적 주체로 조명 받지 못한 도시 청년 여성은 자아실현의 욕망을 강하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직장에 잔존해 있는 구시대적인 위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해 점화 된 페미니즘 열풍이 데이트 폭력, 몰카 외에도 여성의 일할 권리와 가사 및 육아분담을 적극적인 의제로 삼고 있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높은 취업이민율과 ‘이민계’도 많은 청년들이 한국사회에선 실현될 수 없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청년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득불안정성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회의주의가 결합되면서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을 지향하고 있고 사회에서도 기성 세력에 대한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역동성의 감소는 경제적으로는 불황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의 청년 복지가 갖는 의미는 ‘불쌍한 청년’의 지원이라기보다 사회를 위한 투자이다. 즉, 청년을 위한 사회안전망이자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다시 공무원, 건물주 임대업자란 장래희망을 떠올려 보면, 안정성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자율성의 욕망을 짐작할 수 있다. 건물주 임대업자라고 대답한 청소년에게는 사실 소득이 확보된 이후 정말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래희망이 있을 것이다. 투자로서의 청년복지는 바로 이 진정한 장래희망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 이 사회적 약속을 해내지 못하면 현 청년 세대가 미래에 다음 청년 세대를 위해 기여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2. 지금 청년복지의 방향 : 청년배당, 청년수당, 청년희망통장
다행히 2015년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년들을 위한 직접적인 소득 지원 정책이 지역에서부터 논의 된 의미 있는 해였다. 성남시 청년배당과 서울시 청년수당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경기도는 청년희망통장 정책을 발표했다. 각 정책들은 서로 다른 청년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성남시 청년배당은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편적 현금지급 정책이다. 올해 시범적으로 24세의 성남시민에게 지역화폐의 형태로 연 50만원이 지급되고 있으나 당초 계획한 대로 19세부터 24세까지로 대상을 확대하고 연 1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미취업 상태의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NEET)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선별하여 3,000여 명에게 월 50만원 씩 연 최대 300만원을 지급하는 계획으로 아직 세부 내용 확정을 위한 연구 중에 있다. 청년수당 뿐 아니라 사회활동을 위한 지원도 함께 한다. 선별 기준에는 소득수준과 지원자의 활동계획 여부 등이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매월 활동 보고서를 등록해야 한다. 경기도의 청년희망통장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월 소득 130만원 이하의 청년이 3년 간 퇴사하지 않고 매월 10만원 씩 저축할 경우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매칭펀드 형태로 15만원 씩 더해서 3년 후 1,000만원의 목돈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 정책으로 올해 50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이 중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무엇일까? 기회는 기본적으로 시간, 학습과 장기적 관계 축적,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시 청년배당의 경우 그 효과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 돈으로 교재를 살 지, 친구를 만날 지,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을 할 지는 전적으로 청년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통제권은 성남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있다. 청년배당은 청년이 자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반면 청년수당의 경우 서울시가 선별기준과 프로그램을 잘 설계하고 좋은 협력기관들을 발굴할 수 있는지가 관권이다. 노파심이 드는 지점은 복잡한 선별 및 지원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역량, 활동기회의 질, 지급대상자의 “자기주도”를 해치지 않는 관계수립이다. 청년 문제를 위해 오래 노력해 온 서울시인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할 따름이다. 경기도의 경우 청년희망통장이 아니라 사장희망통장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이는 월 15만원으로 청년을 저소득 저임금 일자리에 묶어두고자 하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복지대상자와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각 정책의 방향성을 요약하면 청년배당은 청년을 신뢰하는 정책, 청년수당은 청년을 보호하는 정책, 청년희망통장은 청년을 착취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각 정책들은 세대 간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청년배당의 경우 지역화폐를 지급함으로서 지역 자영업자들과 상호의존적 이해관계를 형성시켰고, 청년수당의 경우 시니어 멘토 그룹과 연결하는 프로그램(대청마루)을 기획 중이다. 청년희망통장의 경우 중소기업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청년노동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상생 모델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등하고 긴밀하게 연결시킨 청년배당이라고 생각된다.
3. 앞으로의 방향
청년희망통장은 차치하자.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에 내재된 정부와 수급자 간의 관계성을 향후 국가차원에서 도입해야 할 복지 프로그램의 방법론으로 생각할 때 어떤 쪽을 지지해야 할까? 양 쪽 모두 긍정적 비전과 위험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상적인 사회통합의 상에 맞춰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수요를 공급하는 방향보다는 시민들의 역량을 신뢰하고 곧장 자원의 지원하는 방향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행정부의 권력이 강한 한국에서 지원체계가 복잡해지면 아무리 선의에 근거한 복지정책이라도 지급대상자가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될 공산이 크다. 또한 청년배당과 같은 보편적 소득지원은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인 소득불안정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가정과 기업에서 위계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계속 유지되는 것, 청년들이 시장에서 도전을 꺼리는 것, 사교육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개인들이 참고 견디는 리스크이다. 최소한의 조건 없는 소득안전망이 보장된다면 기층에서부터 개인들의 권리행사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청년의 입장으로 돌아오자면, 소득불안이 해결되고 권위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한국은 다양한 욕망을 촉발시키는 매력적인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 청년배당, 즉 보편적 기본소득의 방향성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십년 넘게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사회보험 및 공공부조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합의를 통한 복지국가의 구축이 저성장 시대의 한국 시민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주었다. 기본소득은 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을 자극한다. 한 마디로 논의하기 쉬운 프로그램이다.(이는 물론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비용 계산이 단순하므로 반드시 증세 논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본소득 도입의 장애물로 보기도 하지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리과정을 둘러싼 갈등은 증세에 대한 합의 없이 도입된 복지정책이 중앙정부의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휘둘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증세”라는 아젠다를 감당하고자 하는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이미 세계 곳곳의 사례를 통해 또 총선을 앞 둔 국내 상황에서 보여지 듯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매력적인 정책임에 틀림없으며,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힘이 있는 의제이다. 오히려 증세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한국은 모든 국민에게 코드가 있고, 전산화가 잘되어있는 국가이다. 기본소득 지급이 기술적으로 이보다 쉬운 나라가 있을까?
4. 나가며
창업, 창직, 해외취업, 중소기업 취업, 마을 공동체, 사회적 경제.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책가들은 청년들에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을 권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국가에서 비전을 제시할 역량이 없다면 개인들이 리스크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도박이어서는 안된다. 개인들에게 일정한 소득이라는 예측 가능한 요소가 주어진다면, 미래세대는 알아서 제 욕망과 비전에 근거한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 즉,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과는 다른 경로로 기본소득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성사될 때,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 등으로 명명되어 온 청년세대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청소년세대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갖고 비로소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자 할 것이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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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대의 기회와 도시의 청년복지> 토론문
2016.3.11 백희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1. 문제적 주체 :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의 정치적 한계와 가능성
청년세대를 지시해 온 단어들은 오늘 날 청년들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잘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문제들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돈이 없지만(88만원 세대),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그들의 부모세대에 종속되어있으며(에코세대), 부모세대와 같은 ‘정상적 4인가족’의 생애주기를 포기해야 하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욕망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삼포세대)
최근 JTBC에서 보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22.6%), 2위는 건물주와 임대업자(16.1%)였다. 명문대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는 얘기는 신기한 뉴스도 아니다. 청년기, 청소년기는 보통 가장 도전적인 시기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오늘 날 이들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안정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소득 불안정성, 낮은 취업률, 노동시장 이중화의 심화와 계층이동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높은 주거비용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맥락을 더하고 싶다. 청년 세대가 한국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증언컨대, 우리 세대의 성장기는 사회가 퇴보하는 역행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 이후 태어나 IMF 이후의 사회에서 자립해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단 맛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시기는 짧았다. IMF의 개입으로 정규직 일자리 시스템이 깨지면서 가정의 붕괴도 함께 경험해야 했다. 삶의 회복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사회는 새로운 규칙에 맞춰 빠르게 재조직화 된 결과 밀레니엄을 지나며 위기는 수습된 것처럼 보였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눈에 드러나면서 통일의 대업도 사반세기 내에 이루어질 것 같았다. 한일 월드컵이라는 대형 이벤트는 폭발적으로 사기를 드높이며 ‘광장’을 호출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에 진출했다. 정권 교체 후 광장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2010년이 되었을 때, 천안함 사건과 전례 없는 연평도 포격이 있었다. 머리 크고 처음으로 당선을 지켜 본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진보정당은 분열했고 통합진보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경제발전, 민주주의, 평화. 어떤 가치도 성공하는 걸 경험하지 못한 채, 또래들과 조직화 할 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세대의 내면이 냉소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공허하다.
희망은 세계화의 흐름과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빠른 확장 덕분에 문화적 다양성을 누린 세대라는 것이다. 적어도 컨텐츠 소비의 측면에서는 선진국과 시간 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시대이다. 또한 한국의 청년세대는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데 아무튼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목적보다는 수단으로서의 배움이었고, 시험에서 얕게 활용되고 말 뿐 실질적으로 축적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은 청년 세대 일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직장과 가정에만 충성하기 보다는 자아실현을 꿈꾸고, 동질한 사회구성원이 되기를 요구하는 집단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체들이 등장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에도 평생직장을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삼포세대’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이나 직장보다 자아실현의 권리에 집중하는 욕망이 정치적 동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여태까지 정치적 주체로 조명 받지 못한 도시 청년 여성은 자아실현의 욕망을 강하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직장에 잔존해 있는 구시대적인 위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해 점화 된 페미니즘 열풍이 데이트 폭력, 몰카 외에도 여성의 일할 권리와 가사 및 육아분담을 적극적인 의제로 삼고 있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높은 취업이민율과 ‘이민계’도 많은 청년들이 한국사회에선 실현될 수 없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청년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득불안정성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회의주의가 결합되면서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을 지향하고 있고 사회에서도 기성 세력에 대한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역동성의 감소는 경제적으로는 불황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의 청년 복지가 갖는 의미는 ‘불쌍한 청년’의 지원이라기보다 사회를 위한 투자이다. 즉, 청년을 위한 사회안전망이자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다시 공무원, 건물주 임대업자란 장래희망을 떠올려 보면, 안정성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자율성의 욕망을 짐작할 수 있다. 건물주 임대업자라고 대답한 청소년에게는 사실 소득이 확보된 이후 정말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래희망이 있을 것이다. 투자로서의 청년복지는 바로 이 진정한 장래희망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 이 사회적 약속을 해내지 못하면 현 청년 세대가 미래에 다음 청년 세대를 위해 기여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2. 지금 청년복지의 방향 : 청년배당, 청년수당, 청년희망통장
다행히 2015년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년들을 위한 직접적인 소득 지원 정책이 지역에서부터 논의 된 의미 있는 해였다. 성남시 청년배당과 서울시 청년수당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경기도는 청년희망통장 정책을 발표했다. 각 정책들은 서로 다른 청년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성남시 청년배당은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편적 현금지급 정책이다. 올해 시범적으로 24세의 성남시민에게 지역화폐의 형태로 연 50만원이 지급되고 있으나 당초 계획한 대로 19세부터 24세까지로 대상을 확대하고 연 1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미취업 상태의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NEET)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선별하여 3,000여 명에게 월 50만원 씩 연 최대 300만원을 지급하는 계획으로 아직 세부 내용 확정을 위한 연구 중에 있다. 청년수당 뿐 아니라 사회활동을 위한 지원도 함께 한다. 선별 기준에는 소득수준과 지원자의 활동계획 여부 등이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지원자들은 매월 활동 보고서를 등록해야 한다. 경기도의 청년희망통장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월 소득 130만원 이하의 청년이 3년 간 퇴사하지 않고 매월 10만원 씩 저축할 경우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매칭펀드 형태로 15만원 씩 더해서 3년 후 1,000만원의 목돈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 정책으로 올해 50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이 중 미래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무엇일까? 기회는 기본적으로 시간, 학습과 장기적 관계 축적,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시 청년배당의 경우 그 효과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 돈으로 교재를 살 지, 친구를 만날 지,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을 할 지는 전적으로 청년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통제권은 성남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있다. 청년배당은 청년이 자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반면 청년수당의 경우 서울시가 선별기준과 프로그램을 잘 설계하고 좋은 협력기관들을 발굴할 수 있는지가 관권이다. 노파심이 드는 지점은 복잡한 선별 및 지원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역량, 활동기회의 질, 지급대상자의 “자기주도”를 해치지 않는 관계수립이다. 청년 문제를 위해 오래 노력해 온 서울시인 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할 따름이다. 경기도의 경우 청년희망통장이 아니라 사장희망통장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이는 월 15만원으로 청년을 저소득 저임금 일자리에 묶어두고자 하는 악질적인 정책이다.
복지대상자와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각 정책의 방향성을 요약하면 청년배당은 청년을 신뢰하는 정책, 청년수당은 청년을 보호하는 정책, 청년희망통장은 청년을 착취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각 정책들은 세대 간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청년배당의 경우 지역화폐를 지급함으로서 지역 자영업자들과 상호의존적 이해관계를 형성시켰고, 청년수당의 경우 시니어 멘토 그룹과 연결하는 프로그램(대청마루)을 기획 중이다. 청년희망통장의 경우 중소기업 고용주들이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청년노동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상생 모델은 청년들과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등하고 긴밀하게 연결시킨 청년배당이라고 생각된다.
3. 앞으로의 방향
청년희망통장은 차치하자. 청년배당과 청년수당에 내재된 정부와 수급자 간의 관계성을 향후 국가차원에서 도입해야 할 복지 프로그램의 방법론으로 생각할 때 어떤 쪽을 지지해야 할까? 양 쪽 모두 긍정적 비전과 위험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상적인 사회통합의 상에 맞춰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수요를 공급하는 방향보다는 시민들의 역량을 신뢰하고 곧장 자원의 지원하는 방향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행정부의 권력이 강한 한국에서 지원체계가 복잡해지면 아무리 선의에 근거한 복지정책이라도 지급대상자가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될 공산이 크다. 또한 청년배당과 같은 보편적 소득지원은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인 소득불안정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예컨대 가정과 기업에서 위계적이고 비생산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계속 유지되는 것, 청년들이 시장에서 도전을 꺼리는 것, 사교육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개인들이 참고 견디는 리스크이다. 최소한의 조건 없는 소득안전망이 보장된다면 기층에서부터 개인들의 권리행사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청년의 입장으로 돌아오자면, 소득불안이 해결되고 권위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한국은 다양한 욕망을 촉발시키는 매력적인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 청년배당, 즉 보편적 기본소득의 방향성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십년 넘게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사회보험 및 공공부조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합의를 통한 복지국가의 구축이 저성장 시대의 한국 시민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주었다. 기본소득은 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을 자극한다. 한 마디로 논의하기 쉬운 프로그램이다.(이는 물론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비용 계산이 단순하므로 반드시 증세 논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본소득 도입의 장애물로 보기도 하지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리과정을 둘러싼 갈등은 증세에 대한 합의 없이 도입된 복지정책이 중앙정부의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휘둘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증세”라는 아젠다를 감당하고자 하는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이미 세계 곳곳의 사례를 통해 또 총선을 앞 둔 국내 상황에서 보여지 듯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매력적인 정책임에 틀림없으며,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힘이 있는 의제이다. 오히려 증세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한국은 모든 국민에게 코드가 있고, 전산화가 잘되어있는 국가이다. 기본소득 지급이 기술적으로 이보다 쉬운 나라가 있을까?
4. 나가며
창업, 창직, 해외취업, 중소기업 취업, 마을 공동체, 사회적 경제.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책가들은 청년들에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을 권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국가에서 비전을 제시할 역량이 없다면 개인들이 리스크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도박이어서는 안된다. 개인들에게 일정한 소득이라는 예측 가능한 요소가 주어진다면, 미래세대는 알아서 제 욕망과 비전에 근거한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 즉, 기초노령연금이나 누리과정과는 다른 경로로 기본소득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성사될 때, 88만원 세대, 에코세대, 삼포세대 등으로 명명되어 온 청년세대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청소년세대는 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갖고 비로소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자 할 것이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영화 4등(2016) 리뷰: 성장은 아이의 몫
사랑니 (2005), 은교(2012) 등 금기시 된 사랑을 소재로 삼아왔던 정지우 감독의 신작 4등(2016)은 수영을 소재로 한국의 교육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언뜻 뜬금없이 느껴지지만 막상 영화를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논란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벼려 들이미는 솜씨가 예의 그것이다.
수영을 "놀려고" 시작한 초등학생 준호(유재상)는 소질은 있지만 나가는 대회마다 4등이다. 메달만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등수에 속이 뒤집어지는 엄마 정애(이항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메달 따게 해준다는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광수의 진심어린 지도 덕에 준호는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 메달을 딴다. 그러나 이 진심어린 지도의 실체는 다름 아닌 체벌이다. 진실을 마주한 부모는 갈등한다.
<4등>은 준호의 몸에 멍이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광수란 인물에 공을 들인다. 그가 준호를 체벌하는 까닭은 십 수 년 전 유망주였다가 체벌에 반발해 성공가도에서 엇나간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하기 때문이다. 정애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서운” 불안감에 이를 눈 감아 준다. 관객은 이 불안이 메달만 따면 그만인 한국의 성과 중심 선수 양성 시스템에서 비롯함을 광수의 과거 에피소드와 현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다행히 아빠 영훈(최무성)이 나서서 상황을 제재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과거 광수를 낙오시킨 체벌 시스템의 적극적인 방관자이다. 이 영화 속 도식을 복기하다 보면 도입부 삽입 된 98년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보도 화면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등에게만 환호하며 4등을 몰아붙인 것은 수많은 국민영웅을 소비해 온 이 나라다.
하지만 이는 다 어른들의 사정일 뿐, 주인공 준호는 복잡한 갈등을 배경으로 유유히 영화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과정 내내 관객은 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준호를 볼 수 있다. 준호는 심드렁한 코치에게 용기 있게 자신의 수영을 봐달라고 요구하고, 체벌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야 혼자 수영장으로 돌아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기를 치른다. 준호를 따라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아름다우며 숏 마다 명확한 의미로 충만하다.
이처럼 준호의 결정에 극의 진행을 맡기면서도 그 당위를 설명하는 데 무관심한 태도에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성장은 아이의 몫이며 그 원동력도 아이 내면에 기인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세계로 달려 나갈 때 어른을 우선 이해시켜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수영을 "놀려고" 시작한 초등학생 준호(유재상)는 소질은 있지만 나가는 대회마다 4등이다. 메달만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등수에 속이 뒤집어지는 엄마 정애(이항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메달 따게 해준다는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광수의 진심어린 지도 덕에 준호는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 메달을 딴다. 그러나 이 진심어린 지도의 실체는 다름 아닌 체벌이다. 진실을 마주한 부모는 갈등한다.
<4등>은 준호의 몸에 멍이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광수란 인물에 공을 들인다. 그가 준호를 체벌하는 까닭은 십 수 년 전 유망주였다가 체벌에 반발해 성공가도에서 엇나간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하기 때문이다. 정애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서운” 불안감에 이를 눈 감아 준다. 관객은 이 불안이 메달만 따면 그만인 한국의 성과 중심 선수 양성 시스템에서 비롯함을 광수의 과거 에피소드와 현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다행히 아빠 영훈(최무성)이 나서서 상황을 제재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과거 광수를 낙오시킨 체벌 시스템의 적극적인 방관자이다. 이 영화 속 도식을 복기하다 보면 도입부 삽입 된 98년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보도 화면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등에게만 환호하며 4등을 몰아붙인 것은 수많은 국민영웅을 소비해 온 이 나라다.
하지만 이는 다 어른들의 사정일 뿐, 주인공 준호는 복잡한 갈등을 배경으로 유유히 영화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과정 내내 관객은 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준호를 볼 수 있다. 준호는 심드렁한 코치에게 용기 있게 자신의 수영을 봐달라고 요구하고, 체벌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야 혼자 수영장으로 돌아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기를 치른다. 준호를 따라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아름다우며 숏 마다 명확한 의미로 충만하다.
이처럼 준호의 결정에 극의 진행을 맡기면서도 그 당위를 설명하는 데 무관심한 태도에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성장은 아이의 몫이며 그 원동력도 아이 내면에 기인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세계로 달려 나갈 때 어른을 우선 이해시켜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생각이 너무 쏟아져서 그냥 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슬픔에 일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는 뜻),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기분1) 날씨도 좋고 거리에 귀여운 스커트를 입고 나온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보며 느낀 전에 없는 감정. 위태로워 보이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 안스러움 같은 것?
기분2) 나 스스로도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이 멈칫했다.
너무나 평범한 공간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 우리 여성 모두가 공통의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슬픔이나 공포, 분노, 문제제기 등 각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더라도 안전에 대한 위기감은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내가 되었을 수도 있어. 우리는 이 생각을 해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든가, 계속 두려움을 품고 행동의 제약 속에 살아가든가.
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할 줄 알았다. 살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규범을 깬 문제니까. 아니 이런 설명이 필요하기나 한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의 쟁점이 '여성혐오범죄냐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냐'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피의자가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 죽였다"고 제 입으로 말했음에도 굳이 한 발 물러선 곳에 문제를 재설정하기 위한 쟁점을 만드는 이유가 뭔가. 그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들 피해자의 성별이, 현장이 바뀌나?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한 특수한 사례라고 하면 우리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용인되는 문화와 제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잃게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봤다. 가해자가 가난해서 사회로부터 배제당해온 것이 사건의 원인이고 그도 구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이다. 예컨대 가난한 아이들이 학업성취도가 낮은 게 문제라고 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가난이므로 그럼 교육적인 노력은 손 떼고 있자고 제안할 것인가? 가해자를 구조의 피해자로 본들, 문제의 본질이 여성혐오라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가난의 문제는 여성이 다치고 죽는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폭력행사로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맥락이라면 가난을 위한 프로그램과 약자의 인권을 위한 프로그램은 같이 가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지. 그 두 가지는 상충되지도 않으며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이전에 이 사회가 그렇게 총력을 다해서 가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오기나 했나? 왜 이럴 때만 갑자기 가난이 호출되는데?)
이 사회의 다수 남성들이 여성이 처한 위기를 동료 시민에 대한 위기, 즉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하며 자신들이 잠재적 범죄군으로 지목되는 데 대해서만 히스테릭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꾸만 편을 가르고 혐오를 조장한다고 하는데, 아니 위험에 처한 게 여성들로 한정되어있는데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지.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위기상황을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냥 우리가 된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배제하고 편을 가르는 쪽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수동적 공격은 결국 어떤 폭력을 용인하고, 누구를 죽게 만드는가? '심기가 불편해서' 우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가해자일 수 밖에 없다. 이건 그런 문제.
당연하지만 여성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일이 보호의 명목으로 여성을 조심시키고 통제하는 방향을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날, 나와 친구는 슬픔과 두려움을 공유하면서도 거듭해서,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런 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바람은 별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잠재적 폭력'에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며 사는 것. 더 구체적으로,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멀리서 다가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나를 노리지는 않는지, 길가에 주차된 차 문이 갑자기 열리지는 않을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매일 밤. 매일매일의 생활. 기본적인 자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슬픔에 일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는 뜻),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기분1) 날씨도 좋고 거리에 귀여운 스커트를 입고 나온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보며 느낀 전에 없는 감정. 위태로워 보이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 안스러움 같은 것?
기분2) 나 스스로도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이 멈칫했다.
너무나 평범한 공간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 우리 여성 모두가 공통의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슬픔이나 공포, 분노, 문제제기 등 각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더라도 안전에 대한 위기감은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내가 되었을 수도 있어. 우리는 이 생각을 해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혐오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든가, 계속 두려움을 품고 행동의 제약 속에 살아가든가.
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할 줄 알았다. 살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규범을 깬 문제니까. 아니 이런 설명이 필요하기나 한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의 쟁점이 '여성혐오범죄냐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냐'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피의자가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 죽였다"고 제 입으로 말했음에도 굳이 한 발 물러선 곳에 문제를 재설정하기 위한 쟁점을 만드는 이유가 뭔가. 그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들 피해자의 성별이, 현장이 바뀌나?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한 특수한 사례라고 하면 우리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용인되는 문화와 제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잃게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봤다. 가해자가 가난해서 사회로부터 배제당해온 것이 사건의 원인이고 그도 구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이다. 예컨대 가난한 아이들이 학업성취도가 낮은 게 문제라고 할 때 근본적인 문제는 가난이므로 그럼 교육적인 노력은 손 떼고 있자고 제안할 것인가? 가해자를 구조의 피해자로 본들, 문제의 본질이 여성혐오라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가난의 문제는 여성이 다치고 죽는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폭력행사로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맥락이라면 가난을 위한 프로그램과 약자의 인권을 위한 프로그램은 같이 가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지. 그 두 가지는 상충되지도 않으며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이전에 이 사회가 그렇게 총력을 다해서 가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오기나 했나? 왜 이럴 때만 갑자기 가난이 호출되는데?)
이 사회의 다수 남성들이 여성이 처한 위기를 동료 시민에 대한 위기, 즉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하며 자신들이 잠재적 범죄군으로 지목되는 데 대해서만 히스테릭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꾸만 편을 가르고 혐오를 조장한다고 하는데, 아니 위험에 처한 게 여성들로 한정되어있는데 대체 어찌하라는 말인지.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위기상황을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냥 우리가 된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배제하고 편을 가르는 쪽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 수동적 공격은 결국 어떤 폭력을 용인하고, 누구를 죽게 만드는가? '심기가 불편해서' 우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가해자일 수 밖에 없다. 이건 그런 문제.
당연하지만 여성의 안전을 증진시키는 일이 보호의 명목으로 여성을 조심시키고 통제하는 방향을 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날, 나와 친구는 슬픔과 두려움을 공유하면서도 거듭해서,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런 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바람은 별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잠재적 폭력'에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며 사는 것. 더 구체적으로,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멀리서 다가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나를 노리지는 않는지, 길가에 주차된 차 문이 갑자기 열리지는 않을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매일 밤. 매일매일의 생활. 기본적인 자유.
2016년 2월 4일 목요일
헛된 토론
우연한 기회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린 1인 1가구 생존프로젝트 워크숍에 참석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평소 1인 가구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 온 터였다. 원래는 이 기회를 빌어 1인 가구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해 한 편의 글로 발행하고 싶었는데, 기대보다 허무한 논의가 오간 자리가 되어서 후기나 써본다. (초청해 주신 분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사는 연구자들이 우선 발제를 하고 추가 패널들의 사례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실 1인 가구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는 많이 오고가지 않았다. 부모로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있다는 발제자들은 1인 가구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우려의 기색을 드러냈다. 첫 번째 발제자인 문학평론가는 일본에서 화제가 된 고독사 문제를 예로 들며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빌어 커뮤니티가 사라져감으로서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키다가 아무튼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형성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정치학자는 자신을 폴리스가 아닌 오이코스(집)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혼자 살 수 있는 집은 없다고 운을 떼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가정 내에서 생산적 활동이 일어났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점점 가정의 일이 시장과 복지국가에 의해 외주화되고 그 만큼 가정은 외부에 종속된 소비집단이 되었다. 그는 '집'이 정치의 공간, 사회와 연대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며 사적인 것을 배제하는 기존의 엘리트주의 공론장을 비판했다. 이 '집'은 기존의 가족 이기주의로 뭉친 중산층 기득권 가족과는 다른 관계성을 가진 가족인데 그러한 대안의 실마리를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가출팸이나 쪽방촌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득권들은 나눌 수록 가진 것이 줄어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나눌 수록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발제문에 첨부된 보론에는 시골의 대가족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해 도시에서 커리어를 쌓아왔으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게 되며 어머니들의 자매 공동체를 그리워하게 된 '엄마 딸'의 자기반성 서사가 실려있어 좀 뜨악했다. 성별분업과 여성의 경력단절,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던 지금은 상실해버린 가정 내 자급의 기술과 육아 공동체를 회복해야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며 가사노동을 여성의 책임으로 보는 관점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발제자인 철학자는 독신의 실존미학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요약하기 어려운 글이라 생략한다. 아무튼 세 발제의 공통적인 결론은 "알리앙스"든 "약한 고리 사회"든 "해방의 가족"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인 가구가 (특히 노인인구) 고립으로 사회문제화 되는 것은 사실이니 관계를 통한 안전망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커뮤니티를 위해 이야기되어야 할 실용적인 덕목은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진 '남'과 남으로서 관계맺는 기술에 대한 것이지, '사와 공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너나 없이 나누자'의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름답지도, 실용적이지도, 옳지도 않은 주장이다.
나는 패널들에게 물을 것까지 포함하여 일곱 개의 질문을 준비했다. 그 중 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협력과 타협으로 풀어나가기 보다는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 협력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비슷한 질문을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보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없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뾰족한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통찰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자리에선 그래서 어떤 대답을 들었냐면 일단 희소가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중학교 사회책에 나오는 그 희소가치 얘기를. 그리고 자원이 부족하면 경쟁이 일어난다는 편견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깨우침을 당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환의 관계뿐 아니라 '증여'라는 게 있는데(몰랐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경제활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디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자신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디의 원주민들은 선물의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는 세 시간 여의 워크숍이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와...... 선생님들 대체 뭐가 문제세요? 인디언이세요??? 희소가치랑 증여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있다니 너무너무 놀랍네요. 장담하건데 인류학자들은 증여 개념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쓰는 걸 보면 매우 화를 낼 것이다. 시장경제랑 도시를 역기능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지식인'으로 먹고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모순도 없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인 사랑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명되었다구 생각하시는지...
워낙 보편적인 문제이고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아서 사례를 들지 않았지만 저 질문을 적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노인 주거복지 전문가 분의 경험담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영구임대지역이 신혼부부나 중산층 가정도 섞여있는 전세임대지역보다 노인복지사업을 하기에 힘들다고 했다. 전세임대지역에서 노인분들을 위해 공간을 사용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하시네요' 하고 별 트러블 없이 넘어가는데, 영구임대지역에서는 왜 노인만 돌보느냐 나도 알바하며 애 키우기 힘들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불평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다. 물론 이를 극복하는 사례들도 있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진 뛰어난 활동가-코디네이터가 수 년에 걸쳐 공동자원을 형성하기도 하고, 놀랍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모두에게 그냥 돈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있는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관계에는 돈이 들고, 신뢰와 개방성이라는 사회적, 심리적 자원을 축적하고 학습할 기회도 결코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지 않다.
다른 것보다도 2016년에 1인가구에 대해 논의하며 인디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놀라웠다. 아직 살만 하신가보다는 생각 밖에 안들었는데, 그렇다고 공론장을 이렇게 허무하게 막 쓰시면 빚내서 토건사업 벌이는 것 못잖게 미래세대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 된답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할 말을 잃었잖아요.
2015년 12월 9일 수요일
인터뷰 : 모두의 내일이 불안한 사회에서, 삶의 기반이 되어줄 기본소득 - 백희원(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
녹색전환연구소와 한 인터뷰입니다. (2015.12.9 게시되었습니다)
전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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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와 서울시에서 각각 청년배당, 청년수당정책을 들고 나왔는데요. 기본소득을 주제로 오래 활동을 이어 온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중앙정부에서 할 일을 안 해서 지방정부에서 나섰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청년을 위해 내놓는 정책 중에 의미 있는 정책이 별로 없어요. 청년희망펀드 같은 것은 정책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7월에 요란하게 발표한 청년고용절벽해소대책도 무조건 일자리 20만 개 늘리겠다는 말만 하는 데 양적 측면만 보고 질은 따지지 않으면 불안정 일자리만 늘어날 뿐이지요. 그런 일자리는 청년을 착취할 뿐이고요. 무엇보다도 일자리를 늘리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고 기업인데 20만 개 계획 세우면 시장에 일자리가 뚝딱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반면 두 정책은 청년들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준다는 점, 아주 실질적인 지원이라는 점에 충분히 의미부여를 할 수 있죠. 특히 성남시 청년배당정책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연 100만원이니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소득 자체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자체에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울시 청년수당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상이 중위소득 60% 이하의 '사회 밖 청년' 중 사회활동에의 의지가 있는 3,000여 명이고 최대 6개월 간 50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인데요. 자세히 보면 주 노동시간이 15시간 미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해보면 월 30만원 좀 넘는데요. 청년수당이 필요한 청년들은 아마도 돈이 별로 없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사회에 진입하고 싶으니 눈앞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택하기보단 취업준비를 하며 사회 밖에 머무는 청년들이겠죠. 청년수당을 받으려면 아르바이트를 주 15시간 밖에 못하니까 한 달 소득이 80만 원정도로 제한되는 셈인데, 서울에 살면서 부모님 집에 살지 않는 가난한 청년이 '활동'까지 하면서 생활하기에 80만원이 충분한 금액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사회 밖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경력이 안정적인 메이저 일자리에 취직하는 데 불리한 낙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진 않을까하는 우려도 듭니다. 그럼 결국 정책대상과 실제 참여 가능한 대상, 그리고 효과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지요. 그럴 때 사각지대가 생기고요.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밖'이라는 규정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껴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안'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탈락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오히려 '사회 밖'에서 새로운 관계, 시도들이 자리 잡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는 적합하지 않을까요? 청년기는 삶에 대해 유연한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삼포세대, 오포세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포기한 걸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시대적으로 안 맞는 것 같아요.
앞서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이 좀 더 기본소득에 근접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가난하든 부자든, 일을 하든 안하든,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것인데요.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은 해당 나이의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요구사항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본소득에 접근해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한 기본소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정책입니다.
기본소득 논의, 왜 시작되었을까요? 사회에 대한 핵심 문제의식이랄까..?
불평등의 심화죠. 건물 값은 오르고, 생활비도 오르고, 이중노동시장의 격차는 더 심화되니까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경쟁은 더 심해지고, 원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도 훨씬 유리하고요. 사회적으로 이 악순환을 전환시키기 위한 소득재분배의 열쇠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모두의 삶에 당연하게 자리 잡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난하지 않은 사람도, 괜찮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언제든 큰 병이나 실업 등으로 가난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 불안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손실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고요. 기존 복지시스템의 사회보험은 낸 만큼 돌려주는 거고, 공공부조는 피치 못하게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특정한 경우에만 내(정부)가 너에게 돈을 베풀어 줄게’죠. 한국은 그나마 다 보장해주지도 않고 정부 사정 되는 만큼만 도와준다는 식이고요. 반면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방을 하는 정책이죠. 저는 자유가 안전과 함께 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본소득이 실현되어 생계의 안전이 보장될 경우 사람들이 삶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게 다양해지고 이것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환경을 조성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특히 변화를 반기는 청년 세대에게 더 그렇지 않을까요. 좀 창조경제 같네요.
기본소득으로 적절한 금액.. 워낙에 의견들이 다양한데.. 희원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세요?
제가 평생 서울에서만 살아봤는데요. 이번에 ‘함께 사는 돈 탐방기’ 진행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적정 금액을 물었어요. 서울에 사는 사람은 약 80~90만원 정도 이야기하고,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은 약 5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야기하고, 여기에 더 시골로 들어가니 한 3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말씀하시기도 하고.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평소 만나는 서울의 젊은 분들은 혼자 산다고 치고 일단 월세 3, 40만원, 교통비 10만 원 잡고 플러스 생활비로 계산을 하게 되는 거죠. 지방은 물가가 좀 싼 것도 있지만, 제가 만난 분들, 특히 귀농하신 분들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있으니 계산이 달라요. 월세는 나눠 내고, 식비도 같이 농사지어서 나눠 먹고, 30만원이면 빚 안지고 하고 싶은 유기농 농사 지을 수 있겠다고 하시는 거죠.
재원 마련 가능성을 생각하면 월 40만원 정도가 적당하죠. 지금 물가 생각하면 70~80만원 정도. 저도 예전에는 일인 생활자로서만 기본소득 적정금액을 생각했는데 요즘은 저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모아 공동생활을 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생활비를 줄이면 더 적은 금액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한 소득이 들어온다면 일은 몇 년에 한 번 정도 쉬거나, 1년에 6개월만 일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하거나, 아무튼 다양하게 생활을 구조조정해 볼 수 있겠죠. 호혜적으로 자원을 주고받는 관계를 더 늘리고... 여러 조합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최소 40만원에서 70만원 정도가 적절한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 관련 활동을 거의 3년 이상 해오고 있으신건데.. 이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고 있으신지?
잘 못하고 있는 게, 그게 원동력이 된달까. (웃음) 성과를 명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운 활동이지만 항상 아쉬움이 많아요. 조금만 더 잘 해보자, 다음엔 이것보단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생각에.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힘이 많이 되죠.
무엇보다 기본소득이란 아젠다 자체가 항상 새로운 주제를 제게 준다는 게 원동력이 돼요. 예를 들어 맨 처음엔 저 개인적인 욕구로 기본소득을 지지했어요. 제가 문과를 졸업했는데 그간 배운 것에 대해 시장에서 그 쓸모를 설명하기 어려운 거예요. 학부 때 읽던 바르트니 블랑쇼니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그치만 기본소득을 받으면 내가 나를 완전히 노동시장의 '니즈'에 맞춰 설명하고 변명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지지하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남들을 설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이게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면서 잘 모르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재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설득할 수 있죠. 요즘 관심 있는 건 한국 복지 시스템의 낙후성이에요.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의 전형적인 패턴을 볼 수 있어요. 복지는 현장에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잘 전달될 때 빛을 발하는 건데... 당사자 분들 만나면서 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게 정말 잘 안 되어 있더라고요. 심사과정에서 불이익 당하는 사람도 많고. 또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노동대우도 안좋고요. 이런 식으로 기본소득의 설득 근거를 찾다보면 새로운 주제에 관심이 생기고 연결된 또 다른 주제를 보게 되는 루틴이 반복돼요. 이런 게 매력적이죠.
희원 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희원님의 모습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뭘 갖고 싶거나, 하고 싶거나, 이기고 싶거나 이런 게 별로 없었어요. 심지어 식욕도 별로 없고.(웃음) 다만 ‘남에게 해 끼치며 살기는 싫다’ 이 정도 욕망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머리가 크고 보니 평범한 생활만으로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에 살고 있더라고요. 제 머릿 속에서 가장 최근 업데이트 된 버전의 설명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자원이 너무 부족해서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요. 예를 들면 끝도 없는데, 그 동안 쌀값이 안 오를 수 있었던 건 농민 분들이 빚을 지면서까지 대규모 농업을 했기 때문이고, 도서 당일택배가 가능한 건 택배 단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고. 그런데 여기서 농민이나 택배 노동자 분들 손을 들어줘서 물가가 오르면 저소득층이 가장 피해를 보겠지요. 저부터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니까 최대한 싼 물건 사려고 노력하고요. 이런 구조 자체가 싫었어요. 내 가치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랄까. 기본소득이 이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의 생계를 사회가 보장하자는 이야기니까요. 나머지 반은 윤리의 문제일 거고요.
그리고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제가 많이 바뀌었는데... 저는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욕망을 배웠어요. 기본소득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아직도 이 상태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사회화 된 말의 작용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요.
기본소득이라면 충분히 사회문제 공론화의 장이 될 수 있겠다 확신하게 된 계기가 혹시 있으실지..?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약자의 힘이 강화될 거라 확신해요. 인상 깊은 사례가 있었는데... 거리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주면 뭐 하겠냐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한 중년 여성분이 신나게 말씀하시길, "이혼한다!"고. 그 순간 아 가장보다는 여성, 청소년.. 가부장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효용이 더 크겠구나 하는 게 확 와닿았어요. 이런 양상이 다른 영역들에도 적용 되겠다 생각했어요. 실제로 요즘 진행 중인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http://imaginebasicincome.com) 웹 캠페인에도 질 나쁜 일자리를 거부하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이 올라오고 있고요. 가정에서, 노동시장에서, 정치적 권력행사로 이어지는 경제적 종속관계가 약화될 거라는 거죠.
그리고 기본소득의 실행에 대한 논의는 '한 사회에서 어떻게 모든 사회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공공의 자원을 구성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는 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기본소득은 돈 얘기니까 눈에 보이는 구체화 된 숫자들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기본소득, 될 것 같나요? (웃음)
네. 제가 기본소득 운동을 하게 된 데는 비관적인 성격 탓도 있어요. 세상이 너무 안 좋아서 이 정도로 강력하고 종합적인 처치가 아니면 사회문제가 해결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 금수저 이런 단어만 봐도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필요로 할 마음의 준비는 된 것 같아요. 2012년까지만 해도 미래 후손을 위해 하는 거라고 농담했었는데요. 기본소득 논의가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거든요. 핀란드는 집권당에서 기본소득 계획 발표도 했고. 한국도 성남시에서 청년배당 얘기 꺼냈고, 녹색당에서도 당론으로 채택하고 열심히 공론화하고 있고요. 조금 신기했던 건 기본소득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던 분들이 지금까진 거의 예술 쪽 종사하는 분들,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 녹색평론 읽는 분들 정도였고 대개는 부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재명 시장이 한다고 하니까 야권 지지자 분들이 기본소득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 생각이 변하는 경로는 여러가지구나, 나는 지금까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한 스테이지 씩 클리어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 어디서 이게 더 확산될지 모르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방법을 취해보려구요.
전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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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와 서울시에서 각각 청년배당, 청년수당정책을 들고 나왔는데요. 기본소득을 주제로 오래 활동을 이어 온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중앙정부에서 할 일을 안 해서 지방정부에서 나섰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청년을 위해 내놓는 정책 중에 의미 있는 정책이 별로 없어요. 청년희망펀드 같은 것은 정책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7월에 요란하게 발표한 청년고용절벽해소대책도 무조건 일자리 20만 개 늘리겠다는 말만 하는 데 양적 측면만 보고 질은 따지지 않으면 불안정 일자리만 늘어날 뿐이지요. 그런 일자리는 청년을 착취할 뿐이고요. 무엇보다도 일자리를 늘리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고 기업인데 20만 개 계획 세우면 시장에 일자리가 뚝딱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반면 두 정책은 청년들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준다는 점, 아주 실질적인 지원이라는 점에 충분히 의미부여를 할 수 있죠. 특히 성남시 청년배당정책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연 100만원이니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소득 자체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자체에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울시 청년수당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상이 중위소득 60% 이하의 '사회 밖 청년' 중 사회활동에의 의지가 있는 3,000여 명이고 최대 6개월 간 50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인데요. 자세히 보면 주 노동시간이 15시간 미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해보면 월 30만원 좀 넘는데요. 청년수당이 필요한 청년들은 아마도 돈이 별로 없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사회에 진입하고 싶으니 눈앞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택하기보단 취업준비를 하며 사회 밖에 머무는 청년들이겠죠. 청년수당을 받으려면 아르바이트를 주 15시간 밖에 못하니까 한 달 소득이 80만 원정도로 제한되는 셈인데, 서울에 살면서 부모님 집에 살지 않는 가난한 청년이 '활동'까지 하면서 생활하기에 80만원이 충분한 금액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사회 밖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경력이 안정적인 메이저 일자리에 취직하는 데 불리한 낙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진 않을까하는 우려도 듭니다. 그럼 결국 정책대상과 실제 참여 가능한 대상, 그리고 효과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지요. 그럴 때 사각지대가 생기고요.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회 밖'이라는 규정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껴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안'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탈락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오히려 '사회 밖'에서 새로운 관계, 시도들이 자리 잡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는 적합하지 않을까요? 청년기는 삶에 대해 유연한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삼포세대, 오포세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포기한 걸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시대적으로 안 맞는 것 같아요.
앞서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이 좀 더 기본소득에 근접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가난하든 부자든, 일을 하든 안하든,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것인데요. 성남시 청년배당 정책은 해당 나이의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요구사항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본소득에 접근해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한 기본소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정책입니다.
기본소득 논의, 왜 시작되었을까요? 사회에 대한 핵심 문제의식이랄까..?
불평등의 심화죠. 건물 값은 오르고, 생활비도 오르고, 이중노동시장의 격차는 더 심화되니까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경쟁은 더 심해지고, 원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도 훨씬 유리하고요. 사회적으로 이 악순환을 전환시키기 위한 소득재분배의 열쇠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모두의 삶에 당연하게 자리 잡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난하지 않은 사람도, 괜찮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언제든 큰 병이나 실업 등으로 가난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 불안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손실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고요. 기존 복지시스템의 사회보험은 낸 만큼 돌려주는 거고, 공공부조는 피치 못하게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특정한 경우에만 내(정부)가 너에게 돈을 베풀어 줄게’죠. 한국은 그나마 다 보장해주지도 않고 정부 사정 되는 만큼만 도와준다는 식이고요. 반면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방을 하는 정책이죠. 저는 자유가 안전과 함께 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본소득이 실현되어 생계의 안전이 보장될 경우 사람들이 삶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게 다양해지고 이것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환경을 조성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특히 변화를 반기는 청년 세대에게 더 그렇지 않을까요. 좀 창조경제 같네요.
기본소득으로 적절한 금액.. 워낙에 의견들이 다양한데.. 희원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세요?
제가 평생 서울에서만 살아봤는데요. 이번에 ‘함께 사는 돈 탐방기’ 진행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적정 금액을 물었어요. 서울에 사는 사람은 약 80~90만원 정도 이야기하고,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은 약 5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야기하고, 여기에 더 시골로 들어가니 한 3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말씀하시기도 하고.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평소 만나는 서울의 젊은 분들은 혼자 산다고 치고 일단 월세 3, 40만원, 교통비 10만 원 잡고 플러스 생활비로 계산을 하게 되는 거죠. 지방은 물가가 좀 싼 것도 있지만, 제가 만난 분들, 특히 귀농하신 분들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있으니 계산이 달라요. 월세는 나눠 내고, 식비도 같이 농사지어서 나눠 먹고, 30만원이면 빚 안지고 하고 싶은 유기농 농사 지을 수 있겠다고 하시는 거죠.
재원 마련 가능성을 생각하면 월 40만원 정도가 적당하죠. 지금 물가 생각하면 70~80만원 정도. 저도 예전에는 일인 생활자로서만 기본소득 적정금액을 생각했는데 요즘은 저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모아 공동생활을 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생활비를 줄이면 더 적은 금액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한 소득이 들어온다면 일은 몇 년에 한 번 정도 쉬거나, 1년에 6개월만 일하거나, 프리랜서를 택하거나, 아무튼 다양하게 생활을 구조조정해 볼 수 있겠죠. 호혜적으로 자원을 주고받는 관계를 더 늘리고... 여러 조합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최소 40만원에서 70만원 정도가 적절한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 관련 활동을 거의 3년 이상 해오고 있으신건데.. 이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고 있으신지?
잘 못하고 있는 게, 그게 원동력이 된달까. (웃음) 성과를 명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운 활동이지만 항상 아쉬움이 많아요. 조금만 더 잘 해보자, 다음엔 이것보단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생각에.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힘이 많이 되죠.
무엇보다 기본소득이란 아젠다 자체가 항상 새로운 주제를 제게 준다는 게 원동력이 돼요. 예를 들어 맨 처음엔 저 개인적인 욕구로 기본소득을 지지했어요. 제가 문과를 졸업했는데 그간 배운 것에 대해 시장에서 그 쓸모를 설명하기 어려운 거예요. 학부 때 읽던 바르트니 블랑쇼니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그치만 기본소득을 받으면 내가 나를 완전히 노동시장의 '니즈'에 맞춰 설명하고 변명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지지하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남들을 설득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이게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면서 잘 모르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재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설득할 수 있죠. 요즘 관심 있는 건 한국 복지 시스템의 낙후성이에요.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의 전형적인 패턴을 볼 수 있어요. 복지는 현장에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잘 전달될 때 빛을 발하는 건데... 당사자 분들 만나면서 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게 정말 잘 안 되어 있더라고요. 심사과정에서 불이익 당하는 사람도 많고. 또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노동대우도 안좋고요. 이런 식으로 기본소득의 설득 근거를 찾다보면 새로운 주제에 관심이 생기고 연결된 또 다른 주제를 보게 되는 루틴이 반복돼요. 이런 게 매력적이죠.
희원 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희원님의 모습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뭘 갖고 싶거나, 하고 싶거나, 이기고 싶거나 이런 게 별로 없었어요. 심지어 식욕도 별로 없고.(웃음) 다만 ‘남에게 해 끼치며 살기는 싫다’ 이 정도 욕망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머리가 크고 보니 평범한 생활만으로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에 살고 있더라고요. 제 머릿 속에서 가장 최근 업데이트 된 버전의 설명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자원이 너무 부족해서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요. 예를 들면 끝도 없는데, 그 동안 쌀값이 안 오를 수 있었던 건 농민 분들이 빚을 지면서까지 대규모 농업을 했기 때문이고, 도서 당일택배가 가능한 건 택배 단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고. 그런데 여기서 농민이나 택배 노동자 분들 손을 들어줘서 물가가 오르면 저소득층이 가장 피해를 보겠지요. 저부터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니까 최대한 싼 물건 사려고 노력하고요. 이런 구조 자체가 싫었어요. 내 가치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랄까. 기본소득이 이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의 생계를 사회가 보장하자는 이야기니까요. 나머지 반은 윤리의 문제일 거고요.
그리고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제가 많이 바뀌었는데... 저는 기본소득 운동하면서 욕망을 배웠어요. 기본소득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아직도 이 상태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사회화 된 말의 작용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요.
기본소득이라면 충분히 사회문제 공론화의 장이 될 수 있겠다 확신하게 된 계기가 혹시 있으실지..?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약자의 힘이 강화될 거라 확신해요. 인상 깊은 사례가 있었는데... 거리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주면 뭐 하겠냐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한 중년 여성분이 신나게 말씀하시길, "이혼한다!"고. 그 순간 아 가장보다는 여성, 청소년.. 가부장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갖는 효용이 더 크겠구나 하는 게 확 와닿았어요. 이런 양상이 다른 영역들에도 적용 되겠다 생각했어요. 실제로 요즘 진행 중인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http://imaginebasicincome.com) 웹 캠페인에도 질 나쁜 일자리를 거부하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이 올라오고 있고요. 가정에서, 노동시장에서, 정치적 권력행사로 이어지는 경제적 종속관계가 약화될 거라는 거죠.
그리고 기본소득의 실행에 대한 논의는 '한 사회에서 어떻게 모든 사회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공공의 자원을 구성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는 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기본소득은 돈 얘기니까 눈에 보이는 구체화 된 숫자들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기본소득, 될 것 같나요? (웃음)
네. 제가 기본소득 운동을 하게 된 데는 비관적인 성격 탓도 있어요. 세상이 너무 안 좋아서 이 정도로 강력하고 종합적인 처치가 아니면 사회문제가 해결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 금수저 이런 단어만 봐도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필요로 할 마음의 준비는 된 것 같아요. 2012년까지만 해도 미래 후손을 위해 하는 거라고 농담했었는데요. 기본소득 논의가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거든요. 핀란드는 집권당에서 기본소득 계획 발표도 했고. 한국도 성남시에서 청년배당 얘기 꺼냈고, 녹색당에서도 당론으로 채택하고 열심히 공론화하고 있고요. 조금 신기했던 건 기본소득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던 분들이 지금까진 거의 예술 쪽 종사하는 분들,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 녹색평론 읽는 분들 정도였고 대개는 부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재명 시장이 한다고 하니까 야권 지지자 분들이 기본소득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 생각이 변하는 경로는 여러가지구나, 나는 지금까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한 스테이지 씩 클리어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 어디서 이게 더 확산될지 모르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방법을 취해보려구요.
라벨:
기록,
기본소득,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백희원,
biyn
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청년에 의한 정책'에 대한 메모
* 2015년 10월 15일 열린 <청년정책 2015 토론회>의 발제문입니다.
행사에 대한 상세정보와 전체 자료집을 위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청년이 사회안전망에 대해 말하자
‘88만원 세대’ 담론의 등장 이후 고용, 결혼 등 사회재생산의 맥락에서 청년이 문제적 주체로 떠오른 지 오래되었으나 그간 중앙정부의 청년 정책은 공급자 중심의 단기적인 일자리 수 확보에 그쳤다. 누적된 문제들을 두고 현 정부는 ‘노동개혁’의 기치 아래 ‘청년희망펀드’같은 홍보성 정책과 함께 신규고용창출의 해법으로 임금피크제와 일반해고 허용이라는 근거 없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없이 사용자 측의 노동유연성만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는 일자리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지역 정부에서는 실질적인 청년 정책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다.
우선 성남시에서 도입 의사를 밝힌 “청년배당”은 19세에서 24세의 모든 성남시민에게 여타 조건없이 월 100만 원 가량을 지급하는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정책으로, “자산심사나 노동요구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으로 정의된다.(BIEN)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제안한 “서울청년(활동)수당”을 포함한 “청년보장(youth guarantee)”은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을 대상으로 월 50만 원의 활동비와 사회 참여의 장을 제공한다. 사회통합을 위해 보조금과 사회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선별적인 통합패키지이다. 두 정책 모두 청년에게 직접 자원을 제공하는 안으로 반가운 관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정책을 둘러싼 논의는 청년 문제 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에서 복지정책이 발전해야 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생각을 전개해나가려 한다.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연 100만 원, 월로 환산하면 8만 원 정도를 지역 화폐로 지급한다. 액수도 적고 사용처에 제약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공유자산에 대한 청년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원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철학과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이 아이디어를 넘어 실현 가능한 제도로서 논의의 장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청년허브가 서울시에 제안한 청년보장은 중간지원조직에서 관에 제안하는, 즉, 아래로부터 구성된 정책제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관과 현장을 연결하며 청년들의 복지수요가 단순 일자리가 아니라 관계, 기회 등 다면적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문제의식을 느껴온 청년허브의 경험이 보조금, 공간, 프로그램을 함께 제공하도록 설계된 정책의 세부에 녹아있다. 연 5,000여명의 ‘사회 밖 청년’들에게 최소 2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 월 50만 원의 활동비를 지원 하자는 계획이다.
청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얘기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보편적 현금지급과 선별적 통합패키지. 나는 기본소득 정책의 지지자로서 전자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청년배당에 내재한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이라는 원리가 앞으로 한국사회의 복지가 확충되는 과정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보편의 원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사회가 직면한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더 합리적인 방향성을 제안하고, 비용의 문제에 있어서도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복지시스템에서는 조건 없이 주는 것이 낫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부가 깊이 개입해온 국가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복지정책의 발전경로도 이와 연동되어 ‘선성장 후분배’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선별적 공공부조 정책 위주로 도입되어 왔다. 한국 복지의 모순적인 점은 국가의 복지지출 수준은 낮은 편, 즉 작은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시행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관의 힘이 강력하다는 점이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제권은 휘두르려고 하는 모양은 일상에서 곧잘 마주해온 권위주의의 비합리성과 꼭 닮았다. 경험상 이러한 패턴은 복지정책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의 지원을 받거나 함께 일하는 것의 피로감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사회안전망 구축의 길은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우선, 재정을 확보하여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관료제에서 작동하는 복지 전달 인프라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과 제도는 가시적이지만, 조직문화나 의사소통방식과 같은 인프라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그만큼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보다도 후자가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선별적 복지정책을 도입할 때는 상대적으로 후자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조건과 상황을 따지는 과정에서 관이 수급대상자에게 더 깊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공급자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복지는 효용을 발휘해야 할 현장에서 실패하기 십상이다.
일례로 지난 5월 동자동 쪽방촌에서 만난 한 기초생활수급자 분은 "국가가 자꾸 빈곤층을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다“며 다음과 같은 사정을 털어놓으셨다. 수급자들이 몸이 아파 정기적인 일을 하기 어려운데, 비정기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 2, 30만원은 ‘소득인정’이 되어 다음 달 생계급여에서 고스란히 깎여 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고 “소비활동에도 생산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생활에 갇히게 된다. 빈곤층의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실상 빈곤을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며 현장에서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에 이야기한 ‘선성장 후분배’ 프레임 속에 발전해 온 한국복지의 맥락과도 닿아있다. 복지예산을 효과성에 근거 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사정에 따라 결정하고, 이에 맞춰 집행과정에서 수급대상자 수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라는 악법을 유지하며 맞춤형복지라는 이름 아래 복지제도의 조건이 더 복잡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 청년배당 정책에서 참여제외의 조건에 주 15시간 이상 노동이 들어간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의 계층하락이 계속되고 있고,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계산해 봐도 빈곤층의 수가 300만 명을 상회하는데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약 13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책의사결정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복지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는 선별적 복지정책의 집행과정에서 무능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복지전달체계는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이고 비효율적인 경로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복지인프라는 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책 설계 과정에서 애초에 조건을 삭제함으로서 복지 전달 과정에 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프라 혁신의 측면에서도 개인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급하는 편이 더 낫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정부 기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조직 내부 혁신을 통해 인프라가 변화 할 가능성은 무척 낮다. 따라서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급함으로서 정부와 개인들 간의 의존관계를 변화시키고 개인들의 발언권을 강화해 외부의 압력이 기능하게 만드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방은 개인들을 지원하는 것
2015년 한국사회가 놓여있는 시대적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따라잡아야 할 미래는 줄곧 서구에 선진국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 미래는 눈에 아주 잘 보이는 형태였다. 국가라는 컨트롤 타워의 지시에 따라 도로를 깔고, 교량을 짓고, 높은 빌딩을 짓고, 수출량을 달성하는 것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반면 “저녁이 있는 삶”정도의 슬로건이 가장 구체적인 심상이었던 ‘삶의 질’, 즉, 복지라는 것은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웠다. 제도는 덜 뚜렷한 것이었고, 성장 동력이 떨어져가던 시점에서야 그 필요성을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래는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한 미래는 정말로 어둠 속에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선진국’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미래 예측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고령화, 일자리를 위협하는 기술발전, 에너지 자원 문제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요인들이다. 이 시대를 살아나가야 할 청년들은 미래의 비전을 모방이 아니라 창안해 내야 한다. 전례 없는 어려운 과제다. 국가가 성과목표를 지시하는 몇 개년 계획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일자리 정책의 실패가 이미 한 사례다. 기업 및 기관에 일자리 수를 늘리라고 지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간절하게 해결하고 싶은 이들, 즉 문제의 당사자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원하는 것이 이 복잡한 문제를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일자리 문제 뿐 아니라 앞에 이야기 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처와 비전도 나는 같은 방법, 즉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원해 역동성을 촉진하는 것이 사회의 문제 해결력을 제고한다는 가설을 갖고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불확실성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펼칠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은 다음 세대가 새로운 기술을 학습하고, 낡은 관습과 결별하고, 사회의 방향성을 주도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확실성은 기회보다 불안으로 인식된다. ‘삼포세대’ 같은 말은 더 이상 기존의 사회재생산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의 삶에 어떤 절망과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청년은 ‘포기’하는 존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존 체제가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제공하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사회재생산 체제의 동력에는 이중노동시장의 강화, 가족주의와 성차별 문화의 재생산, 과도한 사교육 같은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진일보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인식하기엔 지금 개개인들이 놓인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한국인의 81%가 직장 선택 시 소득과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OECD 평균 53.7%) 첫 직장에서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하면 더 힘들어질 미래가 명약관화한데 당장의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시간에 걸쳐 스킬을 익히기보다는 일단 필요한 스펙부터 쌓고, 지지 않기 위한 요령을 구하게 된다. 필요한 만큼만 쌓은 스펙은 자신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감 속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력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욕 자체를 소진시킨다. (인구 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 세대가 축적되는 성과 없이 이 무력감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다. 이 세대가 불확실한 미래를 넘어가야 할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무력감은 심리적인 문제이지만 ‘힐링’이나 ‘계몽’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를 버티느라 미래를 무시하는 것은 시간을 빚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래에 예측 가능한 상수를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제안하는 사회안전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가며 : 청년의 정치와 정책
지금도 종종 쓰이는 말이지만 2000년대 중반에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고생 모르고 자라서 부모 품을 벗어날 줄 모르는 청년세대를 경멸을 담아 부르는 단어였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반값 등록금 이슈가 점화 되고, 청년이 처한 현실이 공론화되면서 이제 청년은 일자리도 없고 자원도 없고 연애도 못하는 안쓰러운 존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프레임은 지원을 요구하면서, 청년들이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설명하게 만든다. 여기서 얻어낸 것들이 있고, 여전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삼포세대’라는 언어는 편리하지만 한계도 그만큼 명확하다. 이제는 주변적 위치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때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 청년이 사회 전반에 대해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이러한 발화가 앞 세대의 담론에 동원될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청년이 청년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구분해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청년이 정책을 경유해 사회적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거시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순위의 위에 있는 당사자로 청년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_
사족을 덧붙이자니 좀 민망하지만, 아무튼 길이에 비해서 꽤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디테일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언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한국 복지시스템에 대한 주요 레퍼런스는 <빈곤을 보는 눈>(신명호, 2013)과 인권위의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2013), 양재진(2008), 송다영(2014)인데, 사회복지 분야에서 이 분들이 어떤 입장과 위치에 있는지 지형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은 것이라 놓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비판과 조언을 기다립니다. _ 2016.2.10
행사에 대한 상세정보와 전체 자료집을 위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청년이 사회안전망에 대해 말하자
‘88만원 세대’ 담론의 등장 이후 고용, 결혼 등 사회재생산의 맥락에서 청년이 문제적 주체로 떠오른 지 오래되었으나 그간 중앙정부의 청년 정책은 공급자 중심의 단기적인 일자리 수 확보에 그쳤다. 누적된 문제들을 두고 현 정부는 ‘노동개혁’의 기치 아래 ‘청년희망펀드’같은 홍보성 정책과 함께 신규고용창출의 해법으로 임금피크제와 일반해고 허용이라는 근거 없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안전망 없이 사용자 측의 노동유연성만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는 일자리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지역 정부에서는 실질적인 청년 정책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다.
우선 성남시에서 도입 의사를 밝힌 “청년배당”은 19세에서 24세의 모든 성남시민에게 여타 조건없이 월 100만 원 가량을 지급하는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소득보장정책으로, “자산심사나 노동요구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으로 정의된다.(BIEN)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제안한 “서울청년(활동)수당”을 포함한 “청년보장(youth guarantee)”은 사회에서 배제된 청년들을 대상으로 월 50만 원의 활동비와 사회 참여의 장을 제공한다. 사회통합을 위해 보조금과 사회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선별적인 통합패키지이다. 두 정책 모두 청년에게 직접 자원을 제공하는 안으로 반가운 관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정책을 둘러싼 논의는 청년 문제 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에서 복지정책이 발전해야 하는 방향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생각을 전개해나가려 한다.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연 100만 원, 월로 환산하면 8만 원 정도를 지역 화폐로 지급한다. 액수도 적고 사용처에 제약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공유자산에 대한 청년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원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철학과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이 아이디어를 넘어 실현 가능한 제도로서 논의의 장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청년허브가 서울시에 제안한 청년보장은 중간지원조직에서 관에 제안하는, 즉, 아래로부터 구성된 정책제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관과 현장을 연결하며 청년들의 복지수요가 단순 일자리가 아니라 관계, 기회 등 다면적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문제의식을 느껴온 청년허브의 경험이 보조금, 공간, 프로그램을 함께 제공하도록 설계된 정책의 세부에 녹아있다. 연 5,000여명의 ‘사회 밖 청년’들에게 최소 2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 월 50만 원의 활동비를 지원 하자는 계획이다.
청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얘기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보편적 현금지급과 선별적 통합패키지. 나는 기본소득 정책의 지지자로서 전자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청년배당에 내재한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이라는 원리가 앞으로 한국사회의 복지가 확충되는 과정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보편의 원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사회가 직면한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더 합리적인 방향성을 제안하고, 비용의 문제에 있어서도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복지시스템에서는 조건 없이 주는 것이 낫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부가 깊이 개입해온 국가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복지정책의 발전경로도 이와 연동되어 ‘선성장 후분배’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선별적 공공부조 정책 위주로 도입되어 왔다. 한국 복지의 모순적인 점은 국가의 복지지출 수준은 낮은 편, 즉 작은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시행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관의 힘이 강력하다는 점이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제권은 휘두르려고 하는 모양은 일상에서 곧잘 마주해온 권위주의의 비합리성과 꼭 닮았다. 경험상 이러한 패턴은 복지정책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의 지원을 받거나 함께 일하는 것의 피로감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사회안전망 구축의 길은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우선, 재정을 확보하여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관료제에서 작동하는 복지 전달 인프라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과 제도는 가시적이지만, 조직문화나 의사소통방식과 같은 인프라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그만큼 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보다도 후자가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선별적 복지정책을 도입할 때는 상대적으로 후자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조건과 상황을 따지는 과정에서 관이 수급대상자에게 더 깊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공급자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복지는 효용을 발휘해야 할 현장에서 실패하기 십상이다.
일례로 지난 5월 동자동 쪽방촌에서 만난 한 기초생활수급자 분은 "국가가 자꾸 빈곤층을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다“며 다음과 같은 사정을 털어놓으셨다. 수급자들이 몸이 아파 정기적인 일을 하기 어려운데, 비정기적인 노동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 2, 30만원은 ‘소득인정’이 되어 다음 달 생계급여에서 고스란히 깎여 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고 “소비활동에도 생산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생활에 갇히게 된다. 빈곤층의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실상 빈곤을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며 현장에서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에 이야기한 ‘선성장 후분배’ 프레임 속에 발전해 온 한국복지의 맥락과도 닿아있다. 복지예산을 효과성에 근거 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사정에 따라 결정하고, 이에 맞춰 집행과정에서 수급대상자 수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제라는 악법을 유지하며 맞춤형복지라는 이름 아래 복지제도의 조건이 더 복잡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 청년배당 정책에서 참여제외의 조건에 주 15시간 이상 노동이 들어간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의 계층하락이 계속되고 있고,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계산해 봐도 빈곤층의 수가 300만 명을 상회하는데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약 13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책의사결정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복지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는 선별적 복지정책의 집행과정에서 무능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복지전달체계는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이고 비효율적인 경로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복지인프라는 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책 설계 과정에서 애초에 조건을 삭제함으로서 복지 전달 과정에 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프라 혁신의 측면에서도 개인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급하는 편이 더 낫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정부 기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조직 내부 혁신을 통해 인프라가 변화 할 가능성은 무척 낮다. 따라서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급함으로서 정부와 개인들 간의 의존관계를 변화시키고 개인들의 발언권을 강화해 외부의 압력이 기능하게 만드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방은 개인들을 지원하는 것
2015년 한국사회가 놓여있는 시대적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따라잡아야 할 미래는 줄곧 서구에 선진국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 미래는 눈에 아주 잘 보이는 형태였다. 국가라는 컨트롤 타워의 지시에 따라 도로를 깔고, 교량을 짓고, 높은 빌딩을 짓고, 수출량을 달성하는 것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반면 “저녁이 있는 삶”정도의 슬로건이 가장 구체적인 심상이었던 ‘삶의 질’, 즉, 복지라는 것은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웠다. 제도는 덜 뚜렷한 것이었고, 성장 동력이 떨어져가던 시점에서야 그 필요성을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래는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한 미래는 정말로 어둠 속에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선진국’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미래 예측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고령화, 일자리를 위협하는 기술발전, 에너지 자원 문제로,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요인들이다. 이 시대를 살아나가야 할 청년들은 미래의 비전을 모방이 아니라 창안해 내야 한다. 전례 없는 어려운 과제다. 국가가 성과목표를 지시하는 몇 개년 계획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일자리 정책의 실패가 이미 한 사례다. 기업 및 기관에 일자리 수를 늘리라고 지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간절하게 해결하고 싶은 이들, 즉 문제의 당사자들에게 직접 자원을 지원하는 것이 이 복잡한 문제를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일자리 문제 뿐 아니라 앞에 이야기 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처와 비전도 나는 같은 방법, 즉 개인들에게 자원을 지원해 역동성을 촉진하는 것이 사회의 문제 해결력을 제고한다는 가설을 갖고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불확실성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펼칠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은 다음 세대가 새로운 기술을 학습하고, 낡은 관습과 결별하고, 사회의 방향성을 주도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확실성은 기회보다 불안으로 인식된다. ‘삼포세대’ 같은 말은 더 이상 기존의 사회재생산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의 삶에 어떤 절망과 불안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청년은 ‘포기’하는 존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존 체제가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제공하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사회재생산 체제의 동력에는 이중노동시장의 강화, 가족주의와 성차별 문화의 재생산, 과도한 사교육 같은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진일보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인식하기엔 지금 개개인들이 놓인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한국인의 81%가 직장 선택 시 소득과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OECD 평균 53.7%) 첫 직장에서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하면 더 힘들어질 미래가 명약관화한데 당장의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시간에 걸쳐 스킬을 익히기보다는 일단 필요한 스펙부터 쌓고, 지지 않기 위한 요령을 구하게 된다. 필요한 만큼만 쌓은 스펙은 자신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감 속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력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욕 자체를 소진시킨다. (인구 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 세대가 축적되는 성과 없이 이 무력감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다. 이 세대가 불확실한 미래를 넘어가야 할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무력감은 심리적인 문제이지만 ‘힐링’이나 ‘계몽’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를 버티느라 미래를 무시하는 것은 시간을 빚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래에 예측 가능한 상수를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제안하는 사회안전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가며 : 청년의 정치와 정책
지금도 종종 쓰이는 말이지만 2000년대 중반에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고생 모르고 자라서 부모 품을 벗어날 줄 모르는 청년세대를 경멸을 담아 부르는 단어였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반값 등록금 이슈가 점화 되고, 청년이 처한 현실이 공론화되면서 이제 청년은 일자리도 없고 자원도 없고 연애도 못하는 안쓰러운 존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프레임은 지원을 요구하면서, 청년들이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설명하게 만든다. 여기서 얻어낸 것들이 있고, 여전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삼포세대’라는 언어는 편리하지만 한계도 그만큼 명확하다. 이제는 주변적 위치에서 중심으로 이동할 때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 청년이 사회 전반에 대해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이러한 발화가 앞 세대의 담론에 동원될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청년이 청년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구분해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청년이 정책을 경유해 사회적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거시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순위의 위에 있는 당사자로 청년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_
사족을 덧붙이자니 좀 민망하지만, 아무튼 길이에 비해서 꽤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디테일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언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한국 복지시스템에 대한 주요 레퍼런스는 <빈곤을 보는 눈>(신명호, 2013)과 인권위의 사회복지사 인권상황 실태조사(2013), 양재진(2008), 송다영(2014)인데, 사회복지 분야에서 이 분들이 어떤 입장과 위치에 있는지 지형을 파악하지 못하고 읽은 것이라 놓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비판과 조언을 기다립니다. _ 2016.2.10
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의 낙원상가에서의 마지막 상영이 있었다. 아람이 표를 예매해 준 덕분에 무사히 관람했다. 자끄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 les desmoiselles de Rochefort>(1967)을 보았다. 2009년에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놓친 게 약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지루하지 않을까 약간 걱정했는데 오프닝 시퀀스가 너무 근사한 데다가 영화를 인솔하는 미셸 르그랑의 음악이 유려하고 힘이 넘쳐서 그냥 영화의 장력 속으로 슉 끌려들어갔다.
아래는 메모.
- 자끄 드미의 영화를 볼 때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 사람의 어떤 점을 그렇게 아꼈는지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나만의 일반론 : 흐르는 물. 유연하고 풍성한 리듬을 가장 잘 구사하는 감독들은 프랑스에 있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영화가 강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빛과 어둠의 드라마틱한 미장센은 이탈리아 감독들이 가장 뛰어나게 활용하고, 미국 감독들은 굉장한 정신적 장악력으로 세계를 영화적으로 치밀하게 구조화한 작품을 보여주곤 한다.
- 위의 얘기를 꺼낸 까닭은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리듬과 색의 영화였기 때문. 사실상 색들도 리듬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동선과 편집과 미장센과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심포니를. 내용은 시종일관 낭만, 운명, 사랑 타령이어서 프랑스인의 자기지시적 농담으로 보일 정도인데(옆자리 남자가 영화 내내 코로 웃어대서 조금 거슬렸다),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는 치밀한 계산을 뒤로한 것이라 정말 감탄했다. 음악-연기-카메라의 동선-색감 모든 게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동되서 움직였기에 나왔을 결과인데. 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변태잖아.
- 성적인 코드를 전혀 잘라내지 않고도 저런 무드,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프랑스 인의 변태력이란... 매끈하게 일그러진 일본 미소녀 그림보다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장미향 마카롱에서 관능을 느껴보세요 하는 느낌. 그런데 그 어조가 의뭉스럽지도 않아서 조금 황당. 문화적 차이일까.
아무튼 경쾌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갔던 건 12년 전 고1 때, 아트선재센터에서 아빠와 만나 마이클 파웰의 <분홍신 The Red Shoes>(1948)을 봤었다. 아빠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의 여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내게 보여줬던 것 같다.
아래는 작년 초였나 서울아트시네마를 위한 관객지지글을 모을 때 썼다가 타이밍을 놓쳐 보내지 못했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시네마테크가 마모되고 소멸되었어야 할 나의 개인적 취향을 지지하고 보호해 준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_
누군가 내게 서울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강과 서울아트시네마를 말할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내 고향은 친근하지 않다. 가끔은 어쩌다 우리 집에서 이런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주는 부모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와 너무 안닮았기 때문인데, 특히 시간감각에 있어 그렇다. 도심에서 얼굴없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자주 밀치고 지나갈 때 이를 실감한다. 서울의 시간은 빠르구나. 나와는 영 박자가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은 나의 집이다. (내 느림은 서울의 빠른 시스템에 기대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괴로운 것은 괴롭다. 가끔 남의 시간이 내 시간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꺼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 서울아트시네마는 더 없는 위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느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낙원상가 옥상에 올라, 밖의 빛을 무시하는 컴컴한 극장 속에 무릎을 당겨안고 앉아있으면 다른 모든 시간들은 잦아들고 낯선 시간만 스크린 위에 남아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바다를 보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차의 시선을 보고, 탭댄스를 보고, 배가 전쟁을 관통하는 걸 보고, 안 가본 대륙의 모르는 시대를 감지하고, 편집된 시선들이 어긋날 때 감정이 실패하며 쪼개지는 틈을 보고, 영어, 불어, 대만어, 일어, 이태리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칸디나비아어 따위를 들었다. 가끔은 잠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빠져나오면 불화하던 시간들이 다시 스타트라인에 가지런히 리셋되어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들이 내 삶을 바꿔놓지는 않았지만, 삶을 지속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다. 각별한 이들이 각별한 시공간으로부터 불려온 빛과 소리들의 기운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어떤 작품들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고, 아마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서울시에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는 살 수 없다. 영화가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백희원('관객들의 대화'운영팀)
p.s- 사적인 얘기는 이렇고, 시민으로서 지당한 말을 좀 더 보태야겠다. 한국에 시네마테크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지난 십 몇 여년 간 한국 영화계가 거둬 온 성취와 비교해보면 이상하고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12년이나 된 자생적인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문화정책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정부와 달리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시민들이 사는 도시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공적 지원을 받아 마땅하다. 박원순 시장이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메모.
- 자끄 드미의 영화를 볼 때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 사람의 어떤 점을 그렇게 아꼈는지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 나만의 일반론 : 흐르는 물. 유연하고 풍성한 리듬을 가장 잘 구사하는 감독들은 프랑스에 있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영화가 강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빛과 어둠의 드라마틱한 미장센은 이탈리아 감독들이 가장 뛰어나게 활용하고, 미국 감독들은 굉장한 정신적 장악력으로 세계를 영화적으로 치밀하게 구조화한 작품을 보여주곤 한다.
- 위의 얘기를 꺼낸 까닭은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리듬과 색의 영화였기 때문. 사실상 색들도 리듬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동선과 편집과 미장센과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심포니를. 내용은 시종일관 낭만, 운명, 사랑 타령이어서 프랑스인의 자기지시적 농담으로 보일 정도인데(옆자리 남자가 영화 내내 코로 웃어대서 조금 거슬렸다),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는 치밀한 계산을 뒤로한 것이라 정말 감탄했다. 음악-연기-카메라의 동선-색감 모든 게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동되서 움직였기에 나왔을 결과인데. 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변태잖아.
- 성적인 코드를 전혀 잘라내지 않고도 저런 무드, 저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프랑스 인의 변태력이란... 매끈하게 일그러진 일본 미소녀 그림보다도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장미향 마카롱에서 관능을 느껴보세요 하는 느낌. 그런데 그 어조가 의뭉스럽지도 않아서 조금 황당. 문화적 차이일까.
아무튼 경쾌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 처음 갔던 건 12년 전 고1 때, 아트선재센터에서 아빠와 만나 마이클 파웰의 <분홍신 The Red Shoes>(1948)을 봤었다. 아빠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의 여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내게 보여줬던 것 같다.
아래는 작년 초였나 서울아트시네마를 위한 관객지지글을 모을 때 썼다가 타이밍을 놓쳐 보내지 못했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시네마테크가 마모되고 소멸되었어야 할 나의 개인적 취향을 지지하고 보호해 준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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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서울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강과 서울아트시네마를 말할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내 고향은 친근하지 않다. 가끔은 어쩌다 우리 집에서 이런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주는 부모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와 너무 안닮았기 때문인데, 특히 시간감각에 있어 그렇다. 도심에서 얼굴없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자주 밀치고 지나갈 때 이를 실감한다. 서울의 시간은 빠르구나. 나와는 영 박자가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은 나의 집이다. (내 느림은 서울의 빠른 시스템에 기대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괴로운 것은 괴롭다. 가끔 남의 시간이 내 시간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꺼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 서울아트시네마는 더 없는 위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느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낙원상가 옥상에 올라, 밖의 빛을 무시하는 컴컴한 극장 속에 무릎을 당겨안고 앉아있으면 다른 모든 시간들은 잦아들고 낯선 시간만 스크린 위에 남아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바다를 보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차의 시선을 보고, 탭댄스를 보고, 배가 전쟁을 관통하는 걸 보고, 안 가본 대륙의 모르는 시대를 감지하고, 편집된 시선들이 어긋날 때 감정이 실패하며 쪼개지는 틈을 보고, 영어, 불어, 대만어, 일어, 이태리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칸디나비아어 따위를 들었다. 가끔은 잠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빠져나오면 불화하던 시간들이 다시 스타트라인에 가지런히 리셋되어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영화들이 내 삶을 바꿔놓지는 않았지만, 삶을 지속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다. 각별한 이들이 각별한 시공간으로부터 불려온 빛과 소리들의 기운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어떤 작품들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고, 아마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서울시에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는 살 수 없다. 영화가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백희원('관객들의 대화'운영팀)
p.s- 사적인 얘기는 이렇고, 시민으로서 지당한 말을 좀 더 보태야겠다. 한국에 시네마테크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지난 십 몇 여년 간 한국 영화계가 거둬 온 성취와 비교해보면 이상하고 민망한 일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12년이나 된 자생적인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문화정책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정부와 달리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시민들이 사는 도시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공적 지원을 받아 마땅하다. 박원순 시장이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한다.
2015년 2월 19일 목요일
2014 정리
(이걸 구정에 업로드하는 것은 농담도 아니고 그냥 게을러서임. 내용은 201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해당.)
2014년이 너무 싫어서 사실 2014년의 시간에 충분히 동기화되어 살지 않았다. 대학원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있었던 것, 낮보다는 밤에 활동했고, 그 시간마저 학과 수업 관련 텍스트나 사적인 관계에 할애했던 것 역시 그런 생활 감각에 일조했을 것이다.
죽음들만이 방까지 전달되어 방점처럼 남았다. 세 모녀, 부산외대 신입생들, 장애인 송일국 씨, 세월호 승객들, 윤 일병, 판교의 관중들, 현대아파트 경비 분, 제 2 롯데타워 건설현장 노동자 분, 신해철 (무려) 등.
아무튼 한 해 동안 뭘 하기는 했는데, 미미하니까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 2014년에는 우리가 말하기 위한 자리를 우리가 만들었는데, 2016년에는 남들이 불러주는 일도 일어나면 좋겠다. 2015년에 의의를 성취할 일이다.
입력
올해의 영화니 책이니 별로 언급할 것이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것, 가지 못한 곳의 리스트가 더 중요한 해였다. 분더바 투쟁현장에도 거의 가 보지 못했고, 밀양으로부터는 어쩌다 우연히 귤이나 얻어받았다. 성소수자 운동이 재점화 된 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고, 때문에 한국에서도 인권 운동, '정체성'의 운동이 다시 가능할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해였는데 그 현장에도 없었다. APAP도 못 가봤군. 귀신, 간첩, 할머니는 정신 차려보니 끝나있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가서는 돈을 거의 못 썼다.
출력
2014 반성
2015 목표
2015년은 총선을 한 해 앞둔 해. 한국에서 열릴 기본소득 국제대회를 한 해 앞둔 해. 논문을 써야하는 해.
도전적인 과제 몇 가지로 목표를 집중해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도 학교 공부를 허덕이며 해냈는데, 올해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강도가 더 세질 예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학교 밖에서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적어도 내 머릿 속에서는 아주 연결이 잘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관점으로 작용하는 두 상이한 주제를 어떻게 나의 입장에서 남들에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잘 엮어볼 것인가. 이것은 즐거운 과제이다. 문제는 체력. 재미가 피곤에게 번번이 진다. 벌써?
아빠가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해이기도 하다. 나의 운명 뿐 아니라 우리 남매의 운명을 고민해야 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남동생에 대한 고민을 더 미룰 시간이 없다.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동생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엄마는 평생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왔고, 가능한 거의 모든 시도를 해봤지만 동생은 결국 지금 혼자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014년이 너무 싫어서 사실 2014년의 시간에 충분히 동기화되어 살지 않았다. 대학원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있었던 것, 낮보다는 밤에 활동했고, 그 시간마저 학과 수업 관련 텍스트나 사적인 관계에 할애했던 것 역시 그런 생활 감각에 일조했을 것이다.
죽음들만이 방까지 전달되어 방점처럼 남았다. 세 모녀, 부산외대 신입생들, 장애인 송일국 씨, 세월호 승객들, 윤 일병, 판교의 관중들, 현대아파트 경비 분, 제 2 롯데타워 건설현장 노동자 분, 신해철 (무려) 등.
아무튼 한 해 동안 뭘 하기는 했는데, 미미하니까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 2014년에는 우리가 말하기 위한 자리를 우리가 만들었는데, 2016년에는 남들이 불러주는 일도 일어나면 좋겠다. 2015년에 의의를 성취할 일이다.
입력
올해의 영화니 책이니 별로 언급할 것이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것, 가지 못한 곳의 리스트가 더 중요한 해였다. 분더바 투쟁현장에도 거의 가 보지 못했고, 밀양으로부터는 어쩌다 우연히 귤이나 얻어받았다. 성소수자 운동이 재점화 된 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고, 때문에 한국에서도 인권 운동, '정체성'의 운동이 다시 가능할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해였는데 그 현장에도 없었다. APAP도 못 가봤군. 귀신, 간첩, 할머니는 정신 차려보니 끝나있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가서는 돈을 거의 못 썼다.
- 부모님과 함께 본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전시에서는 얻은 바가 많았다. 특히 1층에 들어서는 순간의 배치. 시대의 흐름을 시각화 해 원경으로 배치하고, 산책자를 위한 1인칭들의 경로를 만들고, 청자와 독자를 위한 이입의 공간을 설치. '우리'를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건 '나'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나는 기획의 서론 본론 결론이 아니라 기획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채널의 효과를 생각하게 되었다. 입체적인 심상이 남았는데 두고두고 사고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도움이 되는 책들을 학교 안팎에서 읽었지만 정리 할 만한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에게 더 명시적으로 익히지 않으면 사실 익히는 게 아닐지도. 그 외에 좋아했던 시인들의 시집이 우르르 출간되어서 오랜만에 몇 권의 시집을 읽었는데,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한 단어 단어들이 너무 자극적이라 아주 느리게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다 못 읽었다. 김행숙, 이제니, 신해욱, 이영주. 다 읽고 모국어랑 오래 떨어져 지낸 친구한테 고스란히 선물할 생각. 시집은 워낙 남에게 잘 주어서 이제는 손님처럼 느껴진다.
- 기억나는대로 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적어보자면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논픽션 다이어리, 기디언 경감, 혹성탈출, 카트, 액트 오브 킬링, 곤 걸. 다 재미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에 대해서는 글을 썼고, 하나에 대해서는 글을 쓰려다 실패했다.
- 그리고 유튜브를 자주 봤다. 유명한 쇼와 아이돌들, 대부분의 걸그룹, 코난 오브라이언 번역 클립 같은 것들.
- 웹툰도 많이 봤다. 레진 코믹스에서 하양지 작가의 달콤한 애드립과 우리는 시간문제, 이자혜 작가의 미지의 세계를 손꼽아 기다려가며 읽었다. 내 취향의 두 정점이었다. (아마도) 같은 또래의 작가들이 제시하는 세계라는 건 각별하다.
- 음악은 그냥 매년 듣던 거 또 들었다. 나에게 음악은 이제 그냥 분위기인 것 같다. 어느 시기의 취향이 박제되었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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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영화 상영회
00 그라운드
기본소득 영화 상영회 @ 동네형들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관객들 3회-7회
- 참여
밀양과 나 집담회
복지국가 vs 기본소득 대토론회
우리 민주와 썸타기
청년 녹색당 여름 워크샵 휴먼 라이브러리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녹색당 기본소득 특별 위원회
- 발행
복지국가 vs 기본소득 대토론회 토론문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 토론문
영화잡지 아노 3호 : 20세기 팝업북, 21세기 서사의 배치,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리뷰
나불나불 골병 :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 답답한 시대, 기본소득으로 시야확보
2014 반성
- 좋은 내용의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결정을 내려야 할 타이밍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게다가 망설임은 결정의 질에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 실패할 거면 빨리 해보는 게 좋다.
2015 목표
- 매일의 시간을 들여서 의미있는 논문을 쓴다.
- 이틀의 간격으로 운동하고 건강을 지킨다.
- 매주의 모임을 통해 유효한 운동을 한다.
- 제 2회 00 그라운드의 정확한 위치설정으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기본소득의 핵심 가치를 개발하고 방향 설정을 명확히 하여 구체를 제시하고 담론의 물꼬를 튼다.
- 새로운 관객의 대화 포맷을 시도한다.
2015년은 총선을 한 해 앞둔 해. 한국에서 열릴 기본소득 국제대회를 한 해 앞둔 해. 논문을 써야하는 해.
도전적인 과제 몇 가지로 목표를 집중해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도 학교 공부를 허덕이며 해냈는데, 올해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강도가 더 세질 예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학교 밖에서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적어도 내 머릿 속에서는 아주 연결이 잘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관점으로 작용하는 두 상이한 주제를 어떻게 나의 입장에서 남들에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잘 엮어볼 것인가. 이것은 즐거운 과제이다. 문제는 체력. 재미가 피곤에게 번번이 진다. 벌써?
아빠가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해이기도 하다. 나의 운명 뿐 아니라 우리 남매의 운명을 고민해야 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남동생에 대한 고민을 더 미룰 시간이 없다.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동생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엄마는 평생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왔고, 가능한 거의 모든 시도를 해봤지만 동생은 결국 지금 혼자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답답한 시대, 기본소득으로 시야확보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발행 중인 연속 칼럼 <시대정신 기본소득>에 실린 글입니다. 이후의 칼럼들을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소득의 이야기가 있다. 한 번 들어보자 :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매 달 충분한 생활비가 지급된다면, 우선 가난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해고가 곧 사형선고라는 공식은 무효해질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으니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일자리의 합당한 개선을 이끌어올 것입니다. 소득증가는 소비를 촉진시키므로 시장 경기도 활성화될 것입니다. 또한 보편적 복지로서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불러오며 조세 정의의 실현과 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성과들을 내어놓고, 생태적인 삶의 실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불황, 생태문제까지 해결한다니, 아무래도 사기 아닐까? 솔직히 그렇다, 반쯤은. 위의 예를 돌아보자면, 시장을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기본소득은,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상충한다. 더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충돌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반만 사기인 까닭은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 각각에 결합하여 강력한 힘을 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없이’라는 기본소득의 성격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주체인 모든 ‘개인’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행위자들에게 자원을 지급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주체들에게 자원이 지급된다면, 문제는 ‘어떤 욕망을 따라 그 자원들이 흘러가고, 또 어떤 문제를 구심점 삼아 재편될 것인가’이다. 일단 모르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각자 어떤 욕망과 임무들을 발견하게 될까? 지금 기본소득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사고, 질병, 분쟁, 불황 등 만성적인 위기감과 반복되는 절망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문제 해결력이 요구되는 시대상황 앞에 우리 대부분이 문제를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무력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80년대 생 이후 청년들은 그렇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통계 지표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무력감의 덫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준다.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허튼 꿈이나마 꿔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로소 당면한 리스크들을 바라 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이 지면은 앞으로 다양한 주체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대표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소득 이야기를 수집함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이 ‘기본소득 뷰’를 통해 검토해 볼 예정이다. 이 시도는 기본소득의 문제 해결력을 입증해 당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본소득을 통해 미션들을 발굴해내고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지도를 그리기 위한 사전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소규모의 이야기들이 모여 다양성의 미학을 성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합적인 사회적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 실마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우선은 가볍게 이야기들을 늘어놓아 보기로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소득의 이야기가 있다. 한 번 들어보자 :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매 달 충분한 생활비가 지급된다면, 우선 가난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해고가 곧 사형선고라는 공식은 무효해질 것입니다. 직장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으니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억지로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일자리의 합당한 개선을 이끌어올 것입니다. 소득증가는 소비를 촉진시키므로 시장 경기도 활성화될 것입니다. 또한 보편적 복지로서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불러오며 조세 정의의 실현과 사회 통합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성과들을 내어놓고, 생태적인 삶의 실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불황, 생태문제까지 해결한다니, 아무래도 사기 아닐까? 솔직히 그렇다, 반쯤은. 위의 예를 돌아보자면, 시장을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기본소득은,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상충한다. 더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충돌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반만 사기인 까닭은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 각각에 결합하여 강력한 힘을 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없이’라는 기본소득의 성격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주체인 모든 ‘개인’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행위자들에게 자원을 지급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주체들에게 자원이 지급된다면, 문제는 ‘어떤 욕망을 따라 그 자원들이 흘러가고, 또 어떤 문제를 구심점 삼아 재편될 것인가’이다. 일단 모르는 사람들은 차치하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각자 어떤 욕망과 임무들을 발견하게 될까? 지금 기본소득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사고, 질병, 분쟁, 불황 등 만성적인 위기감과 반복되는 절망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문제 해결력이 요구되는 시대상황 앞에 우리 대부분이 문제를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은 무력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80년대 생 이후 청년들은 그렇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통계 지표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향하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무력감의 덫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준다.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허튼 꿈이나마 꿔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로소 당면한 리스크들을 바라 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이 지면은 앞으로 다양한 주체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대표하며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소득 이야기를 수집함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이 ‘기본소득 뷰’를 통해 검토해 볼 예정이다. 이 시도는 기본소득의 문제 해결력을 입증해 당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본소득을 통해 미션들을 발굴해내고 이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지도를 그리기 위한 사전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소규모의 이야기들이 모여 다양성의 미학을 성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합적인 사회적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 실마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우선은 가볍게 이야기들을 늘어놓아 보기로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면,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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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기본소득,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백희원,
biyn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불우한 이야기: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 전방위이종문화리뷰지 <나불나불 9호: 골병>에 게재되었습니다.
0. 골병
“속으로 깊이 든 병”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가보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1. 이야기라는 세계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지 못한다. 대신 그 작고 유연한 몸을 숙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덕분에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혹은 시청각체험)은 다시 못 겪을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슬픔이 솟아나기 이전에 고통 그 자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울 겨를도 없었다. 고통의 장면들은 책을 덮거나, 화면을 끄고 나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꼭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무렵 학교에서 본 유니세프의 엽서 캠페인 영상은 나의 유년기를 지배한 이미지였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오갈 데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 가느다랗고 늘어진 검은 팔다리, 불뚝 튀어나온 배. 그 주위를 웅웅 맴도는 검은 파리들. 캠페인에 참여하고 따뜻한 버터밀크 같은 일러스트 엽서도 받았지만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종종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건너편 빈 벽을 마음의 스크린 삼아 몇 시간이고 어린이들을 떠올려 보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그러면 눈에 선했다.
2. 학급문고 경향
문제는 내가 내성적인 어린이었고, 매 학기 초의 단짝은 교실 맨 뒤에 놓여있는 학급 문고였으며, 낡은 신발장 같았던 그 빈약한 책장은 각종 한국창작동화, 학습만화, 위인전 전집들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습만화는 비교적 인기가 좋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인전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에 죽기 때문에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리하여 읽게 되는 한국창작동화들은 대개 ‘운수 좋은 날’과 ‘소나기’의 변형으로 분류될 법한 우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단 한 편이라도 행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를 바라며 그 동화집들을 도리 없이 읽어 나가곤 했다.
그건 정말 조금도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경험은 ‘상계동 아이들’(노경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바로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던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속의 상계동은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주공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비탈진 달동네로,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이들의 진열장이었다. 알콜 중독자 아빠를 둔 아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 맞아 죽는 병든 어머니를 둔 아이 등등. 작가는 곤계란 같은 음식을 무척 열심히 다루었는데, 거의 민속지 같았다. 2004년 재출간 되면서 나온 출판사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힘겹고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편안한 문장에 꼼꼼히 담아 놓았고, 슬픈 현실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 같다“
다 큰 머리로 보니 가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이라는 명실상부한 죄책감 해소용 자위행위를 왜 어린이들을 향해 한단 말인가? 어린이들은 거기 동참할 줄도 모르는데 뭘 어떡하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이 책을 비롯해 ‘불우한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한국 어린이책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당시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랐던 것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디어 산업이 감추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계몽?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 고난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건 설마 아니겠지.
3. 죄책감
그들이 뭘 의도했건 간에 여기에 진입한 어린이 독자가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통스러운 삶’ 뿐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경우, 이야기를 통과한 상처투성이 마음에는 한 가지 전리품만이 남아있었다. 죄책감. 우습게도 나는 자신이 가난하지도 않고 고아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점에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곤계란 같은 걸 먹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나는 켄터키 후라이드 오리지널 치킨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 옆에서 위축되는 현상과 사소한 욕망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죄책감의 기원을 불우한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통해 찾아보자. 책장을 열면 무력한 인물과, 제한된 공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시간에 따라 닥쳐오는 단선적인 세계가 있다. 수동적인 인물에게서는 능동적 욕망이나 영향력이 읽히지 않고, 이 단선적인 삶은 대안으로서의 다른 지평도 미래도 보여주지 않는다. 타개해야 할 악은 건드릴 수 없이 멀거나 막강하다. 지도를 그려볼 수 없는 세계는 개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는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공간의 제한(다른 길의 부재)이 비전을 차단함으로써, 독자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볼 때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도 차단당하게 된다. 이때, 가로막힌 시선이 돌아와 결국 향하는 곳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어린이는 백기를 든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미완의 내면을 손쉽게 장악해버린 죄책감이 죄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제인식 -> 문제해결”의 프로세스가 아닌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를 설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선함과 정의로움이 공통의 속성으로 취급되는 세계관을 그린다. 고통을 택하는 만큼 책임이 해소되는 것이 이 세계의 계산법이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병들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는 것으로 발전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다. 만사를 눈물의 알리바이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냥 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으로 기꺼이 벌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선한 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 이러한 욕망을 놀려대는 마음도 함께 자라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불행과 연민의 치킨게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의심과 추측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 한 심약한 어린이가 방어기제 없이 불행한 이야기를 거듭 통과했을 때 내면이 어떻게 병드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거듭 통과해야 했던 걸까. 이것을 어떤 의도의 결과로서 현상의 위치에 두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계동 아이들’은 독후감용 권장도서 목록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몽실 언니’, ‘아홉 살 인생’같은, 불우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주말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바 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에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학습시키고자 했던 어떤 선량함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불우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장애인이나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다.’ 장담컨대 수많은 방학숙제용 독후감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과 순응이란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선이라는, 신분 위계를 내포한 너그러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죄책감은 책을 덮은 뒤 문제의 원인, 즉 책임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가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스스로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경우의 수를 추가해 “문제인식 -> 책임묻기 -> 응징 혹은 반성을 통한 속죄”정도로 수정해보자. 이것이 유효한 사회라면, 공적인 문제도 사적인 차원의 속죄와 응징의 문제로 변환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즉, 개인들은 책임을 공통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강한 권위(보통은 국가일 것이다)가 누군가를 처절히 응징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책임을 느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서 출발해 자책이나 냉소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제 몫의 분노나 슬픔을 비개방적인 사적 네트워크나 지나치게 광대한 군증 속에서 군불 떼듯 연소시키는 사회에는 공공성을 구성하기 위한 언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담론의 자리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효과를 결합해보니 아주 불행한 처지는 피했다는 안도감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장착한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 그려진다. 문제없는 사람들이 세계의 복판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제 자리에서 바라만 보는 심상도. 최근에 현실에서 무게중심이 비어있었던 배, 씽크홀과 같은 진짜 구멍들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처참할 정도로 무능한 사회라는 구멍도.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요즘에는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안도감 보다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더 우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불우한 이야기는 효용을 잃었을텐데,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권장되고 있을까. 일단 오늘의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는 ‘마법 천자문’이다.
5. 모험의 세계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시대를 불문하고 어린이가 피해야 할 이야기, 어린이책의 탈을 쓰고 출판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독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들.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내면형성에 해롭다. 통상 죄책감이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은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면, 불우한 이야기들은 가타부타 욕망을 터부시 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조절기능을 발달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온오프 버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욕망 오프 상태에 맞춰 착한 아이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연민이나 위선, 피해의식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문제가 된다.
어린이 책이 그 대상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건 단속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세계라는 놀이터다. 아시다시피 열길 사람 속에 대한 성찰과 탐구는 이미 수많은 고전들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건 슬기로운 주인공과 그가 극복하고 고쳐나가야 할 엉망진창인 세계, 그리고 열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책 표지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어린이들은 비로소 세계 속에서 욕망과 임무를 일치시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다행히 나에게도 학급문고 외의 탈출구들이 있었다. 시공사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출판 된 양장본의 ‘로테와 루이제’(에리히 캐스트너)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라 잊지 못할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쌍둥이 소녀의 운명 같은 만남과 깜찍한 사랑공작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생애 최초로 ‘최애 작가님’의 자리에 등극했다. 독일인이었던 캐스트너는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부모를 잃거나 소외당해야 했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바로잡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경로를 선사했다. 그것은 90년대의 한국 어린이였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유머와 통쾌함, 그리고 용기였다.
6. 차라리 우스운 세계를
이 무렵의 나에게는 아프리카 어린이와 곤계란 외에도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상이나 책이 아니라 실제사건인데, 어느 날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아저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가 그 혼자만의 사정(射精)을 구경한 일이다. 그 장면은 진짜 우스꽝스러웠고, 나는 집에 뛰어 들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엄마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었다. “엄마! 모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오줌 쌌어. 그거 부끄러운 거지?” 물론 엄마는 신속히 연락을 취해 사건을 처리했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추행은 내 마음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않았다. 생뚱맞게 글을 마치게 되었는데, 성범죄자들을 덜 경계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요는 이렇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우리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방법이다.
0. 골병
“속으로 깊이 든 병”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가보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손에 잡혔다.
1. 이야기라는 세계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지 못한다. 대신 그 작고 유연한 몸을 숙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덕분에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혹은 시청각체험)은 다시 못 겪을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슬픔이 솟아나기 이전에 고통 그 자체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울 겨를도 없었다. 고통의 장면들은 책을 덮거나, 화면을 끄고 나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어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꼭 가상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무렵 학교에서 본 유니세프의 엽서 캠페인 영상은 나의 유년기를 지배한 이미지였다. 흰자위를 드러낸 채 오갈 데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 가느다랗고 늘어진 검은 팔다리, 불뚝 튀어나온 배. 그 주위를 웅웅 맴도는 검은 파리들. 캠페인에 참여하고 따뜻한 버터밀크 같은 일러스트 엽서도 받았지만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종종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건너편 빈 벽을 마음의 스크린 삼아 몇 시간이고 어린이들을 떠올려 보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그러면 눈에 선했다.
2. 학급문고 경향
문제는 내가 내성적인 어린이었고, 매 학기 초의 단짝은 교실 맨 뒤에 놓여있는 학급 문고였으며, 낡은 신발장 같았던 그 빈약한 책장은 각종 한국창작동화, 학습만화, 위인전 전집들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습만화는 비교적 인기가 좋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인전의 인물들은 늘 마지막에 죽기 때문에 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리하여 읽게 되는 한국창작동화들은 대개 ‘운수 좋은 날’과 ‘소나기’의 변형으로 분류될 법한 우울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단 한 편이라도 행복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를 바라며 그 동화집들을 도리 없이 읽어 나가곤 했다.
그건 정말 조금도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경험은 ‘상계동 아이들’(노경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단순한데, 내가 바로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던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속의 상계동은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주공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비탈진 달동네로, 그야말로 불우한 어린이들의 진열장이었다. 알콜 중독자 아빠를 둔 아이, 장애인 부모를 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 맞아 죽는 병든 어머니를 둔 아이 등등. 작가는 곤계란 같은 음식을 무척 열심히 다루었는데, 거의 민속지 같았다. 2004년 재출간 되면서 나온 출판사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힘겹고 어려운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편안한 문장에 꼼꼼히 담아 놓았고, 슬픈 현실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마치 작품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 같다“
다 큰 머리로 보니 가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 굿판”이라는 명실상부한 죄책감 해소용 자위행위를 왜 어린이들을 향해 한단 말인가? 어린이들은 거기 동참할 줄도 모르는데 뭘 어떡하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이 책을 비롯해 ‘불우한 이웃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한국 어린이책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당시의 저자와 편집자들은 어린이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랐던 것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디어 산업이 감추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계몽?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 고난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서 존경을 받고 싶었던 건 설마 아니겠지.
3. 죄책감
그들이 뭘 의도했건 간에 여기에 진입한 어린이 독자가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통스러운 삶’ 뿐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경우, 이야기를 통과한 상처투성이 마음에는 한 가지 전리품만이 남아있었다. 죄책감. 우습게도 나는 자신이 가난하지도 않고 고아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점에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곤계란 같은 걸 먹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나는 켄터키 후라이드 오리지널 치킨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 옆에서 위축되는 현상과 사소한 욕망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죄책감의 기원을 불우한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통해 찾아보자. 책장을 열면 무력한 인물과, 제한된 공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시간에 따라 닥쳐오는 단선적인 세계가 있다. 수동적인 인물에게서는 능동적 욕망이나 영향력이 읽히지 않고, 이 단선적인 삶은 대안으로서의 다른 지평도 미래도 보여주지 않는다. 타개해야 할 악은 건드릴 수 없이 멀거나 막강하다. 지도를 그려볼 수 없는 세계는 개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문제의 실마리는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공간의 제한(다른 길의 부재)이 비전을 차단함으로써, 독자는 문제적 상황을 바라볼 때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도 차단당하게 된다. 이때, 가로막힌 시선이 돌아와 결국 향하는 곳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어린이는 백기를 든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미완의 내면을 손쉽게 장악해버린 죄책감이 죄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제인식 -> 문제해결”의 프로세스가 아닌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를 설치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불행과 선함과 정의로움이 공통의 속성으로 취급되는 세계관을 그린다. 고통을 택하는 만큼 책임이 해소되는 것이 이 세계의 계산법이다. 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점점 병들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는 것으로 발전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다. 만사를 눈물의 알리바이로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냥 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으로 기꺼이 벌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선한 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은 권력욕 같은 것. 이러한 욕망을 놀려대는 마음도 함께 자라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불행과 연민의 치킨게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의심과 추측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 한 심약한 어린이가 방어기제 없이 불행한 이야기를 거듭 통과했을 때 내면이 어떻게 병드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왜 그런 이야기를 거듭 통과해야 했던 걸까. 이것을 어떤 의도의 결과로서 현상의 위치에 두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계동 아이들’은 독후감용 권장도서 목록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나 ‘몽실 언니’, ‘아홉 살 인생’같은, 불우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주말 공중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던 바 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에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학습시키고자 했던 어떤 선량함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불우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장애인이나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다.’ 장담컨대 수많은 방학숙제용 독후감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과 순응이란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선이라는, 신분 위계를 내포한 너그러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죄책감은 책을 덮은 뒤 문제의 원인, 즉 책임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문제인식 -> 자책 -> 속죄”의 기제가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스스로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경우의 수를 추가해 “문제인식 -> 책임묻기 -> 응징 혹은 반성을 통한 속죄”정도로 수정해보자. 이것이 유효한 사회라면, 공적인 문제도 사적인 차원의 속죄와 응징의 문제로 변환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즉, 개인들은 책임을 공통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강한 권위(보통은 국가일 것이다)가 누군가를 처절히 응징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책임을 느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서 출발해 자책이나 냉소로 들어설 것이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제 몫의 분노나 슬픔을 비개방적인 사적 네트워크나 지나치게 광대한 군증 속에서 군불 떼듯 연소시키는 사회에는 공공성을 구성하기 위한 언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담론의 자리도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효과를 결합해보니 아주 불행한 처지는 피했다는 안도감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장착한 평범하고 선량한 소시민이 그려진다. 문제없는 사람들이 세계의 복판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제 자리에서 바라만 보는 심상도. 최근에 현실에서 무게중심이 비어있었던 배, 씽크홀과 같은 진짜 구멍들을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처참할 정도로 무능한 사회라는 구멍도.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요즘에는 불행한 사건을 접할 때 안도감 보다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더 우선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불우한 이야기는 효용을 잃었을텐데,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권장되고 있을까. 일단 오늘의 어린이 책 베스트셀러는 ‘마법 천자문’이다.
5. 모험의 세계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시대를 불문하고 어린이가 피해야 할 이야기, 어린이책의 탈을 쓰고 출판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독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을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들.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내면형성에 해롭다. 통상 죄책감이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은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면, 불우한 이야기들은 가타부타 욕망을 터부시 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조절기능을 발달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온오프 버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욕망 오프 상태에 맞춰 착한 아이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연민이나 위선, 피해의식 같은 부작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는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문제가 된다.
어린이 책이 그 대상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건 단속해야 할 내면이 아니라 세계라는 놀이터다. 아시다시피 열길 사람 속에 대한 성찰과 탐구는 이미 수많은 고전들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읽으면 된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건 슬기로운 주인공과 그가 극복하고 고쳐나가야 할 엉망진창인 세계, 그리고 열어보고 싶을 만큼 예쁜 책 표지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어갈 때 어린이들은 비로소 세계 속에서 욕망과 임무를 일치시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다행히 나에게도 학급문고 외의 탈출구들이 있었다. 시공사의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출판 된 양장본의 ‘로테와 루이제’(에리히 캐스트너)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라 잊지 못할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쌍둥이 소녀의 운명 같은 만남과 깜찍한 사랑공작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리히 캐스트너는 생애 최초로 ‘최애 작가님’의 자리에 등극했다. 독일인이었던 캐스트너는 20세기 중반, 세계대전과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부모를 잃거나 소외당해야 했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바로잡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경로를 선사했다. 그것은 90년대의 한국 어린이였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유머와 통쾌함, 그리고 용기였다.
6. 차라리 우스운 세계를
이 무렵의 나에게는 아프리카 어린이와 곤계란 외에도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영상이나 책이 아니라 실제사건인데, 어느 날 방과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아저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기에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가 그 혼자만의 사정(射精)을 구경한 일이다. 그 장면은 진짜 우스꽝스러웠고, 나는 집에 뛰어 들어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엄마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었다. “엄마! 모르는 아저씨가 내 앞에서 오줌 쌌어. 그거 부끄러운 거지?” 물론 엄마는 신속히 연락을 취해 사건을 처리했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추행은 내 마음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않았다. 생뚱맞게 글을 마치게 되었는데, 성범죄자들을 덜 경계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요는 이렇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우리가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방법이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기본소득이 그리는 미래
*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회>의 토론문으로 발표된 글 입니다.
0. 소개
이 발제문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어떠한 사회를 꿈꾸며 활동을 해나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 미래까지 책임져야 할 청년(youth)으로서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결책을 바랍니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동등하게 배치될 수 있는 큰 사회상은 아닙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금액을 매 달 현금으로 지급하자”는 명료한 한 가지 아이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문제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 스위치와도 같고 따라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래사회와 관련된 몇 가지 결정적인 이슈들과 기본소득을 연결 지을 때 그려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미래: 기후변화, 인구고령화, 기술의 발전
21세기를 변화시킬 국가적 단위의 정책제안이라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기후변화 및 에너지자원 고갈이라는 생태문제와 인구고령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피크오일’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의 고갈은 대량생산의 비전을 꺼버렸고,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되어 이미 특정 지역에서는 높아진 해수면 높이에 주거를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인구고령화는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기대수명의 연장과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출산률 저하로 인해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노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확실하지 않은 채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고,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며 낮은 고용률까지 계속되면서 청년세대의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미래를 구원할 수는 없을까요? 전문가들은 기술발전이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대체할만한 생산력과 정밀함을 제공하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 및 정보화의 추세가 ‘공유’를 활성화 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자원의 절약이며 인류의 발전이지만, 우리의 생계가 임금노동에 저당 잡혀 있는 이상, 이는 일자리와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양날의 칼로 다가옵니다. 최근 적법성을 갖고 이슈가 되고 있는 우버나, 기존 시장을 위협할 만큼 커진 에어비앤비 같은 서비스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에 기술한 경향들은 확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 역량의 증진
너무 큰 문제의식은 무기력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개개인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의 역량을 키워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은 다양하고, 그만큼 불확실하지만,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개인은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에 대해 기본적인 협상력을 갖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방종’이 우려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유의 권리와 책임이라는 양면을 지닌 ‘자율성’의 강화와 그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2.1 노동의 자유
기본소득은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지급함으로서 노동과 소득 간의 고리를 끊습니다. 즉, 생계를 위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에 매달릴 필요가 사라집니다. 이 말은 평생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쉴 때는 쉬면서 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긴 동시에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이제는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휴식의 생산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영학자 린다 그래튼은 일의 미래가 유연한 전문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교육이고, 유연성을 위한 전제조건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1년 이상의 장기 휴식입니다. 기본소득은 이처럼 배움과 휴식이 평생 보장되는 삶의 꼴에 잘 부합하는 정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 인증 받지 않고도 예술작업과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 있으며, 돈이 되지 않는 연구사업을 진행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꺼려하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3D 업종에는 지금보다 높은 임금이 책정되는 공정함이 구현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십대 때부터 무의미한 스펙경쟁에 뛰어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다른 부문에서 더 생산적인 경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많은 도전과 실패가 가능한 산업 생태계에서 더 자주 진정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2 소비로부터의 자유와 생태사회로의 전환
생태문제의 해결은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는 엘리트 집단의 연구를 통해서만은 불가능합니다. 에너지의 소비자이자, 수요중심 에너지 정책의 알리바이인 개인들의 패러다임 변화와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 것은 곧, 노동과 소비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외주화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로 완성시키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대량생산(완전고용)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이 만들어낸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을 돈을 벌고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초국적 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더 값 싼 노동력 착취로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며 막대한 양의 탄소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현금지급형 복지가 이러한 소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생깁니다. 이제 시간을 들여 소비와는 다른, 생산적인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시간, 새로운 제작문화를 익히고 즐길 시간, 직접 먹거리를 길러 볼 시간이 생깁니다. 소비의 즐거움은 반복되면 될 수록 결핍이 커지고 쾌락의 역치가 높아지지만 생산적인 즐거움은 하면 할 수록 더 깊은 몰입과 새로운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또한 기본적인 자립 기술을 익힘으로서 외부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높여줍니다.
3. 전제조건
‘돈’은 매개체 입니다. 돈의 가치는 그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서비스와 재화 간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기본소득은 ‘존재 그 자체를 위한 돈’을 모두에게 지급합니다. 이때 이 ‘돈’이 모두의 존재를 긍정하며 어떤 관계의 흐름으로 흘러들어갈 것인지가 이 정책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극단적 상황을 가정하여,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이 모두 초국적 기업의 값싼 제품들과 대형마트로, 투기와 임대료로 흘러들어간다면 사회에 더 큰 격차와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유통될 필드를 교정하고 새롭게 제시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서 사회 전반의 역량이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국가와 지역사회라는 두 주체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1 공공서비스가 보장된 사회
몇 가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았지만 의료에 드는 돈이 천정부지로 높다면? 지금처럼 주거 임대비가 1인 가구 소득의 수채구멍인 상황에서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인해 월세가 함께 큰 폭으로 오른다면? 가족 및 지인과 교류할 시간을 얻었지만 통신비와 교통비가 오른다면?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데 고등교육기관의 질이 형편없다면?
기본소득이 강조하는 자유는 ‘모두에게’, ‘조건없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는 점에서 ‘평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소득만으로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충분히 빈곤을 해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서비스 정책 패키지가 함께 논의되고 도입되어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공공서비스는 현실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3.2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부상
또한 미래에는 지역사회의 존재감이 더 커져야 합니다.
우선 기본소득의 가장 바람직한 사용처는 지역입니다. 지역상권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대기업 유보금이 아닌 이웃의 소득으로 유입되며 실물경제를 활성화 시킵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생산적 활동의 무대 역시 지역에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머리를 맞댄다면, 에너지 자립 마을과 같은 전망도 세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존 복지담론의 주체는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통제하는 큰 정부, 타협의 대상인 민간 기업들과, 납세자이자 수혜자로서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납세자의 역할을 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수혜자인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중앙정부 대신 지방정부 및 시민사회라는 주체를 좀 더 수월히 불러옵니다. 공공서비스의 집행자로서 중앙정부는 너무 멀고 큰 존재입니다. 시민과 소통하며 지역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당합니다. 또한 그 비용부담을 모두 국가재정이 부담하는 것도 갈 수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고통받는 한국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현실이 부족한 재정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다행히 보육, 교육, 노인 돌봄 등 복지서비스 산업은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 산업들입니다. 다만 급여가 높지 않고, 이윤 중심의 수입사업이 될 경우 서비스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동반 제안된다면 이러한 단점을 상쇄될 것입니다. 동시에 일자리의 매개 및 공급처로서의 지역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여성과 노인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청년세대의 부담을 덜며 고령화가 불러일으키는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같은 제 3섹터의 주체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사업체인 동시에 결사체적 사명을 띠고 있는 이 같은 조직들의 이중의 부담을 한 결 덜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9세기는 노예해방, 20세기는 보통선거권, 21세기는 기본소득”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합니다.(한국의 근대사에는 맥락이 맞지 않지만) 매 번의 자유가 획득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학습과정입니다. 지역정치의 활성화와 함께할 때, 기본소득은 분명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 될 것입니다.
4.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입니다. 기본소득은 분명 급진적인 발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도입과정까지 급진적이리란 것은 아닙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이란 질문을 통해 자신이 현 사회의 이해관계망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 할 때 다양한 문제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통해 재의미화 되며 사회를 앞으로 추동할 것입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다양한 문제들이 집중될 수 있는 효율적인 아젠다입니다. 우리가 기본소득에 동의할 때, 당위에 머무르던 몇몇 아젠다들이 필요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효율적으로,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우리는 공통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참고]
<일의 미래>(2012) / 린다 그래튼 / 생각연구소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2010) / 조지 매그너스 / 부키
<조건없이 기본소득>(2014) / 바티스트 밀롱도 / 바다출판사
<사회혁신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추진하는가>(2011) / 제프 멀건 / 시대의 창
"사회복지 공무원 39% ‘고위험 스트레스군’" 2013.10.17, 시사in 317호
0. 소개
이 발제문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가 어떠한 사회를 꿈꾸며 활동을 해나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 미래까지 책임져야 할 청년(youth)으로서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결책을 바랍니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동등하게 배치될 수 있는 큰 사회상은 아닙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금액을 매 달 현금으로 지급하자”는 명료한 한 가지 아이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문제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 스위치와도 같고 따라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래사회와 관련된 몇 가지 결정적인 이슈들과 기본소득을 연결 지을 때 그려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미래: 기후변화, 인구고령화, 기술의 발전
21세기를 변화시킬 국가적 단위의 정책제안이라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기후변화 및 에너지자원 고갈이라는 생태문제와 인구고령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피크오일’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의 고갈은 대량생산의 비전을 꺼버렸고,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되어 이미 특정 지역에서는 높아진 해수면 높이에 주거를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인구고령화는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온 기대수명의 연장과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출산률 저하로 인해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노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확실하지 않은 채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고,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며 낮은 고용률까지 계속되면서 청년세대의 부담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미래를 구원할 수는 없을까요? 전문가들은 기술발전이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대체할만한 생산력과 정밀함을 제공하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 및 정보화의 추세가 ‘공유’를 활성화 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자원의 절약이며 인류의 발전이지만, 우리의 생계가 임금노동에 저당 잡혀 있는 이상, 이는 일자리와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양날의 칼로 다가옵니다. 최근 적법성을 갖고 이슈가 되고 있는 우버나, 기존 시장을 위협할 만큼 커진 에어비앤비 같은 서비스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에 기술한 경향들은 확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 역량의 증진
너무 큰 문제의식은 무기력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개개인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의 역량을 키워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은 다양하고, 그만큼 불확실하지만,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개인은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에 대해 기본적인 협상력을 갖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방종’이 우려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유의 권리와 책임이라는 양면을 지닌 ‘자율성’의 강화와 그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2.1 노동의 자유
기본소득은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지급함으로서 노동과 소득 간의 고리를 끊습니다. 즉, 생계를 위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에 매달릴 필요가 사라집니다. 이 말은 평생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쉴 때는 쉬면서 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긴 동시에 노동생산성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이제는 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휴식의 생산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경영학자 린다 그래튼은 일의 미래가 유연한 전문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교육이고, 유연성을 위한 전제조건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1년 이상의 장기 휴식입니다. 기본소득은 이처럼 배움과 휴식이 평생 보장되는 삶의 꼴에 잘 부합하는 정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 인증 받지 않고도 예술작업과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 있으며, 돈이 되지 않는 연구사업을 진행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꺼려하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3D 업종에는 지금보다 높은 임금이 책정되는 공정함이 구현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십대 때부터 무의미한 스펙경쟁에 뛰어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다른 부문에서 더 생산적인 경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 많은 도전과 실패가 가능한 산업 생태계에서 더 자주 진정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2 소비로부터의 자유와 생태사회로의 전환
생태문제의 해결은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는 엘리트 집단의 연구를 통해서만은 불가능합니다. 에너지의 소비자이자, 수요중심 에너지 정책의 알리바이인 개인들의 패러다임 변화와 삶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 것은 곧, 노동과 소비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외주화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로 완성시키는 방식은 지난 세기의 대량생산(완전고용)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이 만들어낸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을 돈을 벌고 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초국적 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더 값 싼 노동력 착취로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허락하며 막대한 양의 탄소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현금지급형 복지가 이러한 소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생깁니다. 이제 시간을 들여 소비와는 다른, 생산적인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더 돈독히 할 시간, 새로운 제작문화를 익히고 즐길 시간, 직접 먹거리를 길러 볼 시간이 생깁니다. 소비의 즐거움은 반복되면 될 수록 결핍이 커지고 쾌락의 역치가 높아지지만 생산적인 즐거움은 하면 할 수록 더 깊은 몰입과 새로운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또한 기본적인 자립 기술을 익힘으로서 외부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높여줍니다.
3. 전제조건
‘돈’은 매개체 입니다. 돈의 가치는 그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서비스와 재화 간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기본소득은 ‘존재 그 자체를 위한 돈’을 모두에게 지급합니다. 이때 이 ‘돈’이 모두의 존재를 긍정하며 어떤 관계의 흐름으로 흘러들어갈 것인지가 이 정책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극단적 상황을 가정하여,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이 모두 초국적 기업의 값싼 제품들과 대형마트로, 투기와 임대료로 흘러들어간다면 사회에 더 큰 격차와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유통될 필드를 교정하고 새롭게 제시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서 사회 전반의 역량이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국가와 지역사회라는 두 주체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1 공공서비스가 보장된 사회
몇 가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았지만 의료에 드는 돈이 천정부지로 높다면? 지금처럼 주거 임대비가 1인 가구 소득의 수채구멍인 상황에서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인해 월세가 함께 큰 폭으로 오른다면? 가족 및 지인과 교류할 시간을 얻었지만 통신비와 교통비가 오른다면? 전문성을 키우고 싶은데 고등교육기관의 질이 형편없다면?
기본소득이 강조하는 자유는 ‘모두에게’, ‘조건없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는 점에서 ‘평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소득만으로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충분히 빈곤을 해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서비스 정책 패키지가 함께 논의되고 도입되어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공공서비스는 현실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3.2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부상
또한 미래에는 지역사회의 존재감이 더 커져야 합니다.
우선 기본소득의 가장 바람직한 사용처는 지역입니다. 지역상권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대기업 유보금이 아닌 이웃의 소득으로 유입되며 실물경제를 활성화 시킵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생산적 활동의 무대 역시 지역에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머리를 맞댄다면, 에너지 자립 마을과 같은 전망도 세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존 복지담론의 주체는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통제하는 큰 정부, 타협의 대상인 민간 기업들과, 납세자이자 수혜자로서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납세자의 역할을 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수혜자인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복지시스템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중앙정부 대신 지방정부 및 시민사회라는 주체를 좀 더 수월히 불러옵니다. 공공서비스의 집행자로서 중앙정부는 너무 멀고 큰 존재입니다. 시민과 소통하며 지역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당합니다. 또한 그 비용부담을 모두 국가재정이 부담하는 것도 갈 수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고통받는 한국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현실이 부족한 재정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다행히 보육, 교육, 노인 돌봄 등 복지서비스 산업은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 산업들입니다. 다만 급여가 높지 않고, 이윤 중심의 수입사업이 될 경우 서비스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동반 제안된다면 이러한 단점을 상쇄될 것입니다. 동시에 일자리의 매개 및 공급처로서의 지역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여성과 노인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청년세대의 부담을 덜며 고령화가 불러일으키는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같은 제 3섹터의 주체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사업체인 동시에 결사체적 사명을 띠고 있는 이 같은 조직들의 이중의 부담을 한 결 덜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19세기는 노예해방, 20세기는 보통선거권, 21세기는 기본소득”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합니다.(한국의 근대사에는 맥락이 맞지 않지만) 매 번의 자유가 획득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학습과정입니다. 지역정치의 활성화와 함께할 때, 기본소득은 분명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 될 것입니다.
4.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입니다. 기본소득은 분명 급진적인 발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도입과정까지 급진적이리란 것은 아닙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이란 질문을 통해 자신이 현 사회의 이해관계망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 할 때 다양한 문제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통해 재의미화 되며 사회를 앞으로 추동할 것입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다양한 문제들이 집중될 수 있는 효율적인 아젠다입니다. 우리가 기본소득에 동의할 때, 당위에 머무르던 몇몇 아젠다들이 필요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효율적으로,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우리는 공통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참고]
<일의 미래>(2012) / 린다 그래튼 / 생각연구소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2010) / 조지 매그너스 / 부키
<조건없이 기본소득>(2014) / 바티스트 밀롱도 / 바다출판사
<사회혁신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추진하는가>(2011) / 제프 멀건 / 시대의 창
"사회복지 공무원 39% ‘고위험 스트레스군’" 2013.10.17, 시사in 317호
라벨:
기록,
기본소득,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biyn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20세기 팝업북, 21세기 서사의 배치(mis-en-scène)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 웨스 앤더슨) 리뷰
* 영화잡지 [아노]. 3호 미장센에 실린 글 입니다.
1. 웨스 앤더슨 콜렉션
웨스 앤더슨의 출세작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1998)의 주인공 맥스 피셔(제이슨 슈왈츠먼)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다. 그는 체스 클럽, 천문학 클럽, 펜싱 클럽, 프랑스 클럽, 양봉 클럽 등 다수의 클럽 회장이자 연극 연출가이며 교지 편집장 등등을 역임하고 있다. 사업가 블럼(빌 머레이)은 이런 맥스를 야망 있는 소년이라며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실 맥스는 비전과 야망을 갖고 맹렬하게 스펙을 쌓는 청년이라기보다는 학교에 틀어박혀 각종 교내 활동을 수집하는 데 몰입하는 유아적인 인물일 뿐이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닮아있기도 하다. 무표정한 인물들, 강박적인 대칭 화면과 연극적 구성 등, 직선적이고 각 잡힌 형식의 화면들은 앤더슨이 수집해온 컬러풀한 사물들을 정연하게 전시하기에 딱 알 맞는 진열장이다. 그 뒤로는 역시 취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선곡이 흐른다. 인물들의 옷 스타일을 비롯한 각각의 소품들은 영화 전체를 대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완성도 높은 아트워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그리고 많은 경우 영화 밖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르누아르, 오퓔스, 고다르, 트뤼포, 루비치, 스콜세지 등 웨스 앤더슨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리스트는 길고 화려하다. 그러나 앤더슨이 이들 중 누군가를 계승한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원색, 트래킹 샷, 롱테이크, 화려함, 소동극. 60년대 음악 등 그의 영화에 들어있는 기호들이 순간순간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 역시 취향에 맞게 수집된 기호들일 뿐, 감독의 방법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오직 앤더슨이다. 처음 보는 스틸 샷 한 장 만으로도 우리는 그 장면이 그의 영화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개성의 증명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다 엇비슷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장센 뿐 아니라, 제 나름의 결핍을 지닌 미숙한 인물들이 소동극을 벌이다 결국 저마다의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성장의 스토리 역시 반복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앤더슨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반복은 비판받아야 할 매너리즘이라기보다 일련의 시리즈가 제공하는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다. 앤더슨이 자신이 수집해온 기호들로 미장센과 O.S.T를 채우면, 그의 팬들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차곡차곡 수집한다. 학교와, 저택과, 기차와, 바다를 마치 레고 시리즈처럼 차곡차곡. 데뷔 이후 줄곧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웨스 앤더슨이 특유의 높은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지지보다는 선호를 받는, 취향의 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2012) 이후에는 지난 작품들을 망라한 콜렉션 북이 출간된 바 있다. 과장을 약간 섞어 ‘취존’이라는 표현은 그와 그의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키덜트 무비’, ‘힙스터 무비’라는 수식은 앤더슨의 영화들이 그간 어떤 맥락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훈장을 달고 올해 초 국내 개봉한 근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은 그의 지위를 취향의 층위 너머로 끌어올릴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팬시한 외양의 호텔은 그 나름 대작의 아우라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일까? 먼저 웨스 앤더슨 월드의 윤곽을 그려본 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 세계의 경계선을 어떻게 변경시켰는지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2. 사각형의 세계
웨스 앤더슨은 곧잘 연극(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혹은 책(로얄 테넌바움)을 모방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막이 오르고, 장이 나눠지고, 삽화가 등장하고, 타이포그래피가 삽입된다. 눈이 즐거운 동시에 의문이 든다. 이 사람은 왜 연극 연출가나 작가가 되지 않고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스크린도 사각형이기 때문이 아닐까? 앤더슨의 창작동기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현실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하려는 종류의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가능하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과 명료하게 구분되는 사각형 안의 통제 가능한 세계이다. 책과 무대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선호는 앤더슨의 치밀하게 짜여 진 완벽주의적 미장센에서부터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트래킹 샷은 정연하게 수평을 그리고 인물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연극적으로 움직인다. 실제로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전에 결정한 뒤 촬영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완벽한 틀에 대한 집착은 이야기의 완결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코미디, 멜로, 서스펜스 중 어떤 장르로 불러줘야 할지 애매한 앤더슨의 영화들은 성장물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한 데 묶일 수 있다. 이야기들은 교훈을 남기며 인생의 한 시기가 마무리 되는 것으로, 때로 누군가의 죽음을 매듭삼아 완결된다. 이는 무대에서 막이 내리는 것 같은, 책의 뒤표지를 덮는 것 같은 완벽한 종결의 인상을 준다. 그것이 소위 열린 결말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 현실적인 시각적 완결성이 이러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로얄 테넌바움> 같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테넌바움 가와 그 주변의 기이한 인물들이 관객과 같은 현실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리란 상상을 실감나게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 복장과 표정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현실에 없다.
3. 진짜 같은
그런데 <문라이즈 킹덤>은 조금 다르다. 전작들과 달리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니라 그냥 소년 소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아마 웨스 앤더슨의 가장 어른스러운 드라마일 것이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다 자란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마무리 한 후에도 딱히 인물들의 내적 변화나 반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장물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애정관계를 허들로 삼는 성장물이었던 전작들을 역전시킨 듯 오히려 성장물의 외피를 쓴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사랑(혹은 우정)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이 이야기의 목적지이자 핵심이다. 세계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두 소년 소녀가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편지를 통해 감정을 교환하며 둘 만의 낙원에 함께 있으려 한다는 줄거리는 관객들로부터 익숙하게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그 만큼 이 작품의 사랑은 전에 없이 진짜 같은 것이 된다. 앤더슨의 영화에 잔혹한 장면들은 제법 자주 등장하지만, 샘(자레드 길먼)이 낚시 바늘로 수지(사라 헤이워드)의 귀를 뚫어주는 장면만큼 고통이 생생하고 아찔하게 와 닿는 장면은 없다.
진짜 같아진 것은 인물과 감정만이 아니다. 배경의 인공적 느낌도 한 결 덜어졌다. <문라이즈 킹덤>의 모험은 초원과 숲, 해변과 바다에서 진행된다. 이는 앤더슨이 무대, 혹은 동화책을 벗어나 어느 정도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단 이 모든 변화는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앤더슨에게 섬이란 자연까지 세트로 삼을 수 있는, 확장된 버전의 무대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와 숲을 포함한 무대 위에서, 뉴욕이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보다 마음 놓고 넓은 공간감을 즐긴다. 이전 작품들이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완성되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은 이 섬의 지도를 그려내며 완성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딘지 쓸쓸한 정조를 풍기는 삶의 지속이 남아있다. 앤더슨의 1960년대는 그가 그려내는 동시대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노스탤지어만이 과거의 유물을 끊임없이 수집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진짜 같은 감정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4. 1점 투시의 3차원 서사
<문라이즈 킹덤>이 한정 된 공간 속의 모험담이었던 데 반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차 대전 전의 유럽이라는 광활한 공간으로 돌아가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세운다. 대신 이번에 한정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점점 먼 과거로 향해야 한다. 첫째로 묘지의 소녀가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작가(톰 윌킨슨)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 든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난 젊은 시절의 작가(주드 로)를 거친 뒤에야 마침내 무스타파가 구스타브의 로비보이였던 어린 시절(이하 제로)의 '이야기'로 진입 할 수 있다. 한 명의 독자(소녀)와, 한 명의 청자(작가), 그리고 한 명의 화자이자 목격자(무스타파)를 거치며, 이미 세 차례 종결된 이야기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 한정된 시간 구성 속에서 전에 없이 스케일 큰 서사를 펼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뿐이다. 틸다 스윈튼, F 머레이 아브라함, 하비 케이틀, 마티유 아말릭, 레아 세이두, 주드 로, 윌렘 대포(그리고 조지 클루니)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캐스트를 채운 배우들은 이야기의 안내자나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신속하고 말끔하게 수행한 뒤 잔상 없이 퇴장한다. 조연들에게 따로 허락된 사연이 없다는 점 또한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시간대에 따라 화면비를 바꾸는 수고이다. (30년대 - 1.37:1, 60년대 - 1.85:1, 80년대 - 2.35:1) 이는 이야기의 중층적 시간 구성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면서 관객이 점점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3차원 적 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에 이야기의 초점이 단 한 명의 인물, 구스타브에 맞춰지면서 그 자체가 소실점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이에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쳐인 1점 투시 촬영과 인물을 중앙에 두고 움직이는 트래킹샷이 서사적으로 구현된다. 전작들이 이야기책이라는 병렬적이고 평면적인 심상을 완성한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확실히 입체로서 완성된다.
5. 20세기 유럽이라는 팝업북
한편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간 구성과는 달리 공간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구스타브와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마치 보드게임 위의 말처럼 호텔, 마담 D.의 저택, 수도원과 감옥, 이 점에서 저 점으로 동선 없이 이동한다. 다시 인공의 세계로 돌아온 웨스 앤더슨이 만든 유럽에 진짜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예쁜 마분지 같은 알프스는 귀엽고, 국경을 지나는 기차는 아무래도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유럽이 당시 유럽의 실제 모습보다는 30년대 헐리웃에서 활동한 동유럽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세트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재현이 아니라 수집과 조립과 상상의 작가라는 걸 관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품 제작을 위한 집요한 고증 따위와는 별개로, 지난 시절을 설득력 있게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그가 성취하려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중층적 시간 구성의 서사가 만들어낸 입체적 공간은 섬세하고 평면적인 미장센으로 채워지게 되고, 결국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한권의 ‘팝업북’으로 완성된다.
이 팝업북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예쁜 그림들과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과 파시즘이라는, 20세기를 양분하는 역사를 담고도 이렇게 팬시한 제품을 내놓아도 되는 걸까? 파스텔톤의 멘들스 케이크 박스가 정의의 중심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파시스트들의 깃발이 내걸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마침내 드미트리 일당과 구스타브 일행이 맞닥뜨리고 총격전이 오갈 때, 멘들스 박스는 총알을 막아주고, 난간에서 떨어지는 제로와 아가사를 받아준다. 역사 속의 거악을 불러내 대처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작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다채롭고 입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도 그 사이즈는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녀의 무릎 위를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까닭에 감탄과 질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말 뛰어난 팝업북이다! 하지만 고작 팝업북을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원: 기억의 재현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기는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독자인 소녀와, 청자인 작가를 지나 관객이 실질적으로 접속하는 시점은 제로, 무스타파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구스타브라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두 말할 것 없이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일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빛을 발한다.
아가사의 첫 등장 장면과 데이트 씬은 앤더슨의 그림들 사이에서 돌출적인 인상을 남긴다. 첫 등장 장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 구시가지의 평범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장면에는 앤더슨 특유의 인공적인 분위기가 전혀 더해져 있지 않다, 대칭도, 평면적이고 회화적인 느낌도 없이 평범한 새벽녘의 차갑고 낮은 채도 속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차가운 공기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겨울의 설산이 배경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찬 공기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이 지나갈 때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무스타파는 아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즉 이 장면은 책 속의 이야기도, 작가에게 전달된 말도 아니라 무스타파의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다.
회전목마에서의 데이트 씬 역시 예외적이다. 화면구성이나 카메라의 동선이나 각을 무척 잘 잡는 앤더슨의 영화에서 동선이 원을 그린다. 그리고 제로에게 낭만 시 선집을 선물 받은 뒤 클로즈업 된 아가사의 얼굴 위로 동그란 색색의 조명들이 둥글게 움직인다.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이 장면들은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시간의 재현을 실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인 순간이다. 제로와 아가사의 사랑에 대한 예외적 취급은 팝업북의 삽화가 묘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퇴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묘지와 대비를 이루며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마분지 세계의 이야기에 일말의 ‘진정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굉장히 완성도 높은 마분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효과이다.
7. 21세기의 걸작?
자, 그래서 잘 만든 팝업북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으로 아름답게 감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인가? 웨스 앤더슨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을까? 촌스러운 질문에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는 진부한 대답만이 기다릴 뿐이다. 다만 지지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 앤더슨이 21세기 초반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21세기 초라는 동시대를 투명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인류는 달에 인간을 보냈지만 오늘 날 인류는 인간을 달에 보낸 컴퓨터보다 수 배 뛰어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보이저 1호가 36년 만에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뉴스를 리트윗하고 잊어버린다. 21세기 대도시의 시민에게는 우주도 감동과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영화는 오죽할까. 극장용 영화 산업은 사실상 100년 전에 발명된 기술인 3D에서 스펙터클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3D 영화야말로 진짜 입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팝업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전까지는 그의 영화제작 방식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동시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으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부터 눈을 돌려 자꾸 과거로 향하는 동시대의 퇴행적 관점 자체를 액자 서사 구조 안에 내재화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미장센과 서사의 구조를 결합함으로서 취향의 영역 바깥에 생성시키는 의미이며,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일 것이다. 소녀가 스킨헤드 풍의 청년이 서있는 무덤 입구를 지나 살풍경한 작가의 묘 옆에서 책을 펼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도입부는 이러한 시대의 적나라한 거울 같은 장면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그것이 기대한 만큼 숭고하거나 충분히 아름답지 않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팝업북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이 그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만큼 위대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가 가장 ‘21세기 적인 방식의 진정성’을 개척해내기를 바란다. 그 역시 난이도로 따져보자면 전에 없이 위대한 과제일 것이다.
* P.S
이제 빛바랜 향수와 함께 무릎 위의 책을 덮고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비석 같은 질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20세기라는 노스탤지어, 혹은 테러나 재해, 불황을 바라보는 생존자의 ‘윤리적 시선’ 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전쟁뿐일까? 중동과 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 영화가 영화제를 점령하게 될 때는 언제쯤 올까? 과연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있기는 한가.
1. 웨스 앤더슨 콜렉션
웨스 앤더슨의 출세작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1998)의 주인공 맥스 피셔(제이슨 슈왈츠먼)는 욕심이 많은 소년이다. 그는 체스 클럽, 천문학 클럽, 펜싱 클럽, 프랑스 클럽, 양봉 클럽 등 다수의 클럽 회장이자 연극 연출가이며 교지 편집장 등등을 역임하고 있다. 사업가 블럼(빌 머레이)은 이런 맥스를 야망 있는 소년이라며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실 맥스는 비전과 야망을 갖고 맹렬하게 스펙을 쌓는 청년이라기보다는 학교에 틀어박혀 각종 교내 활동을 수집하는 데 몰입하는 유아적인 인물일 뿐이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닮아있기도 하다. 무표정한 인물들, 강박적인 대칭 화면과 연극적 구성 등, 직선적이고 각 잡힌 형식의 화면들은 앤더슨이 수집해온 컬러풀한 사물들을 정연하게 전시하기에 딱 알 맞는 진열장이다. 그 뒤로는 역시 취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선곡이 흐른다. 인물들의 옷 스타일을 비롯한 각각의 소품들은 영화 전체를 대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완성도 높은 아트워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그리고 많은 경우 영화 밖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르누아르, 오퓔스, 고다르, 트뤼포, 루비치, 스콜세지 등 웨스 앤더슨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리스트는 길고 화려하다. 그러나 앤더슨이 이들 중 누군가를 계승한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원색, 트래킹 샷, 롱테이크, 화려함, 소동극. 60년대 음악 등 그의 영화에 들어있는 기호들이 순간순간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 역시 취향에 맞게 수집된 기호들일 뿐, 감독의 방법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오직 앤더슨이다. 처음 보는 스틸 샷 한 장 만으로도 우리는 그 장면이 그의 영화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개성의 증명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다 엇비슷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장센 뿐 아니라, 제 나름의 결핍을 지닌 미숙한 인물들이 소동극을 벌이다 결국 저마다의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성장의 스토리 역시 반복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앤더슨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반복은 비판받아야 할 매너리즘이라기보다 일련의 시리즈가 제공하는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다. 앤더슨이 자신이 수집해온 기호들로 미장센과 O.S.T를 채우면, 그의 팬들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차곡차곡 수집한다. 학교와, 저택과, 기차와, 바다를 마치 레고 시리즈처럼 차곡차곡. 데뷔 이후 줄곧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웨스 앤더슨이 특유의 높은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지지보다는 선호를 받는, 취향의 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2012) 이후에는 지난 작품들을 망라한 콜렉션 북이 출간된 바 있다. 과장을 약간 섞어 ‘취존’이라는 표현은 그와 그의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키덜트 무비’, ‘힙스터 무비’라는 수식은 앤더슨의 영화들이 그간 어떤 맥락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훈장을 달고 올해 초 국내 개봉한 근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은 그의 지위를 취향의 층위 너머로 끌어올릴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팬시한 외양의 호텔은 그 나름 대작의 아우라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일까? 먼저 웨스 앤더슨 월드의 윤곽을 그려본 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 세계의 경계선을 어떻게 변경시켰는지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2. 사각형의 세계
웨스 앤더슨은 곧잘 연극(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 혹은 책(로얄 테넌바움)을 모방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막이 오르고, 장이 나눠지고, 삽화가 등장하고, 타이포그래피가 삽입된다. 눈이 즐거운 동시에 의문이 든다. 이 사람은 왜 연극 연출가나 작가가 되지 않고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스크린도 사각형이기 때문이 아닐까? 앤더슨의 창작동기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현실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하려는 종류의 욕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가능하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과 명료하게 구분되는 사각형 안의 통제 가능한 세계이다. 책과 무대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선호는 앤더슨의 치밀하게 짜여 진 완벽주의적 미장센에서부터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트래킹 샷은 정연하게 수평을 그리고 인물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연극적으로 움직인다. 실제로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전에 결정한 뒤 촬영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완벽한 틀에 대한 집착은 이야기의 완결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코미디, 멜로, 서스펜스 중 어떤 장르로 불러줘야 할지 애매한 앤더슨의 영화들은 성장물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한 데 묶일 수 있다. 이야기들은 교훈을 남기며 인생의 한 시기가 마무리 되는 것으로, 때로 누군가의 죽음을 매듭삼아 완결된다. 이는 무대에서 막이 내리는 것 같은, 책의 뒤표지를 덮는 것 같은 완벽한 종결의 인상을 준다. 그것이 소위 열린 결말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 현실적인 시각적 완결성이 이러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로얄 테넌바움> 같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테넌바움 가와 그 주변의 기이한 인물들이 관객과 같은 현실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리란 상상을 실감나게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 복장과 표정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현실에 없다.
3. 진짜 같은
그런데 <문라이즈 킹덤>은 조금 다르다. 전작들과 달리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니라 그냥 소년 소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아마 웨스 앤더슨의 가장 어른스러운 드라마일 것이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다 자란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는 사건의 기승전결을 마무리 한 후에도 딱히 인물들의 내적 변화나 반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장물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애정관계를 허들로 삼는 성장물이었던 전작들을 역전시킨 듯 오히려 성장물의 외피를 쓴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사랑(혹은 우정)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이 이야기의 목적지이자 핵심이다. 세계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두 소년 소녀가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편지를 통해 감정을 교환하며 둘 만의 낙원에 함께 있으려 한다는 줄거리는 관객들로부터 익숙하게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그 만큼 이 작품의 사랑은 전에 없이 진짜 같은 것이 된다. 앤더슨의 영화에 잔혹한 장면들은 제법 자주 등장하지만, 샘(자레드 길먼)이 낚시 바늘로 수지(사라 헤이워드)의 귀를 뚫어주는 장면만큼 고통이 생생하고 아찔하게 와 닿는 장면은 없다.
진짜 같아진 것은 인물과 감정만이 아니다. 배경의 인공적 느낌도 한 결 덜어졌다. <문라이즈 킹덤>의 모험은 초원과 숲, 해변과 바다에서 진행된다. 이는 앤더슨이 무대, 혹은 동화책을 벗어나 어느 정도 현실 세계로 진입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단 이 모든 변화는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앤더슨에게 섬이란 자연까지 세트로 삼을 수 있는, 확장된 버전의 무대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와 숲을 포함한 무대 위에서, 뉴욕이나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보다 마음 놓고 넓은 공간감을 즐긴다. 이전 작품들이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완성되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은 이 섬의 지도를 그려내며 완성되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딘지 쓸쓸한 정조를 풍기는 삶의 지속이 남아있다. 앤더슨의 1960년대는 그가 그려내는 동시대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노스탤지어만이 과거의 유물을 끊임없이 수집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진짜 같은 감정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4. 1점 투시의 3차원 서사
<문라이즈 킹덤>이 한정 된 공간 속의 모험담이었던 데 반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차 대전 전의 유럽이라는 광활한 공간으로 돌아가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세운다. 대신 이번에 한정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점점 먼 과거로 향해야 한다. 첫째로 묘지의 소녀가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작가(톰 윌킨슨)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 든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난 젊은 시절의 작가(주드 로)를 거친 뒤에야 마침내 무스타파가 구스타브의 로비보이였던 어린 시절(이하 제로)의 '이야기'로 진입 할 수 있다. 한 명의 독자(소녀)와, 한 명의 청자(작가), 그리고 한 명의 화자이자 목격자(무스타파)를 거치며, 이미 세 차례 종결된 이야기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 한정된 시간 구성 속에서 전에 없이 스케일 큰 서사를 펼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뿐이다. 틸다 스윈튼, F 머레이 아브라함, 하비 케이틀, 마티유 아말릭, 레아 세이두, 주드 로, 윌렘 대포(그리고 조지 클루니)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캐스트를 채운 배우들은 이야기의 안내자나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신속하고 말끔하게 수행한 뒤 잔상 없이 퇴장한다. 조연들에게 따로 허락된 사연이 없다는 점 또한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시간대에 따라 화면비를 바꾸는 수고이다. (30년대 - 1.37:1, 60년대 - 1.85:1, 80년대 - 2.35:1) 이는 이야기의 중층적 시간 구성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면서 관객이 점점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3차원 적 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에 이야기의 초점이 단 한 명의 인물, 구스타브에 맞춰지면서 그 자체가 소실점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이에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쳐인 1점 투시 촬영과 인물을 중앙에 두고 움직이는 트래킹샷이 서사적으로 구현된다. 전작들이 이야기책이라는 병렬적이고 평면적인 심상을 완성한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확실히 입체로서 완성된다.
5. 20세기 유럽이라는 팝업북
한편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간 구성과는 달리 공간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구스타브와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마치 보드게임 위의 말처럼 호텔, 마담 D.의 저택, 수도원과 감옥, 이 점에서 저 점으로 동선 없이 이동한다. 다시 인공의 세계로 돌아온 웨스 앤더슨이 만든 유럽에 진짜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예쁜 마분지 같은 알프스는 귀엽고, 국경을 지나는 기차는 아무래도 제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유럽이 당시 유럽의 실제 모습보다는 30년대 헐리웃에서 활동한 동유럽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세트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재현이 아니라 수집과 조립과 상상의 작가라는 걸 관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품 제작을 위한 집요한 고증 따위와는 별개로, 지난 시절을 설득력 있게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그가 성취하려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중층적 시간 구성의 서사가 만들어낸 입체적 공간은 섬세하고 평면적인 미장센으로 채워지게 되고, 결국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한권의 ‘팝업북’으로 완성된다.
이 팝업북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예쁜 그림들과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과 파시즘이라는, 20세기를 양분하는 역사를 담고도 이렇게 팬시한 제품을 내놓아도 되는 걸까? 파스텔톤의 멘들스 케이크 박스가 정의의 중심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파시스트들의 깃발이 내걸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마침내 드미트리 일당과 구스타브 일행이 맞닥뜨리고 총격전이 오갈 때, 멘들스 박스는 총알을 막아주고, 난간에서 떨어지는 제로와 아가사를 받아준다. 역사 속의 거악을 불러내 대처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작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다채롭고 입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도 그 사이즈는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녀의 무릎 위를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까닭에 감탄과 질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말 뛰어난 팝업북이다! 하지만 고작 팝업북을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원: 기억의 재현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기는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독자인 소녀와, 청자인 작가를 지나 관객이 실질적으로 접속하는 시점은 제로, 무스타파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구스타브라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두 말할 것 없이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일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특별하게 빛을 발한다.
아가사의 첫 등장 장면과 데이트 씬은 앤더슨의 그림들 사이에서 돌출적인 인상을 남긴다. 첫 등장 장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유럽 구시가지의 평범한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장면에는 앤더슨 특유의 인공적인 분위기가 전혀 더해져 있지 않다, 대칭도, 평면적이고 회화적인 느낌도 없이 평범한 새벽녘의 차갑고 낮은 채도 속에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차가운 공기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겨울의 설산이 배경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찬 공기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이 지나갈 때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무스타파는 아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즉 이 장면은 책 속의 이야기도, 작가에게 전달된 말도 아니라 무스타파의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다.
회전목마에서의 데이트 씬 역시 예외적이다. 화면구성이나 카메라의 동선이나 각을 무척 잘 잡는 앤더슨의 영화에서 동선이 원을 그린다. 그리고 제로에게 낭만 시 선집을 선물 받은 뒤 클로즈업 된 아가사의 얼굴 위로 동그란 색색의 조명들이 둥글게 움직인다.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원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이 장면들은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시간의 재현을 실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인 순간이다. 제로와 아가사의 사랑에 대한 예외적 취급은 팝업북의 삽화가 묘사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퇴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묘지와 대비를 이루며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마분지 세계의 이야기에 일말의 ‘진정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굉장히 완성도 높은 마분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효과이다.
7. 21세기의 걸작?
자, 그래서 잘 만든 팝업북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으로 아름답게 감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걸작인가? 웨스 앤더슨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을까? 촌스러운 질문에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는 진부한 대답만이 기다릴 뿐이다. 다만 지지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 앤더슨이 21세기 초반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21세기 초라는 동시대를 투명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인류는 달에 인간을 보냈지만 오늘 날 인류는 인간을 달에 보낸 컴퓨터보다 수 배 뛰어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보이저 1호가 36년 만에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뉴스를 리트윗하고 잊어버린다. 21세기 대도시의 시민에게는 우주도 감동과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영화는 오죽할까. 극장용 영화 산업은 사실상 100년 전에 발명된 기술인 3D에서 스펙터클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3D 영화야말로 진짜 입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팝업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전까지는 그의 영화제작 방식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동시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겠으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부터 눈을 돌려 자꾸 과거로 향하는 동시대의 퇴행적 관점 자체를 액자 서사 구조 안에 내재화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미장센과 서사의 구조를 결합함으로서 취향의 영역 바깥에 생성시키는 의미이며,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일 것이다. 소녀가 스킨헤드 풍의 청년이 서있는 무덤 입구를 지나 살풍경한 작가의 묘 옆에서 책을 펼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도입부는 이러한 시대의 적나라한 거울 같은 장면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그것이 기대한 만큼 숭고하거나 충분히 아름답지 않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팝업북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이 그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만큼 위대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가 가장 ‘21세기 적인 방식의 진정성’을 개척해내기를 바란다. 그 역시 난이도로 따져보자면 전에 없이 위대한 과제일 것이다.
* P.S
이제 빛바랜 향수와 함께 무릎 위의 책을 덮고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비석 같은 질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20세기라는 노스탤지어, 혹은 테러나 재해, 불황을 바라보는 생존자의 ‘윤리적 시선’ 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전쟁뿐일까? 중동과 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 영화가 영화제를 점령하게 될 때는 언제쯤 올까? 과연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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